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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입의 패기가 심상치 않다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의 후기는 한결같았다.
기분 좋았다거나 몸이 가벼워졌다는 당연한 내용부터 시작해 ‘여자랑 하는 것보다 손잡는 게 더 좋았다.’라거나 ‘섰다.’라며 저속한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가이딩을 해 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고 저보다 약한 상대를 향해 본심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그들 앞에서 그렇게나 압박을 줬건만, 설문지를 볼 사람이 연구원이라는 걸 알기에 함부로 써 댄 것이다.
“환멸이 난다, 진짜.”
대격변만 일찍 안 터졌어도 형을 어딘가에 감춰 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생각이 어설픈 탓이었다. 나중에는 너무 미래를 생각해 움직이다 형을 위험에 빠트렸다.
이젠 직접 지킬 것이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재하가 가이딩에 대해 봉사 의식 비슷한 걸 가지게 됐다는 거였다. 현재에는 자신 말고 대체재가 없는 에스퍼를 안타깝게 여기며 손을 내미는 형의 모습은 재윤을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하루에 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각성 테스트 신청서가 몰려들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협회장은 빠르게 각성 센터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곧 지원자들이 몰려들 테고 그중에서 가이드 한두 명쯤은 건질 수 있으리라. 그걸 위해 이능 감별기까지 입구에 설치해 두었다.
‘부담이 나눠지면 형도 더는 에스퍼들을 동정하지 않겠지.’
* * *
“형, 주도준한테 가 있어.”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던 재윤은 막 잠에서 깬 재하에게 곧바로 용건을 건넸다.
“엥? 어제 도준이 못 만나게 하더니 오늘은 걔한테 가라고?”
“어제는 형이 여기로 주도준을 부르려고 하니까 못 오게 한 거지. 오늘은 내가 없으니까 형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고.”
마주치기 싫은 거면 도준에게 오라고 해도 되는 거였다. 재윤의 말은 자신과 그의 공간에 도준이 들어오는 게 싫다는 의미였다. 여전히 도준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맡기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재윤의 태도에 머쓱해져 재하는 말을 돌렸다.
“아침도 안 먹고 어딜 가는데?”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인덕션 불을 켜려는 재하의 손에 물컵을 쥐여 준 재윤은 잘 다려진 제복을 목 끝까지 채웠다.
“오늘 일반인 신청자 대상으로 2차 각성 검사가 있거든. 홍보가 많이 돼서 굉장히 붐빌 거야.”
졸음으로 게슴츠레했던 재하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아직도 들고만 있는 컵을 마시라는 듯 살짝 밀어 주자 그제야 한 모금 마시던 재하는 이 행동이 자신이 언젠가 동생에게 했던 행동임을 기억해 냈다.
언제 이렇게 처지가 바뀌었나 싶어 민망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는 재하에게 재윤은 미안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혈기 왕성한 각성자를 제어하려면 에스퍼들이 각 잡고 서 있어 줘야 하고. 그래서 오늘은 좀 바쁘게 돌아다녀야 해.”
“그럼 나 혼자 여기 있어도 되잖아. 도준이도 바쁠 텐데.”
“형을 혼자 두느니 차라리 센터가 시장통이 되도록 두고 말지. 그리고 주도준한텐 미리 말해 뒀어.”
아무리 감시자가 많고 통제를 철저하게 해도 미꾸라지 같은 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혹여나 힘만 무식하게 센 각성자가 숙소로 들어와 형과 접촉하기라도 한다면. 뒷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안 그래도 반찬 좀 챙겨 주고 싶었는데 잘됐네.”
“형이 가지 말고 데리러 오라고 해.”
“방 안에는 들이지 말고?”
“……그래 주면 좋고.”
어른스럽게 굴다가도 속 좁은 면을 보이는 재윤의 모습에 재하는 빵 터졌다. 알겠다며 웃고는 재윤을 배웅해 주었다.
“점심때 올 거야?”
