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재윤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땐 언제고 각성하고 나서 지금까지 이상하리만치 거리를 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안전에는 필사적이었다.
“네 말대로 가이딩 제어도 성공했고, 지금 가이딩 하려는 거 아니니까 얌전히 이마 대라.”
재하의 단호함에 재윤은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더 물러설 곳도 없어 얌전히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피했기에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재윤의 기색을 읽은 재하는 대체 동생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형제 사이의 쑥스러움이라기엔 집 안에서 장갑조차 벗지 않고 긴팔을 입을 만큼 접촉을 피하는 것도 수상했다. 평소처럼 지내고 싶어서 자세한 걸 묻지 않은 탓에 막연하게 짐작만 해 왔다.
오늘따라 안색이 나쁜 동생이 걱정돼서 열이 나 재 보려는 거였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서재윤.”
풀 네임을 부르자 마지못해 자신과 눈을 맞춘 재윤은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지켜보던 에스퍼들을 힐끗댔다.
“눈 돌리지 말고.”
“형, 일단 밥 먹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
말을 돌리는 재윤의 태도를 도움 요청으로 받아들인 지호가 냉큼 재하의 주변을 맴돌며 장난스럽게 굴었다.
“선배, 저도 벽에 밀쳐 주시면 안 돼요? 전 얼마든지 만지셔도 되는데.”
분위기를 풀려 돕는 지호의 행동에 재하는 망설였다. 재윤의 반응을 보아 조금만 더 강하게 나가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동생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제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해일 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치하는 형제 사이로 해일이 다가왔다. 해일은 재윤의 팔을 들어 손목에 찬 통신기를 툭툭 건드리더니 떠오른 숫자를 재하 쪽에 보여 주었다. 통신기 밑으로 보인 재윤의 팔에 감긴 붕대가 신경 쓰였지만, 떠오른 숫자에 집중하자 해일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통신기는 시중에 나온 워치와 비슷한 기능이 많습니다. 체온을 재는 기능도 탑재되어 있습니다.”
해일은 통신기 홍보 광고라도 찍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이내 재하의 굳어있던 입술이 씰룩였다.
“푸하! 그게 뭐예요.”
“와, 목소리 무슨 일? 광고 찍는 줄 알았네요.”
“권해일 에스퍼는 정말 배우 하셔도 되겠어요.”
형제 싸움을 막기 위해 나선 해일의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지호와 도준도 한마디씩 거들며 금세 분위기가 풀어졌다. 재하도 굳이 멀쩡한 재윤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에 다시 산더미처럼 부푼 떡볶이를 향해 포크를 들었다.
삑― 삑―.
해일과 도준의 통신기에서 알람이 울렸다. 부드럽게 풀렸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이거 긴급 알람…….”
삑― 삑―.
재윤의 통신기에서도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호는 코디에 맞지 않아 주머니에 넣어 둔 통신기를 꺼내 손목에 채웠다. 아니나 다를까, 지호의 통신기마저 알람이 울려 댔다.
“무슨 일이길래 전원 호출이지?”
재하의 안전에 민감한 재윤은 네 사람이 동시에 차출되는 일만큼은 피해 왔었다. 가장 쓸모 있는 에스퍼인 해일과 도준의 협력이 이를 가능케 했다.
재윤은 그가 가진 미래 지식을 해일을 통해 협회장에게도 몇몇 공유했다. 그로 인해 이득을 취한 협회장이 현 상황을 묵인한 것이기도 했다.
“연속 게이트?”
알람에 이어 메시지까지 날아들었다.
“동시다발로 게이트가 열렸다는데.”
“어디에 게이트가…… 윽, 여기 그냥 도심 한복판이잖아요.”
위치와 게이트 개수가 실시간으로 날아드는 상황에 해일은 재윤을 바라봤다. 재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래에 없었던 일임을 알렸다.
거기에 도준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여기, 2세대 각성자 실습하는 곳인데. 게이트 들어갈 일 생기면 합류하기로 했거든.”
현장에 있을 2세대 각성자들이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수와 대치 중일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움직여야 했다.
“일단 움직이겠습니다.”
“서두르죠.”
“선배, 일 끝나고 오면 같이 먹어요.”
“다녀올게, 재하야.”
연이어 날아온 정보에 모두가 바삐 움직였다. 얼결에 인사를 받은 재하는 문 앞에 서서 자신을 빤히 보는 재윤과 눈이 마주쳤다.
“왜?”
“형도 가야지.”
이번 건은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기에 더더욱 직접 대처할 수 있는 곳에 함께하는 편이 나았다.
“어? 나도 가도 돼?”
“형 혼자 숙소에 두느니 다 함께 게이트로 가는 게 나아.”
“어, 알았어. 그럼 1분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재하는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재윤이 주었던 아이템을 챙겼다. 민망해서 끼지 않던 반지까지 싹 모아 몸에 지닌 재하는 30초도 되지 않아 밖으로 뛰어나왔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집 지키는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재하는 조금 들뜨고 말았다.
* * *
2세대 각성자들로 구성된 팀 중 가장 성적이 우수한 A팀에게 실습 기회가 주어졌다.
아직 열리기 전인 게이트의 상태를 확인하고 기록하는 단순한 임무였으나, 혹시라도 활성화될 경우를 대비해 여러 인원이 함께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네요.”
“협회 수송차가 그럴싸하긴 하지.”
위압적인 크기의 수송차가 연달아 지나가니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새까만 수송차에 에스퍼를 상징하는 문양이 흰색과 금색으로 큼지막하게 박혀 있어 고급스러운 게 시선을 끌어왔다. 전면이 열리며 같은 로고가 박힌 푸른색 제복을 입은 각성자들이 나타나자 젊은 구경꾼들은 인증 샷을 찍어야겠다는 욕구가 일었다.
