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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를 향한 관심만큼 협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도 커졌다. 연일 이어지는 방문과 각성자 테스트에 대한 문의로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수에 대한 공포보다 에스퍼가 보인 능력에 빠져든 사람들이 협회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일반인 경호원과 직원을 추가로 고용했음에도 연일 몰려드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전 국민의 관심과 호의를 받는 시기를 놓칠 리 없는 권해성은 대대적으로 2세대 2차 각성 테스트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유마로의 부상 소식은 자연스럽게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런 바쁜 시기에도 재윤은 예정대로 가드 적성 검사를 시행했다.
인성과 사상, 적성에 대한 문항을 본 가드들은 뻔하디뻔한 검사지에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기업이 원할 만한 답을 적어 냈다. 그중에는 재하의 개인 가드인 이천오도 포함돼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경고 차원에서 시행한 검사였지만, 이천오의 검사지는 재윤이 따로 챙겨 확인했다.
“예상대로야.”
판에 박힌 정석적인 대답들과 달리 이천오의 답안은 에스퍼 가드로서 부적합한 답들이 상당했다.
예문 중 가드 대상자와 일반인이 동시에 위험에 처했을 경우, 대부분 숫자가 많은 쪽이나 약한 상대를 구하겠다는 식의 정석 답안을 내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천오는 고지식할 정도로 가드가 해야 할 임무를 고집했다. 진심은 어떨지 몰라도 관리자가 볼 수 있는 검사지에 본심을 이렇게나 솔직히 털어놓는 것도 이천오다웠다.
맹목적일 정도로 대상만을 바라보고 지켜 내는 건 도덕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권해일과는 다른 점이지.’
그래서 형의 가드로 적합했다. 이성적이거나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한번 지정한 대상을 제 목을 걸고 지킬 테니까.
재윤은 곧바로 이천오의 각성 테스트 일정을 잡았다. 다행히 이번 테스트에서 이천오는 각성에 성공했다. 2세대 2차 각성 테스트 준비에도 바쁠 시기에 이천오에게 각성 테스트를 시킨 보람이 있었다.
“이상한데…….”
재윤이 예상한 이천오의 등급은 D급으로, 육체 강화 이능이었다. 그러나 등록된 수치는 E급. 이능 역시 힘 증가 정도만 기록되어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재윤은 바쁜 와중에도 이천오를 찾았다.
훈련실에서 체력 단련 중이던 여러 가드 중 이천오는 단연 눈에 띄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타입이라 쉴 줄을 몰랐다. 재윤의 등장에 이목이 쏠렸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이천오에게 다가갔다.
“이천오 가드. 아니, 이제 에스퍼라고 불러야겠군요.”
“부끄럽습니다. 가드로 충분합니다, 서재윤 에스퍼.”
“테스트 결과가 이상해서 찾아왔습니다. 추가 테스트를 했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나요?”
“시간은 괜찮지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천오는 평소에 그가 그러했듯 최선을 다해 테스트에 임했었다. E급이라도 체력과 힘이 이전보다 배는 강해져 가드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각성만으로도 만족한 이천오의 솔직한 반응에 재윤은 더욱 테스트를 다시 하고자 했다.
재윤의 권유에 이천오는 훈련실을 찾았다. 훈련실은 VR과 홀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었다. 현실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기에 그곳에서 추가 테스트를 시행했다.
“이천오 에스퍼, 실전처럼 임해주세요.”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재윤은 능숙하게 프로그램을 다뤄 실전 대피 훈련 상황을 연출했다.
더미에 홀로그램으로 마수를 덧씌우고 VR 장비까지 착용하면 제법 현실적이었다. 상황을 주면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 이능을 끌어 올리는 식이었다.
이천오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가 보여 준 이능은 힘이 강해지는 정도였다. 파괴력만 올라갔을 뿐, 원래 가졌어야 할 육체 강화와는 다른 결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시민을 지켜 내 봅시다.”
재윤이 직접 인물 데이터를 넣자 일반인들이 다른 더미에 덧씌워졌다. 이천오는 능숙하고 정중하게 그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몇몇을 구하던 이천오의 앞에 예기치 못한 존재가 끼어들었다.
이천오라면 분명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인물, 서재하의 홀로그램이었다.
데이터를 넣은 재윤조차 멈칫할 만큼 데이터 구현은 훌륭했다. 헐렁한 맨투맨을 입은 재하가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은 재윤조차 손끝이 움찔거릴 만큼 현실적이었다.
이천오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재하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려 했다. 재윤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마수 데이터를 불러왔다. 골목길처럼 구현된 장소에 갑자기 나타난 레드 맨티스에도 이천오는 재하의 앞을 막아섰다.
“피하십시오.”
상황에 집중한 이천오는 대답할 리 없는 더미를 향해 대화를 시도했다. 그만큼 집중한 탓이었다.
레드 맨티스가 휘두르는 칼날 같은 앞다리를 막아서는 이천오의 그래프가 눈에 띄게 요동쳤다. 재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천오는 주저앉은 재하가 상처를 입은 상황임을 인지했다.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알지만, 실전을 대비한 훈련이기에 이천오는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가진 무기가 없어 팔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맨티스를 막아 내며 재하를 일으키려 했다. 실제로 상처를 입지는 않아도 충격은 전해질 텐데 물러서지 않았다.