“아니. 밤에도 늦을 수 있어. 주도준이랑 있으면 찾아갈게.”
“종일 일하려니 우리 동생 고생이네. 잘 다녀와.”
하품을 참으며 재윤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재하가 졸린 얼굴로 웃었다. 재윤이 문 닫고 들어가라 하니 조금 더 자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재윤은 지금처럼 걱정 없어 보이는 형의 모습을 지켜 주고 싶었다. 약속과 달리 회귀나 가이딩 관련한 이야기를 방에 돌아와 굳이 먼저 꺼내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회귀 전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도준을 향한 분노가 쉽게 끓어올랐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지키는 데 있어 최선은 주도준이었다.
도준은 S급 에스퍼로, 마나 허용치가 최상이었다. 여차할 때 센터의 마나 억제기가 감당 못 할 수준으로 마나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비상시에 유용한 인재였다. 여전히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천오도 각성하면 도움이 될 텐데.”
충성심 강한 이천오는 가드로 완벽했지만, 일반인이라는 게 치명적이었다. 각성만 해도 체력이 배가 되니 오늘 각성 검사와 이어지는 각성 코스를 유용하게 쓸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거기에 검사 신청자 명단에 익숙한 이름까지 있어 더욱 긴장과 기대가 됐다.
“정말 긴 하루가 되겠어.”
평소 사람 하나 없던 복도에 직원들이 오갈 정도라 바쁜 하루를 예감했다.
바쁜 재윤과 달리 재하는 한두 시간 정도 더 숙면한 뒤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도림이 먹을 수 있는 덜 매운 고기 김치찌개를 끓이며 전날 해 둔 반찬들을 착착 챙기고 도준을 불렀다.
“재하야, 나 왔어.”
“땡큐 땡큐. 자, 이것 좀 받고. 이것도.”
도준이 도착하자마자 재하는 미리 입구에 가져다 둔 반찬들을 손에 들려 주었다.
“집이 아니라 밀폐 용기 같은 것도 없어서. 일단 그릇에 담았으니까 한 손에 하나씩 들고 가자.”
“아, 오랜만에 재하 요리 먹겠어. 도림이가 정말 좋아할 거야.”
집이 가까워 종종 그릇째로 요리를 가져가기도 했기에 도준은 익숙하게 묵직한 그릇을 옮겼다. 재하는 찌개 냄비를 양손으로 잡고 조심조심 걸었다.
그렇게 도준의 숙소에 도착하자 도림이 달려와 안겼다.
“오빠, 어디 갔었어!”
“으악! 도, 도림아, 잘 지냈어?”
고작 이틀 못 본 건데도 한동안 같이 지냈다 보니 도림이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달려드는 도림에게 찌개를 쏟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켜 낸 냄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도림을 토닥여 주려 손을 뻗던 재하는 바닥의 냄비를 향해 킁킁거리는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오빠, 이거 오빠가 만든 거야?”
“응. 도림이 주려고 덜 맵게 만들었지.”
“매워! 그래도 좋아!”
흥분한 도림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커졌다. 소파 테이블에 반찬과 찌개를 늘어놓자 도림은 파티라며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철없는 오빠 둘은 말릴 생각도 없이 웃는 얼굴로 지켜봤다.
“밥 먹자, 도림아.”
“응! 밥 먹기 전에 손!”
“세상에. 어린이집 다닌 지 며칠 됐다고 스스로 손을 씻으러 가네?”
“교육의 힘이지.”
손을 씻고 와서도 얌전히 앉아 포크로 하나씩 찍어 입으로 가져와 꼭꼭 씹는 모습에 센터의 급조된 어린이집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상승했다.
도준과 함께 어린이집에 도림을 데려다주고 돌아와 가이딩을 하고 나니 더 할 일이 없었다. 도준도 오랜만의 휴식에 소파에 걸터앉아 TV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의 자신과 재윤 같은 모습에 에스퍼의 휴일이라고 별거 없구나 싶기도 하고, S급 에스퍼를 이렇게 잉여롭게 둬도 되는지 미안할 지경이었다.
