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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믿지 못한 이는 재하였다.
“만우절이라도 안 믿을 거짓말을 뭐 하러 하는지 모르겠네.”
“에이, 선배가 안 믿으시면 안 되죠. 선배 때문에 다 정리한 건데.”
“자꾸 개소리할래? 너 어제도 여친 만나러 간다고 했다며.”
“그럼 헤어지자는 말을 톡으로 하나요. 매너 없게.”
공간 이동 능력 덕에 잠수 타려는 여친까지 전부 얼굴 보고 헤어지고 왔다는 지호의 태연한 고백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묻고 싶지 않았지만, 대학 생활 내내 여친을 수두룩하게 달고 다니던 견지호였기에 너무도 궁금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데?”
“그야, 재하 선배가 그만큼 제게 특별하다는 거죠.”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지호가 팔을 풀고 재하의 앞으로 옮겨 와 양손을 붙잡았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가이딩에 재하가 털어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지호의 고백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 볼 땐 어떨지 몰라도 전 진심으로 여친들 전부를 좋아했어요.”
“어, 그래. 남자답네. 그러니 손 좀…….”
“부드럽고 다정하고 가끔 튕기기도 해서 항상 즐거웠거든요. 그런데 선배랑 닿고 나서 그간 느낀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건 가이딩이었다. 지호 역시 모를 리 없음에도 재하의 손을 끌어 올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고백했다.
“평생 이렇게 강렬한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그동안 제가 알았던 좋아한다는 감정은 애들 장난이었더라고요.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계속 함께하고 싶어요. 선배, 좋아…….”
“그거, 나도 느꼈어.”
상황을 지켜보던 도준이 즉각 나섰다. 재하의 손등에 제 손을 얹어 지호가 닿는 걸 방해했다.
여친을 전부 버리고 왔다는 지호의 말에 부채감을 느낀 재하가 차마 밀어내지 못하는 걸 도준이 태연하게 막아 주었다.
“와, 땡큐.”
부채감을 이용할 줄 알다니. 역시 눈치 빠르고 영악한 견지호였다.
도준의 적절한 개입에 감사하려는데 이쪽 역시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새삼 속내를 털어놓았다.
“재하 너도 알다시피 난 첫사랑을 아직 못 해 봤어.”
지호와는 다른 방향으로 충격 고백을 하는 도준이었다. 물론 재하는 오랜 친구였기에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도 되는지 걱정이었다.
“어, 알지. 아는데 그런 극비 사항을 개호 앞에서 털어놔도 되겠냐?”
이상해지려는 분위기에 재하가 필사적으로 말을 막아 보려 했으나 도준은 주저 없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 감정이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다른 사람과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방해하고 싶어져.”
아직 가이딩 부족 현상을 겪지 않은 도준의 고백은 미지근했다. 그렇다고 해도 첫사랑조차 해 보지 않은 이의 담담한 고백은 파급 효과가 상당했다.
친구의 고백 같지 않은 고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재하의 손은 두 사람에게 겹겹이 잡혀 빠지지를 않았다.
“니들 가이딩이 뭔지 안 배웠냐? 갑자기 왜 이러냐고.”
당황하는 재하를 대신해 재윤이 세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동생이 믿음직해 보여 재하가 의지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견지호 에스퍼, 핸드폰 좀 볼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재윤의 제안에도 지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와, 선배 동생분이 더 철저하네요. 선배도 저한테 확인하고 집착해 주세요.”
“아오, 떨어져! 진짜 좀!”
재윤의 엉뚱한 개입에 정신을 차린 재하가 붙잡힌 손을 마구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두 손으로 재하를 붙잡고 있던 지호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한 발 물러섰다. 언제나 마지막 선을 눈치채는 게 빠른 지호다운 반응이었다. 도준 역시 손을 떼고 한 발 물러섰다.
찝찝한 것처럼 양손을 옷에 문지르는 재하의 짜증에도 지호는 태연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보고 싶으면 봐요.”
여전히 내밀고 있는 재윤의 손에 잠금까지 풀어 올려 주었다. 재윤이 폰을 확인하려 하자 놀란 재하가 손을 뻗어 낚아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재하의 다급한 행동에 재윤은 순순히 뺏겨 주었다. 폰을 빼앗은 재하는 곧장 지호에게 돌려주었다.
“챙겨.”
“와, 선배. 제 사생활 지켜 주신 거예요?”
“아니, 네 여자관계 따위 전혀 관심 없다는 뜻인데.”
“에이, 관심 가져 주세요, 선배.”
살살 웃으며 다시 달라붙으려는 지호의 접근을 무시한 재하는 재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너, 과해.”
지호는 애초에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재하의 오해와 달리 재윤에게 있어 지호는 앞뒤가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가 연인들에게 어떠했는지 기억하기에 정말로 재하가 유일한 상대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으나 변명하는 대신 수긍했다.
“응, 미안.”
담백한 대화에 지호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눈을 데굴데굴 굴렸고, 도준은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가 수상하다. 형제가 보기 좋다. 두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담은 채 지켜보는 사이, 재윤이 장갑 낀 손을 들어 보였다.
“이렇게 모인 김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재윤의 태도는 평범했지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제 형이 납치당할 뻔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 했던 만큼 반대로 진중한 이야기에 빠르게 집중했다. 어쩌면 재윤이 형의 안전을 위해 에스퍼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형에 대한 거니까 협조해 주셨으면 해요.”
진지한 동생의 제안에 괜스레 긴장하는 도준과 지호, 그리고 재하였다.
