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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과 불안으로 거부하기는커녕 잔뜩 굳은 재하의 반응에 지호는 여유롭기만 했다.
“선배, 가이딩 멈추셔야죠.”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지호가 말할 때마다 숨결이 느껴져 재하는 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재하의 입술 위에 얹어진 지호의 손가락은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른다면 손가락 틈 사이로 입술이 맞붙게 될 상황이었다.
“키스도 아니고 뽀뽀하게 되는 거 가지고 밀당하긴 처음이네요.”
‘이걸 밀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새끼는 밀당의 천재다.’
지금까지 감도 안 잡히던 가이딩 제어를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하지만 정말로 입술이 스치기라도 하면 죽일 거다. 그런 각오로 줄줄 새어 나가는 가이딩을 멈추려 눈이 벌게지도록 힘을 주었으나 소용없었다.
“힘내세요, 선배. 좀 더 해도 된다면 저야 감사하지만요.”
숨조차 닿기 싫어 입술을 꽉 여문 채 끙끙대는 재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까지 했다.
지호는 재하의 입술에 닿은 손가락을 통해 빠르게 넘어오는 기운을 느끼며 이 감각을 폭주 상태일 때 알았다면 절대 놔주지 못했겠구나 싶었다.
“선배랑 닿으면 참기가 힘들어요. 더 많이 만지고 싶고 닿고 싶은데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죠?”
닿고 싶은 만큼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애정을 쌓아 가고 싶은데 상황이 등을 떠밀었다. 재하가 자신에게 애정이 있다면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질색하는 게 느껴져 아쉬웠다.
똑똑.
다행히 지호의 인내심이 다하기 전, 약속된 시간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지호는 웃는 얼굴로 깔끔하게 물러섰다.
“선배, 좋아해요. 선배는 아직 절 좋아하지 않겠지만.”
가벼운 고백과 함께 재하를 일으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재하는 지호가 문을 열기 위해 멀어지자 펄쩍 뛰며 소파에서 벗어났다.
“너, 너, 개호 새끼.”
“다른 때는 애칭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욕으로 들려요, 선배.”
“욕이다, 새끼야!”
분노로 새빨개진 얼굴이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여 지호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선배가 진짜로 싫어하는 건 안 했으니 화 푸세요.”
“안 하긴 뭘 안 해! 거의 다 해 놓고…… 어?”
바락바락 화를 내던 재하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지호가 문을 열자 당황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제복 차림의 해일은 재하를 보고 옅게 웃었다. 평소보다 어색한 웃음에 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 풀 충전 했으니 가서 일 좀 하고 올게요. 오후에 도준 선배가 온다니까 혹시 그 전에 자리 비우셔야 하면 저한테 연락해 주시고요. 어디서든 날아올 테니까요.”
“네.”
해일의 짧은 답은 딱딱하기까지 했다. 재하에게 보인 곤란한 웃음과 달리 차갑기만 한 반응에 지호는 그 역시 경쟁자임을 상기했다.
서재하를 공유하는 상황이라 앞으로도 자주 마주치겠지만, 굳이 불편하게 굴겠다면 이쪽에서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척질 필요도 없었기에 지호는 특유의 넉살로 넘겼다.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적당히 힘내세요, 파이팅.”
웃는 얼굴로 떠나려는 지호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던 해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견지호 에스퍼, 이번 일에 대해 따로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로요? 아니면 사적으로?”
“강압적인 행위가 있었는지 확인한 후 대응하겠습니다.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라 할지라도 가이딩에 있어 적합한 절차는 지켜져야 합니다.”
딱딱한 해일의 태도에 잠시 생각하던 지호는 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배 두고 가는 게 걱정됐는데, 그쪽이 성실한 타입이라 다행이네요.”
지호는 저를 향한 경고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야 경찰 오빠를 둔 여친보다 양호한 편이었다. 경찰이 아니라 깡패 형님을 마주한 줄 알았더랬다.
여유롭게 멀어지는 지호를 잠시 지켜보던 해일은 고개를 돌려 방 안에 있는 재하를 눈에 담았다. 문 앞에 서 있는 해일과 눈이 마주친 재하가 정신을 차리고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길마 형, 저희 집으로 가죠.”
“숙소 말입니까?”
“네, 여기선 닭살 돋아서 더는 못 있겠어요.”
동생은 다른 사람의 출입은 질색했지만, 해일에 한해서는 유한 태도를 보였다. 그에 대한 신뢰가 어찌나 좋은지 다행이다 싶었다. 도준이 오면 다시 지호의 방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러느니 차라리 가이딩실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재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가이딩실이 당분간 폐쇄된다고 해서 난민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다.
원래 숙소로 들어가 물부터 한 컵 들이켠 재하는 정신이 좀 들었다. 멀뚱히 서 있는 해일을 보고 나서야 새로 물을 따라 내밀었다.
“주스 같은 건 없어서요. 정수기 물이라 시원하더라고요.”
“고맙습니다, 재하.”
해일은 물컵을 받으며 다른 손으로 재하의 턱과 입술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 냈다. 피부가 접촉하자 미약한 통증과 함께 빠르게 가이딩이 시작됐다.
이에 재하의 턱을 쥔 채 멈춘 해일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도 연습이 되지 않은 겁니까?”
“하하, 넵.”
이게 지호의 손이었다면 양손이 잡히지 않아 냉큼 쳐 냈겠지만, 해일의 진중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진찰이나 검사를 받는 분위기였다. 어색해진 재하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자 해일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재하는 곧바로 소파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가이딩 바로 시작해요.”
“견지호 에스퍼와 가이딩 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쉬었다 하셔도 됩니다.”
