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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로의 날 선 목소리에 이를 예상 못 했던 재윤은 당황했다.
A급 염동력 능력자인 유마로는 허세와 인정 욕구가 높은 에스퍼였다.
사람들이 말을 걸 때 그는 대부분 무시하며 지나쳤지만, 추켜세워 주면 잠깐 멈춰서 대꾸해 주거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거만하면서도 칭찬엔 약한 타입이라 쉽게 친해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유마로는 좀 거만하지만, 의외로 다루기 쉬운 상대야.’
유마로가 나타나면 그를 칭찬하며 첫인상을 좋게 만들어 두려 했다. 그런데 왜 지금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비꼬듯 던져진 ‘B급이라 이런 일이 어울리네요.’라는 말의 뉘앙스를 보면 등급 차이로 인한 얕잡아 봄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적개심이 섞였다. 오히려 경쟁자를 보듯 열렬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대치하고 있을 수만도 없어 웃는 얼굴로 계획을 실행했다.
“안녕하십니까, 유마로 에스퍼. A급 에스퍼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은 걸 보아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능력을 갖추신 분이시군요.”
이능에 대한 칭찬은 보지 못했기에 아는 척하기엔 일렀다. 드러난 등급에 대한 칭찬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의기양양해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돌아온 건 여전히 날 선 반응이었다.
“이제 보니 입 털어서 한자리 차지한 거였네. 쪽팔리지도 않아요?”
지나친 적의. 하지만 회귀 후 유마로와 만난 건 이 자리가 처음이었다.
‘혹시 이 새끼도 회귀한 건가?’
설령 유마로가 회귀자라고 해도 재윤은 그와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
재윤이 죽을 만큼 노력해 간신히 B급에 들어서고 나서야 가끔 접점이 생겼다. 매칭 덕에 B급임에도 A급 유마로와 같은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그는 여전히 거만했다. 하지만 힘 있는 자가 힘을 과시하는 건 당연했기에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유마로는 굳이 저보다 낮은 등급을 얕잡아 보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이거 봐. 협회 얼굴마담이 욕을 먹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잖아요.”
유마로의 말에 가드와 직원 모두 망설였다. 직원은 A급의 힘이 두려워서, 가드는 A급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 나서지 못했다.
재윤 쪽에서 대응한다면 개입이 있을 수 있으나 정작 당사자가 조용히 듣고 있으니 대기자들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정작 재윤은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은 채 ‘얼굴마담’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권해일을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역시 임팩트가 약했구나 싶었다. 한강 게이트의 타란툴라를 해일이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중 게이트만 아니었어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재윤의 침묵에 유마로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여겨 점점 더 흥분했다.
“다들 그쪽 편을 안 들어 주네요? 역시 숫자는 거짓말 안 한다니까.”
“마,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재윤에게 달라붙어 계속 질문을 쏟아 내던 대기자 한 명이 소심하게 편을 들었다가 전광판을 힐끗 보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재윤이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유마로에게 다가갔다.
“저 때문에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안쪽에 따로 대화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억울하면 능력 좀 보여 봐요.”
유마로는 곧바로 힘을 끌어 올렸다. 마나 억제기 탓에 소용없었지만, A급의 마나 양은 무리하게 끌어 올린다면 어느 정도 영향이 드러날 수 있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요? 그쪽, 밖에선 힘 썼다면서요. 여기서 안 되면 밖으로 나가요.”
유마로가 먼저 입구 쪽으로 향하자 사람들이 비켜섰다. 자신의 행동에 사람들이 곧바로 반응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잔뜩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슬쩍 펴졌다. 그러나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입구에 멈춰서 돌아섰다.
“못 하겠어요? 고작 차 한 대 날렸다고 힘을 다 써 버린 거?”
“유마로 에스퍼, 부디 들어와 주세요.”
자칫하면 바깥에 대기 중인 기자들에게 보일 수 있는 자리였기에 재윤은 그의 이미지를 생각해 안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유마로는 B급 따위가 자신을 통제하려는 것에 속이 뒤틀렸다.
“서재윤, 마나 등급 C라더니. 허접하잖아.”
약점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 대자 대기자들이 혼란스러워했다.
“B급 아니었어?”
“등급은 이능이랑 마나 등급 합쳐서 내는 거잖아. 그래도 마나 C등급은 너무 낮은데.”
“그보다 그런 걸 타인이 막 노출해도 되는 거야?”
에스퍼 등급 세부 내용을 타인이 밝혀 버린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다. 특히 에스퍼인 가드들의 충격받은 얼굴에 유마로는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정작 재윤은 태연하기만 했다.
“예, 맞습니다. 이능 사용 방식에 따른 등급 조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수작질인지 알 게 뭐냐고요. 증명해 봐요. 아니면, 나랑 한판 뜨든가.”
기억 속의 유마로는 굳이 타인과 비교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끈질겼다. 원하는 대로 한번 붙어 주고 칭찬해 주는 시간을 가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바깥은 다른 분들에게 위험하니 훈련실로 이동…….”
짝짝짝.