* * *
빌런 조직이 둥지를 튼 무인도는 여러 에스퍼의 협력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인식 저하, 환시, 포털 능력자의 조합은 섬 하나를 통째로 기지화했음에도 외부에선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포털 능력자로 인해 섬에서 외부로의 이동이 용이했고, 그 외에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능력이었다. 다만, 포털 능력에는 제한이 있다 보니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새로운 장소에 포털을 여는 건 신중해야 했다.
그렇기에 포털 능력자를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소식은 조직의 수장인 백마혁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제 막 조직에 들어온 애송이가 귀한 포털을 멋대로 써먹다니.”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인 백마혁은 풍성한 백발을 사자 갈기처럼 흩날리며 조금 전 돌아온 신입 이영우를 찾았다.
각성하자마자 사고를 치고도 태연한 성향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에스퍼관에 맞는 듯하여 영입하였더니 계속해서 사람 하나를 찾아 댔다. 그러더니 기어코 마음에 둔 놈 하나 찾겠다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무데뽀인 건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지만.’
백마혁은 이곳에 들이는 에스퍼 하나하나를 제 손으로 확인하고 골랐다. 개중에는 마음은 약해도 에스퍼가 세상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에 동조하는 이도 있었다. 포털 능력자가 그러했는데, 영악한 이영우가 마음 약한 이를 멋대로 휘두른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백마혁이 포털 구역에 들어서자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위, 위험했잖아요.”
“위험하지 않았어. 얼굴만 보고 왔잖니.”
“포, 폭, 폭탄. 던졌다고.”
“협회 건물은 마나 제어 중이었잖아. 마나 덩어리인 폭탄이 터질 리 없고.”
“여, 영우 오빠, 능력, 썼……잖아요. 위험, 안 하면 안 쓴다고 야, 약속했으면……서.”
“응, 그렇구나. 미안.”
포털 능력자인 우양희가 이영우를 혼내는 중이었다.
백마혁이 우양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벙어리인가 의심했을 만큼 말을 안 했다. 어머니처럼 여기는 에스퍼 외에는 대화도 잘하지 않는 우양희가 어쩐 일인지 이영우에게는 더듬거릴지언정 제 할 말을 쏟아 냈다.
결국, 웃는 얼굴을 한 이영우에게 넘어간 우양희가 한발 물러서 줬다.
“다, 다음엔 꼭 보, 보스에게 허락받아요.”
“양희야, 아저씨 보스 아니다.”
“보, 보스!”
“양희는 특별히 혁이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우양희는 갑자기 나타난 백마혁을 보고 놀라 고개부터 숙였다. 아무리 백마혁이 호의를 보여도 겉모습이 워낙 진해서 그런지 우양희는 그를 대할 때 항상 어려워했다. 실제로는 조직에 들어와 제 이익만 챙기고 내빼려던 빌런보다 못한 거지새끼들을 처리하는 걸 목격한 탓이지만, 백마혁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자신의 외모 탓이려니 여겼다.
우물쭈물하던 우양희는 백마혁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도망치듯 멀어졌다.
“거, 대화 좀 할까?”
“네, 말씀하세요.”
백마혁과 단둘이 된 이영우는 긴장한 기색조차 없이 웃고 있었다.
보기엔 유약한 안경쟁이 같은데 조직 내 젊은이들 사이에선 반응이 괜찮았다. 그러더니 낯가림 심한 우양희마저 마음을 열게 했다. 백마혁 눈에는 속이 시커먼 놈이라 조직에 쓸모가 있을 뿐이건만.
혹시라도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쓸모야 말할 것도 없이 무궁무진했다.
“능력은 투시, 투과로 인한 폭탄 제조라고 들었는데. 다른 이능도 있나?”
듀얼 능력자가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보고되지 않았을 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이영우의 반응에 백마혁 쪽에서 손을 들어 내저었다.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얼굴이라 먹히나 보군. 그건 됐고, 제멋대로 포털을 협회 쪽에 설치하다니. 그걸 타고 협회 에스퍼가 넘어왔으면 어쩔 뻔했나. 우양희까지 위험에 빠트렸어.”
“협회 쪽 협력자가 틀림없다고 추천해 준 위치라 자신 있었어요.”
협회 쪽에 줄을 대 놓기는 했다. 스파이로 삼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과 이영우가 벌써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사전 답사 갔더니, 제 팬이 있더라고요.”
이영우를 보자마자 얼굴색이 바뀌며 달려오던 덩치 큰 가드를 떠올렸다. 영우가 어떤 줄이 있든 간에 조직을 위험하게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 영우 군.”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제 말에 설득될 줄 알았는데, 다른 소중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백마혁은 돌발 행동에 대해 주의시키려는데 이영우는 자신의 판단이 안이했음을 후회했다.
대화가 되는 듯하면서도 되지 않는 상황에 백마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영우는 상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에스퍼들을 밖으로 끌어낼 건데요. 그때 한 번 더 포털 좀 쓸게요.”
“에스퍼를 끌어내서 어쩌려고? 전면전을 하기엔 아직 일러.”
아직은 힘을 비축하고 전력이 될 인물을 계속해서 포섭해야 할 때였기에 신중해야 했다.
“우리가 에스퍼를 상대할 게 아니에요.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수들을 상대하게 해야죠. 준비는 좀 해야겠지만.”
“……무슨 방법을 쓰려고?”
솔깃한 이야기에 백마혁이 귀를 기울이자 이영우의 웃음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