2부작 영화를 연속으로 보고 나니 출출해져 직원 식당으로 향하는 둘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머리는 소파에 하도 뭉개서 까치집이 돼 있었다. 둘의 모습은 마치 훌륭한 백수 같아 서로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재하가 평화롭다 못해 잉여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과 달리 재윤은 정신없이 바빴다.
초반만 해도 분위기는 무척 호의적이었다.
애초에 신청받은 인원을 시간별로 나눠 안내해 둔 터였다. 바깥에서부터 순번을 지켜 설 수 있게 안내가 이루어졌고, 오후 대기자는 안내를 따로 했음에도 지인이나 보호자와 함께 방문한 이들에 대해선 계산하지 못했다.
재윤도 이때의 일은 한참 전인 데다 갑자기 고등급 에스퍼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재하의 부재로 인해 정신이 없었던 때라 이런 상황이 생길 줄은 몰랐다. 게다가 각성 가능성이 있는 경우, 각성 시기에 주변에 있었다면 영향을 받아 조금의 물꼬만 트여도 각성 확률이 올라갔다.
각성 센터가 할 일이 그것이었기에, 각성한 것 같다며 찾아온 사람의 일행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예상보다 검사 시간이 한 시간에서 최대 세 시간까지 밀릴 수도 있습니다. 검사 시간이 종료되더라도 오늘 밤까지 계속 검사는 진행할 테니 오후 팀은 쉬다 오셔도 됩니다.”
직원의 설득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자리를 지켰다. 워낙 많은 숫자가 자리를 지키다 보니 자기 차례가 영영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무리 시간을 다시 공지했다 한들, 불만이 없을 리 없었다. 여기저기서 줄이 흐트러지고, 바닥에 주저앉거나 매점은 없냐며 음료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센터 앞 넓은 공터에는 유실수나 대형 장식품이 있었으나 모두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해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짜증은 늘어만 갔다.
화살받이가 필요해 보여 재윤이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2차 각성 검사를 돕기 위해 지원하러 온 서재윤 에스퍼라고 합니다.”
“어? 서재윤이다!”
“형, 진짜로 1m 두께 벽도 뚫어요?”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재윤이 앞에 나서자 여기저기서 그를 부르며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하도 졸라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온 중년의 남자는 귀가 따가워서 투덜거렸다.
“저 젊은이가 누구길래 이리 시끄러워?”
“아빠도 참, 서재윤이잖아요. 대성에서 밀어주는 에스퍼 삼인방.”
“아, 그 권서주인가 하던 거?”
“역시 우리 아빠 기억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흠, 공무원 30년이 거저 쌓이는 게 아니지.”
권서주는 권해일, 서재윤, 주도준의 성을 따서 줄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견지호가 아직 정식으로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데도 재윤은 부녀의 속닥거리는 대화까지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에스퍼란 정말 사람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재윤은 호의적인 분위기에 말을 얹었다.
“곧 차양을 설치할 예정이며 그 전에 직원들이 생수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오오, 역시 뭘 좀 아시는군요!”
“잘생겼다, 서재윤!”
이후에도 약간씩 불평은 있었지만, 혼자 온 사람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온 사람이 더 많아 서로서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소소하지만, 협회의 빠른 대처에 불만이 누그러진 것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점심때까지는 문제없으리라 여긴 재윤은 한숨 돌리고자 로비로 들어섰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대형 전광판에서 화려한 효과와 함께 문구가 떠올랐다.
A라는 글자가 커졌다 작아지며 존재감을 팍팍 드러냈고, 이름 석 자 역시 비슷하게 움직였다.
“우와, A급이 나왔나 봐!”
“내 이름도 저기 뜨려나?”
“아까 C급도 뜨긴 뜨더라. 이름은 별표 처리되긴 했지만.”
A급 유마로. 재윤은 오늘 가장 만나고 싶었던 에스퍼의 이름이 반가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