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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재하의 손을 꽉 붙잡고 있던 에스퍼의 손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잠시 건너편에선 소란이 이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다.
재하의 손을 살핀 이유리는 이리저리 만져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손을 다치진 않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유리가 문을 열자 문 앞에 가드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끌려 나간 에스퍼가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당황한 재하는 뒤돌아보지 않는 가드들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이유리가 돌아와 지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서재하 가이드.”
“연구원님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아뇨, 저희 불찰입니다. 선별한 에스퍼들만 테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원래 오기로 한 에스퍼랑 바꿔치기했나 봅니다.”
“그런 거면 바꿔치기한 쪽이 나쁜 거죠. 좀 무섭긴 했지만, 괜찮아요.”
아픈 손을 만지작거리는 재하에게 이유리는 고개를 숙였다.
“인내심이 강하거나 주변을 신경 쓰는 타입 위주로 선별했습니다만…… 조폭 출신에 성질 급한 에스퍼가 갑자기 튀어나왔네요.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이유리의 진지한 사과에 재하는 여전히 자신에게 위기감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첫 테스트 대상부터 어그러졌으니 안전장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 남은 일정은 오후로 미뤘다.
가드의 숫자도 늘었고, 테스트 받으러 온 에스퍼 역시 엄중한 분위기에 다들 긴장한 채로 임했다.
한결같이 손을 놓을 때면 아쉬워하면서도 가차 없는 경고에 바로 자리를 떴다.
여러 명의 에스퍼와 10분에서 30분 단위로 손을 잡고 가이딩을 한 재하는 조금 피곤해졌다. 가이딩이 길어질수록 체력이 떨어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몇 시간을 테스트한 결과 충분히 데이터가 나왔다.
“음. 역시.”
이유리의 얼굴에 보기 드문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손을 닦은 재하는 이유리가 보고 있는 결과지를 기웃거렸다.
“잘 나왔어요?”
“아니요. 다들 생각보다 저조하네요.”
“엥? 그런데 그렇게 웃어요?”
“서재윤 에스퍼가 방송에서 말한 게 있거든요. 권해일 에스퍼도 동의하는 걸 보아 믿을 만한 정보구나 싶었어요.”
재하는 동생이 나오는 방송은 최대한 챙겨 봤지만, 하도 재방송이 많고 온갖 프로에서 다루고 있다 보니 놓치는 일도 있었다. 어리바리한 재하의 반응에 이유리는 살짝 웃었다.
“가이딩 효율은 친밀도랑 관계있다고 말하더군요.”
친밀도.
오늘 다양한 에스퍼와 가이딩 테스트를 하기 전까지 재하는 친분이 있는 사람과만 가이딩을 해 왔다. 매번 비슷한 결과가 나왔기에 이유가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설마 오늘은 다른가요?”
“네. 친분이 있는 세 사람과 가이딩 할 때는 비슷한 회복 수치를 보였기에 그걸 기준으로 능력 수치를 잡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가이딩 한 건 죄다 예상 수치의 절반도 되지 않아요.”
“그 정도로 별로였어요? 에스퍼들한테 미안하네요.”
재하의 걱정에 이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절반도 안 되는 수치에도 에스퍼들은 크게 만족했어요. 얼굴도 모르는 에스퍼에게 이 정도라니. 친해진 상대는 얼마나 수치가 오를지 궁금해지네요.”
바로 다음 테스트를 생각하는 이유리의 눈은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면 다른 테스트를 해 보고 싶어지는데…….”
“저, 전 테스트 끝났으니 가 볼게요.”
심상치 않은 이유리의 분위기를 감지한 재하가 빠르게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가이드님.”
“윽, 여기 다른 에스퍼도 없는데 왜 그렇게 부르세요?”
불안한 눈으로 돌아보니 이유리는 손에 든 결과지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혹시 낯가리세요?”
“아닐……걸요?”
“그럼 에스퍼 몇 명이랑 친해져 보죠.”
동생에게 교우 관계를 관리당하다 못해 이젠 직장 아닌 직장에서마저 인간관계를 지정해 주려 했다. 하지만 재윤이 한 말이라고 하니 재하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좋아요. 그럼 자연스러운 만남을 세팅해 드릴게요. 내일 연락드릴 테니 오늘은 쉬세요.”
