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형, 괜찮아?”
제 팔을 붙잡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재윤과 눈이 마주치자 그나마 울렁거리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 집에 갈 수 없어도 동생이 함께 있으니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 같았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그냥, 집밥 해 먹고 싶어서.”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데도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재윤은 그런 재하를 걱정하는 대신 기다렸다는 듯 웃는 낯으로 그를 이끌었다.
“안 그래도 형이 그럴 거 같아서 준비해 뒀어.”
“어?”
머물던 숙소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재윤을 얼결에 따라간 재하는 겉으로 보기엔 다른 문과 똑같은 문 앞에 도착했다.
“형, 손 내밀어 봐.”
“왜?”
물으면서도 이미 손은 앞으로 내민 상태였다. 재윤은 차고 있던 통신기를 풀어 재하의 손목에 채워 줬다.
“이걸로 출입할 수 있어.”
“나한테 주면 넌 뭐로 들어오고?”
“기능이 한 단계 낮은 건 비상용으로 있어. 그걸 쓰면 돼. 이건 급할 때 강하게 치면 바로 비상 알람이 갈 거고.”
어디에 비상 알람이 간다는 건가. 재하가 눈으로 질문하자 재윤은 선뜻 답했다.
“통제 센터로 알람이 가는 것과 동시에 전체 비상벨이 울릴 거야.”
“완전 개 민폐잖아. 이런 위험한 기능이 들어 있는 시계를 막 뿌려도 돼?”
“그런 권한 가진 건 몇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 권한, 몇 명이나 가지고 있는데?”
“에스퍼 중에선 권해일이랑 나.”
내 동생 참 잘났구나. 방송을 통해 벽을 부수고 남들보다 멀리 뛰는 걸 보긴 했지만, 그게 리조트 전체에 비상벨을 울릴 권한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에스퍼의 세계는 그만큼 심오한 건가 싶으면서도 내 동생이 잘났다니 기분은 좋았다.
재하가 조심스럽게 통신기를 카드 인식기에 대자 재윤이 웃으며 꾹 눌렀다.
“야! 그러다 울리면 어쩌려고!”
“정말 세게 쳐야 해. 부서질 정도로 충격이 가야 울려.”
재윤이 딱밤을 때리듯 통신기를 두드리자 재하는 움찔했지만, 조용한 복도 상황에 안심했다.
“꽤 튼튼하네? 떨어트리는 것만 좀 조심하면 되겠다.”
마음이 편해진 재하는 궁금했던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서 잠깐 긴장했던 재하는 방 안 풍경에 신발을 벗고 뛰어 들어갔다.
“여긴 주방이 있네? 제대로 식탁도 있고.”
도준과 함께 머문 숙소처럼 방이 서너 개씩 되지는 않았지만, 구조가 아파트와 비슷해 호텔이 주는 이질감이 적었다.
모델 하우스처럼 정돈되어 있고, 냄비나 그릇 같은 생활용품도 갖춰져 있었다. 일상의 삶을 이어 가기에 충분한 공간은 도준의 숙소에 머물 때처럼 남의 집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새집에 입주하는 것 같아 들뜨기까지 했다.
“네 방은 어디야?”
“내 방?”
“아직 안 정했으면 내가 랜선 있는 방 쓸까 하고.”
생활감이 없어 재윤이 지내던 곳이 아님을 재하는 한눈에 알아봤다.
재하에겐 재윤과 함께 사는 게 당연했기에 같이 지낼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재하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재윤은 상당히 감격했다. 그래서 조금은 짓궂게 질문해 버렸다.
“내가 같이 지냈으면 좋겠어?”
기분이 좋은 탓에 웃는 얼굴로 묻자 싱크대를 열어 보던 재하가 질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야, 너 진짜 왜 이렇게 느끼해졌냐. 지호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싫은 기색이 역력한 재하의 반응에도 재윤은 제 생각을 전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계속 형이 보고 싶었어.”
“아오, 진짜 징그럽게.”
“형은? 나 안 보고 싶었어?”
회귀 직후 울며 매달리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와는 또 달라진 동생의 능글맞은 너스레에 재하는 영 적응이 안 됐다.
안 보고 싶었냐고 물으면, 매일 TV를 통해 보고 있는데 굳이? 라고 답하고 싶었다. 재윤의 여유로움이 얄밉기도 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게 민망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구는 동생에게 닭살 돋더라도 조금은 호응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나도다.”
머쓱해하면서도 답을 해 준 재하가 그릇들을 꺼내자 재윤이 받아 싱크대로 옮겼다. 연신 웃고 있는 재하의 반응에 재윤은 확인차 물었다.
“맘에 들어?”
“어. 살던 집보다 좁긴 해도 있을 건 다 있네. 짐이 없어서 오히려 넓게 느껴지기도 하고.”
여기저기 열어 보던 재하는 텅 빈 냉장고에 아쉬워했다.
“냉장고만 좀 채우면 되겠어.”
“음식 재료는 신청하면 보내 줄 거야.”
재윤은 탭을 열어 협회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알려 주었다. 익숙한 기기이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살펴보니 직원 식당 측에서 갖춘 식자재는 30분 내로 받아 볼 수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있네. 넌 뭐 먹고 싶냐?”
“형이 먹고 싶은 거 해야지. 집밥 해 먹고 싶다며.”