질서 정연하게 걸어가는 에스퍼들은 들뜬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러려고 제복을 새걸로 입으라 했나 봐요.”
“요즘 핸드폰 성능 장난 아니다. 조용히.”
합의된 촬영 팀 외에 따라오는 카메라나 전문 인력 같은 이들도 여럿 보였다. 2세대 각성자에 대해 홍보하고 싶어 하는 협회장이 이른 결정을 내린 탓이었다.
게이트 예정지에 도착하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름 신경 써서 걷던 이들의 자세가 풀어지며 다물고 있던 입 역시 풀어졌다.
“유마로 에스퍼 덕에 저희가 제일 먼저 실습도 해 보네요.”
“어차피 언젠간 할 거였는데요.”
선두에서 걷던 유마로의 불퉁한 답에 계속 근처를 맴돌던 험악한 인상의 에스퍼가 몸을 낮추며 말을 걸었다.
“에이, 그렇지 않아요. 전 1세대 각성자인데도 실습은 처음 나왔는걸요.”
“1세대요?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1세대가 왜 2세대 각성자 무리에 섞였냐는 유마로의 시선에 D급 에스퍼인 방춘재가 실실 쪼개며 고개를 숙였다.
“1세대 때 B급 이하는 정식 교육도 없이 이런저런 테스트나 받았거든요. 2세대 훈련에나마 합류해서 이제야 에스퍼 구실 좀 하려는데…… 유마로 에스퍼는 어린데도 A급이고, 실력도 출중해서 정말 부럽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그쪽은 등급이?”
“부끄럽지만 D급입니다. 추적 능력자이고…….”
“우리 집 개 새끼랑 비슷하네요.”
앞만 보는 유마로의 명백한 비웃음에 살갑게 굴던 방춘재가 표정을 굳혔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유마로에게 티 낼 수 없었던 방춘재는 같이 들어온 다른 1차 각성자에게 말을 걸었다.
“야, 덩치. 너, 저번에 가이딩 받았다며? 좋았냐?”
“가, 갑자기 그런 이야길 왜 해요. 비밀 엄수 조항도 있는데.”
“에이, 시팔. 여기 있는 에스퍼들 실습 끝나면 가이딩 받는다는 거 다 아는데 비밀 엄수는 니미.”
“시민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조폭 출신 방춘재는 강약약강에 말투도 좋지 않았다. 같은 등급이라 자주 마주치는 D급 고민재의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특히 지난번 가이딩 테스트에 참여한 이후 방춘재는 가이드에 대한 정보 좀 모으자며 고민재를 꼬셔 댔다.
“뭘 그렇게 감추려 들어? 왜, 가이딩 받다 섰냐?”
“방춘재 에스퍼!”
“형님이라고 부르래도. 너 정도 덩치면 우리 쪽에서도 쓸 만하니 거둬 줄 수 있다니까.”
운동선수 출신인 고민재는 덩치가 있는데도 순한 성정이기에 방춘재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관심 없다니까요.”
“에이, 재미없게.”
방춘재는 그가 가진 이능으로 협회에서 이렇다 할 일거리를 맡지 못했다. 등록하면 월급이 나오기는 하나 본인 성질에 맞지 않았다. 조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던 차에 가이딩 테스트에 새치기로 참여했다가 신세계를 맛봤다.
가이드와 손이 겹치는 순간, 초조하고 짜증스럽던 감정이 빠르게 무뎌지며 모든 감각이 맞닿은 곳으로 향했다. 양손으로 붙잡아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발라 먹고 싶은데도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힘을 주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착취하는 삶을 살아온 방춘재에게는 그런 모순적인 감각 자체가 생소했다.
고작 10분. 심장이 전신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은 물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은 것 같기도 했다. 예민한 후각이 달큰한 냄새를 맡았다.
시간이 끝났다며 손을 놓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첫사랑을 대하듯 황홀했던 감각보다 육욕에 눈을 뜬 것처럼 저급한 감정이 몰아쳤다.
실제로 미친 듯이 흥분하기까지 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홀한 감각을 어떻게든 다시 맛보고 싶었다. 가능하면 손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하반신이 묵직해질 것 같아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덩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솔직히 말해 봐. 너도 기대되지? 2세대 각성 팀에 꼽사리 낀 게 다 그거 때문 아니냐고.”
유마로가 있는 A팀의 경쟁은 상당했다. 1세대 각성자임을 내세워서까지 굳이 끼어든 이유는 실습에 가이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 좋긴 했죠.”
“거봐, 새꺄. 사내새끼가 내숭이나 떨면 되겠냐.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가이딩 하게 되면 손이라도 특징을 잘 봐 뒀다가…… 응?”
비열한 계획을 속삭거리려던 방춘재의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쳐 갔다.
실습을 나가지 않았어도 연구소를 통해 이능에 맞는 여러 테스트를 해 왔다. 각종 마수 샘플의 냄새는 포르말린 냄새와 뒤섞였거나 썩기 시작해 악취가 나는 등 불쾌했다. 한데 그때 맡았던 냄새보다 짙고 선명했다.
대충 테스트에 임했기에 정확한 명칭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이미지로 기억나는 게 있었다.
“말미잘 같은 거였는데.”
혹시 게이트가 열려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라 해도 걱정되지 않았다.
말미잘이 튀어나와 봤자 아닌가. A급 유마로가 염동력으로 날려 버릴 테니.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기회였다.
방춘재는 거만하게 앞서 걷는 유마로에게 이 정보를 건넬까 말까 히죽이는 얼굴로 즐겁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