인위적인 박수 소리에 이목이 모였다. 여러 가드가 지키고 서 있던 중앙 문이 열리며 보란 듯이 걸어 나오는 중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여러 명의 가드와 직원을 이끌고 나타난 협회장, 권해성이었다.
“이야, 역시 A급 각성자는 화끈하네요.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청년입니다.”
항상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권해성이 직접 로비에 나온 상황이 재윤은 탐탁지 않았다.
‘저 양반이 왜 여기까지 내려와?’
모든 걸 세세하게 기억하는 게 아닌지라 귀찮은 상대가 등장해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런 재윤의 우려와 달리 협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중년 기업인의 여유로움을 내보였다.
“하하, 이거 참. 첫날부터 A급 각성자가 등장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더니.”
권해성은 서재윤을 힐끗 본 후 유마로를 향해 호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여기 서재윤 에스퍼랑 벌써 뜨거운 전우애를 불태우고 있고. 아주 보기 좋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포장하는 걸 보니 내부에 기자라도 숨어든 모양이었다.
이대로 적당히 마무리되면 유마로와 친분을 쌓는 일은 차후 기회를 보면 될 일이었다. 친해지면 능력 활용하기가 좋다는 거지, 필수는 아니었다.
“이건 또 웬 꼰대?”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승부욕 넘치는 유마로는 적당히 마무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재하와 도준이 이른 점심을 먹으러 온 직원 식당에선 재윤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야, 벌써 A급 나왔는데 성격 장난 아닌가 봐.”
“지금 로비에서 서재윤 에스퍼랑 시비 붙었대.”
“그러다 일 터지는 거 아냐? 제어기 출력 더 높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난 구경 가야지.”
“나도 같이 가.”
식사하다 말고 뛰어가는 직원들의 행동에 재하 역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마침 엘리베이터도 도착해 있어 급히 올라타니 따라온 도준이 등을 두드렸다.
“괜찮을 거야. 네 동생 어른스럽잖아.”
“어어, 그렇지. 하지만 A급이라는데. 재윤인…… 더 약하잖아.”
에스퍼에 대한 재하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재윤은 다르게 봐야 했다. 도준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네 동생이 약해? 웬만한 A급보다 재윤이가 나아.”
“그래? 그럼 괜찮을까?”
“응, 그리고 내가 같이 가잖아.”
다른 때라면 가자미눈을 하고 흘겨봤을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이능을 얻은 도준의 말은 재하의 긴장을 풀어 줬다. 재하와 달리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직원들은 S급 에스퍼의 친구를 향한 다정다감한 모습에 눈치만 볼 뿐이었다.
소식을 듣고 올라온 로비는 말 그대로 개판 오 분 전이었다.
“힘만 무식하게 세면 뭘 해. 쓰는 방법을 알아야지.”
“어마무시하게 세면 통한다고.”
“어이구, 무식한 새끼들. 이런 것들이랑 같은 각성자라니.”
“각성한 건 맞아요? 줄 선 거 보니까 미각성인 거 같은데.”
“밀지 마요!”
“됐고, 선착순으로 들여보내 주든가 빨리빨리 좀 해요!”
각자 제 할 말만 하는 가운데 재하는 빠르게 재윤을 찾아냈다. 백여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꽉 들어찬 로비였지만, 그중 유독 키가 큰 인물은 몇 안 되기도 했고, 동생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누가 내 동생한테 시비를 터냐.’
에스퍼 싸움에 끼어든다는 자각도 없이 재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도준 역시 뒤를 쫓는 듯했으나 S급 에스퍼를 내버려 둘 가드들이 아니었다.
“주도준 에스퍼, 여기는 복잡합니다.”
“누굴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모셔 오겠습니다.”
“괜찮아요. 저희가 가서…… 어? 재하야?”
갑자기 끼어든 가드로 인해 재하를 놓친 도준의 눈이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살폈다. 다행히 오랜 기간 봐 온 동글동글한 뒤통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비슷한 키를 가진 사람들 사이로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 짧은 시간 도준은 참을 수 없는 불안에 긴장이 몰아쳤다. 이내 재윤 쪽으로 향하리란 확신이 있어 시선을 주니 잠깐씩 드러난 모습에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진짜 사람 많네.’
도준의 걱정도 모른 채 재하는 꾸역꾸역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재윤의 근처에 유독 더 많아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자격도 안 되는 에스퍼한테 너무 높은 등급을 준 거 아니냐고요.”
“서재윤 에스퍼의 등급은 면밀히 살핀 후 내린 결정입니다.”
“그게 비리라는 거잖아요.”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동생 욕을 하고 있었다. 식당으로 이 상황이 전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공격받는 동생이 안쓰럽고, 제멋대로 떠드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일단 소리라도 냅다 내지르려 목에 힘을 주는데 뒤에서 손목을 붙잡아 왔다.
재하가 사고 칠까 봐 따라와 붙잡는구나 싶어 숨을 삼키며 억울한 얼굴로 돌아보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안녕. 잘 지냈니?”
“선……배?”
안경 아래 비친 눈이 기쁘다는 듯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드디어 잡았구나, 재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