“그러니까. 넌 뭐 먹고 싶냐고.”
자신과 함께 먹는 게 집밥이라는 의미처럼 들렸다.
재윤은 새삼 재하를 빤히 바라봤다. 어째서 제 형은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걸까. 형제로 함께 살았으니 당연하다고 여기기엔, 회귀 전 재윤은 그러지 못했다. 어차피 남이라 세상이 달라지니 등을 돌린 거라며 형을 오해하고 미워했다. 그런 자신과 달리 형은 주저 없이 자신을 위해 몸을 내던졌다.
진실을 알고 형을 구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자신은 미숙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주변에 휘둘렸다. 끝끝내 저를 위해 죽지도 못하고 버텨 냈던 형을 구하지 못했다.
탭을 들고 이상한 표정을 짓는 형의 평범한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보고 있는데도 그리워지는 감각에 눈앞이 흐려지려 했다.
“메뉴 좀 고르랬더니 뭘 그렇게 심각해? 눈도 빨갛고. 어디 아파?”
재윤이 잠시 감정을 다스리는 사이, 재하의 손등이 재윤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손을 눈치 못 챌 리 없었기에 가볍게 한 걸음 물러서는 걸로 피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멈춘 재하의 손이 꿈틀거리더니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거 더럽게 귀한 마빡인가 보다? 손도 못 대게 하고.”
딱 듣기에도 짜증과 화가 묻어나는 재하의 목소리에 재윤의 감각이 빠르게 돌아왔다.
다시 다가오는 손을 보며 피하고 싶었지만, 형의 굳은 얼굴을 보니 이번에도 피하면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런 재윤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재하가 아니었다. 싫은 걸 참는 모습에 재하가 두 손을 들었다.
“너 힘든 거, 능력 안 쓰면 느리더라도 회복되는 거지? 가이딩 안 받을 거면 일하러 나가지 마.”
“당분간 형이랑 있을 거니까 괜찮아. 별로 힘든 상태도 아니고.”
“어휴, 손 좀 잡는 게 뭐 그리 민망하다고.”
재하는 탭을 조작해 주문을 빠르게 마친 후 싱크대로 자리를 옮겨 설거지를 시작했다. 재윤이 도우러 다가가자 가죽 장갑은 저리 가라며 발로 밀어냈다.
가볍게 티격태격하다 도착한 식자재를 함께 손질하고 늦은 점심을 지었다. 재하는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보다 재윤이 좋아하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와, 진짜 맛있는 냄새 나.”
“직원 식당 김치가 전라도 김치더라고. 안 그래도 많이 익어서 찌개 하면 딱 맞겠더라.”
“응, 형이 끓여 주던 김치찌개랑 맛도 비슷해. 치즈계란말이도 최고야, 형.”
“저녁도 기대해라. 제육볶음 매콤하게 해서 강된장 쌈밥이랑 먹자.”
점심 먹으며 저녁 메뉴를 정하는 흔한 식탁 대화에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평화로웠다. 그래서 방에 가면 해 주겠다던 회귀 전 이야기나 가이딩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TV를 켜면 1/3 확률로 재윤이 나오는 바람에 채널만 열심히 돌렸다.
다른 때면 과제를 하거나 게임을 할 타이밍이었지만, 세상이 바뀌고 머리가 복잡해지자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재윤도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처음 보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폰 샀냐?”
“응.”
“할부? 사은품은 뭐 받았는데?”
재윤이 답을 못 하자 재하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내 동생이 호갱이라니.’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참 채널을 돌리던 재하는 오래된 영화가 나오자 리모컨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격변 이후 어머니가 계신 해외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두 분이 속한 직장은 대성과 협력 관계인 업체라 소식이 빨랐다. 각성자 가족인 것도 가산점이 되어 안전한 숙소에서 머물며 업무도 정상적으로 본다고 했다.
‘대학은 휴학계 내야 하나.’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는 거라고는 TV 속 이야기와 주변에서 주워듣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바깥의 사람들이 재하의 생각을 알았다면 어처구니없어했겠지만, 재하 입장에서는 에스퍼들이 아는 걸 자신은 모르고 있기에 종종 소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재윤과 멍하니 TV랑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오늘 하루 여유롭게 보낸다 한들 큰일 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기꺼웠다. 익숙한 편안함에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쌓였던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식곤증까지 오는지 졸음이 몰려와 연신 하품이 이어졌다.
“형, 졸리면 자.”
“후아, 이따 도림이 데리러 가야지.”
“그건 주도준이 할 일이야.”
“도준이 바쁘잖냐. 방패로 물도 막고 불도 막고 엄청 바빠 보이더만.”
“꼬맹인 내가 알아볼 테니까 자고 있어.”
“그냥 이따 깨워 줘. 하아암…….”
길게 하품을 한 재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에 기댄 채 잠들자 재윤은 조용히 일어섰다. 식탁 한쪽에 대충 올려져 있던 탭을 들어 연구소 서버에 권해일이 알려 준 비밀번호로 접속했다. 오늘 자 가이딩 테스트 결과를 빠르게 확인하는 재윤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등급이 낮은 에스퍼들의 가이딩 효율은 형편없었다. 고등급 에스퍼인 주도준, 견지호, 권해일에게서 나온 결과의 절반도 보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가이딩 후 설문지에 적은 내용은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