“아뇨, 길마 형 상태가 안 좋으니 빨리해요.”
지호의 방에 있던 소파보다는 작지만, 그래서 둘이 앉으니 더 가깝게 앉게 되었다.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깝게 앉아 손을 잡자 익숙한 가이딩 감각이 빠르게 이어졌다.
“일이 많으셨나 봐요. 그사이 이렇게나 쌓이신 걸 보면.”
“재하, 가이딩을 멈춰 보세요.”
“네?”
손을 떼려 하자 해일 쪽에서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꼭 쥐어 왔다.
“길마 형?”
“가이딩 제어를 연습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손을 잡은 채로 멈춰 보세요.”
“그렇긴 한데, 가이딩 급하시잖아요.”
“재하의 연습 덕에 감사하게도 잘 되고 있습니다. 멈추면 다시 시작하면 되니 함께 노력해 봅시다.”
“아, 네. 해 볼게요.”
막연하기만 한 연습이었지만, 일단 가이딩이라도 해야 하니 손을 잡은 채 집중했다. 집중한다 한들, 손끝과 손바닥을 통해 빠져나가는 기운만 느껴질 뿐 멈출 수는 없었다. 하루 만에 될 리도 없고, 마음이나 편히 먹으려 하는데 해일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차분히 의견을 냈다.
“생각해 봤는데 막연해서 어려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에스퍼가 이능을 쓸 때는 마나를 밖으로 방출하는 식이 대부분이라 딱히 알려 주지 않아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가이딩 역시 그렇게 접근하면 어떤가요? 먼저 손끝부터 하나씩 파동을 끊어 낸다는 감각으로.”
해일의 진지한 모습에 재하는 새삼 감동했다.
자신의 뜻에 따른다며 모든 걸 맡긴 도준이나 제멋대로 진도를 나가려는 지호와는 태도부터가 달랐다. 물론 재윤이 이론적으로 설명해 주기는 했지만, 그는 정작 손조차 잡아 주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연습을 할 수 있는 환경이구나 싶어 재하는 집중했다.
“집중하면 흐름이 느껴집니다. 시작은 급류처럼 빠르지만, 익숙해지면 조금 느려졌다가 다시 빠르게 좋아집니다.”
차분하고 깊은 울림이 재하의 기분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괜찮습니다. 닿아 있더라도 끊어 낸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론일 뿐이지만, 진리를 전하듯 신뢰감 넘치는 목소리에 재하는 눈까지 감고 집중했다. 해일은 무방비한 재하의 모습에 애써 피했던 입술로 시선이 옮겨 갔다.
견지호의 방 앞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에 노크하는 게 아니라 문을 부술 것 같아 인내해야 했다. 이미 경험한 적 있는 재하의 가이딩 파동이 문밖에 있음에도 유혹적이라 참기 힘들 지경이었다. 해일은 자신에게 이런 독점욕이나 거친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재하 쪽에서 제어할 수 있게 되어 이런 감각을 다른 이들은 모르길 바랐다. 음습해지려는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애쓰는 사이, 맞닿은 손끝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마나의 흐름이 사라졌다.
“어? 이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진짜요? 이렇게 쉽게?”
당황하면서도 한번 익힌 감각은 빠르게 배운 재하가 잡고 있던 양손에서 하나씩 가이딩을 끊어 냈다. 무척 더디고 어설펐지만, 강제로 끌어당기던 감각이 툭 끊어지며 사라지는 건 분명한 성공이었다.
“된 거 같아요.”
“훌륭합니다, 재하.”
진심으로 기뻐하며 칭찬해 주는 해일의 온화한 미소에 재하 역시 크게 웃었다.
“고마워요, 해일 형!”
길마 형이라 부르던 호칭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난번 가이딩 이후로 호칭을 혼용해서 부르긴 했지만, 감정이 격해질 만큼 성공이 기쁜 까닭이었다.
귀한 에스퍼들이 돌아가며 경비를 서는 상황이 민망하고 아까웠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연습하면 가이드임을 감춘 채 돌아다닐 수도 있게 될 터. 신이 난 재하가 해일을 끌어안았다.
“이것도 해 볼게요.”
자연스레 재하의 목에 뺨이 닿은 해일은 거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쉽지 않았기에 실컷 가이딩이 되는 이득마저 취할 수 있었다.
“포옹 상태에서는 아직 힘드네요. 그래도 연습하다 보면 되겠죠?”
“네, 재하.”
“역시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해야 제어도 가능한 거였어요. 자식들이, 장난만 치고 그러니까 안 되던 거였지. 해일 형이랑 하니까 금방 되잖아요.”
“재하가 기뻐하니 저도 기쁩니다.”
“이번엔 팔을 잡고 해 볼게요.”
한번 맛본 성공은 재하를 신나게 했다. 기뻐하는 재하의 모습이 보기 좋아 해일은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이고 팔이고 다 내주며 시간을 보냈다.
* * *
그 뒤로 꽤 자주 연습을 이어 갔지만, 재윤이 원하는 수준의 가이딩 제어까지는 무리였다.
접촉 시 끊어 내는 것도 지호가 작정하고 매달리자 강제로 이어져 버렸다. 그래도 재하는 노력을 이어 갔다. 어차피 가이딩 할 에스퍼는 많았고, 연습할 상황은 넘쳐 났다. 바깥에서 에스퍼들과 일반인들의 삶이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에도 숙소 안에 머무는 재하의 시간은 평온했다.
동생과 식사하고 친하거나 친해진 이들과 가이딩 연습을 하는 건 이제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평온함에 물들어 갈 때쯤, 동시다발로 게이트가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번에 일상을 무너트릴 만큼 큰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