꼼짝도 못 하는 재하를 본 이천오가 몸을 내던져 맨티스를 밀어냈다. 짧은 시간, 이천오의 마나 파동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크게 요동치며 단계가 상승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천오의 재각성 열쇠는 이거였어.”
더미의 무게에 실랑이를 벌이던 이천오가 한계까지 힘을 끌어 올리자 순식간에 튕겨 나간 더미를 보고 당황했다.
늦은 각성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만큼 이루어졌기에 재윤은 만족스러웠다.
* * *
폭탄 돌리기 하는 기분으로 TV 채널을 돌리던 것도 하루 만에 지루해졌다. 숙소에 혼자 있자니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이내 심심해졌다.
자신을 혼자 둘 리 없는 에스퍼들이 숙소에 오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TV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바쁠지 짐작이 됐다. 호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도 펼쳐지고 있었다.
“저것들이 지들은 안전한 방구석에서 입만 가볍지, 아주.”
신경 쓰지 말라고 응원해 주고 싶어도 다들 바쁠 때라 연락하기도 애매했다. 답답함에 문을 열어 보자 언제부터 지키고 있었는지 이천오가 고개를 숙여 왔다.
“안녕하십니까.”
“어? 이천오 씨?”
재하는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이천오가 반가웠다. 에스퍼들이 번갈아 오가면서 가드의 존재가 무의미해졌었다. 자연스럽게 물러났던 이천오가 다시 문 앞을 지키고 있자 유용함을 떠나 반갑고 안심이 됐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이천오는 어딘지 모르게 단단해 보였다. 재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굴리자 평소 무표정하던 이천오가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운동하셨어요? 몸이 엄청 단단해진 거 같아서요.”
남자 몸을 굳이 눈여겨본 건 아니었지만, 유독 달라 보여 묻고 말았다. 이에 이천오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D급 육체 강화계로 각성했습니다.”
“진짜요? 와, 축하드려요.”
“아닙니다. 다 서재하 님 덕분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다 이천오 씨 능력인 거죠.”
이천오가 인사치레하듯 건넨 말이라 생각한 재하가 가볍게 답하자 진지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서재하 님을 지키려고 강해진 겁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천오는 이상하리만치 재하를 지키는 일에 맹목적이었다. 이천오는 대격변의 날, 자신이 지킬 수 없었던 재하를 향해 죄책감과 책임감이 생겼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간절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천오의 묵직한 말에 재하는 눈을 굴리다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앗, 그럼 교육받으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드보다는 에스퍼를 하는 게 더 좋은 거잖아요.”
재하도 나름 공부한 게 있다 보니 가드를 하기엔 아까운 등급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천오는 조금도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까지 쳤다.
“아닙니다. 전 서재하 님을 지키는 게 더 좋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해일의 진중함을 닮은 모습에 재하는 더 묻지 않았다. 이런 타입은 한 번 말하면 물러서지 않음을 그간 여러 번 경험해 왔다.
“그럼 같이 식사하실래요? 지금부터 만들어야 해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닙니다. 전 여기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평소처럼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아…… 네.”
자신을 위하는 건 맞는데 더 가까워지진 않는 이천오와의 사이가 애매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재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2차 가이딩을 해 버린 탓에 재윤과 마주치는 건 민망했으나 밥은 챙겨 먹이고 싶었다.
어차피 뭐라도 만들긴 해야 했기에 재하는 냉장고를 털기 시작했다. 남은 밥과 채소로 볶음밥을 하면서 냉동 해물을 털어 짬뽕 국물 비슷한 걸 만들어 냈다. 버릇처럼 5인분 이상을 만들어 버린 재하는 1인분씩 덜어 놓고는 일단 문자를 보냈다.
이제 다시 일상이 돌아오겠거니 가볍게 여긴 재하는 밀려오는 졸음을 거부하지 않았다.
시작은 민망했던 재하 쪽에서 동생을 피하는 거였다. 그러나 막상 동생이 나타나질 않으니 당황스러웠다. 밥만 해 놓고 방으로 숨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예 나타나지 않는 재윤으로 인해 재하는 이제 당당하게 거실에서 기다렸지만, 끝끝내 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에 빠진 놈 구해 줬더니, 피해?”
괘씸죄를 묻고자 재하는 팔을 걷어붙였다. 직원 식당에서 공수해 온 김치와 쟁여 둔 참치 캔을 꺼내 냄새를 풍겼다.
“와…… 맛있는 냄새 때문에 그냥 갈 수가 없어요, 선배.”
김치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냄새를 솔솔 풍겼더니 견지호가 꼬였다.
“선배, 진짜 선수예요. 아침 잘 안 먹는데 이렇게 꼬시다니.”
“아니, 널 낚으려고 끓인 게 아니야.”
그래도 한 그릇 퍼 주려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끌어안아 왔다. 목이나 팔에 피부가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가이딩이 이어지는 걸 내버려 두자 더욱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윽, 답답하게 왜 이래?”
“저, 섭섭해요.”
“뭐가?”
“선배 첫 키스는 제가 가지고 싶었는데.”
손에 든 국자로 뻔뻔한 면상을 후려치고 싶게 만드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