“예? 자연스러운 만남은 또 뭔데요? 그냥 밥이나 한 끼 하면서 친해지는 거 아니고요?”
“내일 봬요, 가이드님!”
“아니, 연구원님!”
평소라면 조금이라도 더 테스트하고 싶어 하던 이유리가 자신을 방에서 내쫓다시피 했다. 마치 내일은 많이 힘들 테니 쉬라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
밖으로 나오자 벽에 붙어 서 있던 이천오가 다가왔다. 오전의 소란에 고마움을 전하려던 재하는 이천오의 얼굴에 생긴 멍 자국에 당황했다.
“이, 이거, 아까 다친 거예요?”
“부끄럽습니다.”
“으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되시고.”
“아닙니다. 제가 일반인이라 에스퍼를 제압할 때 힘에 부쳐 그렇습니다.”
사과하는 재하에게 오히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이천오는 부끄러워했다.
숙소에서는 에스퍼가 마나 억제기 탓에 이능을 쓰지 못하더라도 체력적 우위는 그대로였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천오는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가드라고 해도 에스퍼들 천지인 이곳에서 왜 이렇게 자신을 지키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밀어낼 때마다 우울하게 변하는 얼굴에 오늘도 이천오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재하는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도림이 데리러 가야 해요.”
“다른 보호자들의 요청으로 저녁반까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한숨 돌리고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늦게 가면 도림이가 울지도 몰라요.”
“실시간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이천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을 통해 어린이집 상황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 도림은 두세 살 언니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서로의 머리를 땋아 주고 있었다. 옆에 인형과 장난감 찻잔들이 놓여 있는 걸 보니 인형 놀이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자신과 단둘이 있는 것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기에 안심이 됐다.
“그럼 씻고 나서 데리러 가야겠어요.”
“주도준 에스퍼가 잠시 후 도착하실 겁니다.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가드라기보다는 전담 비서처럼 착착 상황을 알려 주고 의견을 내 주는 이천오에게 재하는 조금 감동했다.
“그러네요. 오빠가 직접 챙기는 날도 있어야지. 이제 나도 바쁘니까 번갈아 가면서 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천오는 도림의 부모나 자신의 부모에 관해 묻지 않았다. 불필요한 호기심을 가지는 대신 필요한 상황을 파악하고 도와주는 이천오가 고마웠다.
숙소가 가까워지기에 한숨 돌리겠구나 싶으면서도 안정감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안전을 위해 들어온 숙소라지만 재하는 호텔 같은 공간에 영 적응이 안 됐다.
종일 가이딩 테스트 하느라 잠시 밀려났던 재윤에 대한 걱정도 다시 시작됐다.
‘할 일도 많은 애라 파동을 가라앉힐 시간도 없을 텐데.’
형제끼리 손잡는 건 이쪽도 질색이었지만, 해야 한다면 손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었다.
각오한 자신과 달리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며 사라진 동생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회귀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알고 있냐고.
자신이 가이딩이란 걸 하게 되고 남자들이랑 붙어 있는 이 상황이 예정된 게 맞느냐고.
그리고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고 묻고 싶었다. 집밥이 아니면 입이 짧아지는 동생이 신경 쓰였다.
‘잠깐 봤던 몸 상태가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재윤보다는 자신이 더 문제였다. 손이 잡히자 옴짝달싹 못 했던 게 신경 쓰였다.
운동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가이딩 후 탈력감이 상당했다. 바로 잘 거라며 이천오를 돌려보내고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아, 씻어야 하는데…… 졸려…….”
처음 가이딩 한 얼굴 모르는 에스퍼 탓에 고통과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려 찝찝했다. 손은 줄기차게 씻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한번 누워 버린 몸은 일어나기는커녕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
* * *
가이딩으로 인한 피로는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수면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허둥지둥 씻고 숙소를 나서던 재하는 문을 열자마자 장승처럼 서 있는 동생을 보고 놀라 문을 도로 닫을 뻔했다.
“어우 씨, 깜짝이야. 왜 그러고 서 있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연구실에 가이딩 테스트 하러. 아, 맞다. 너도 가이딩 해야지.”
어차피 아무도 없는 복도였기에 부끄러운 것도 없겠다 싶어 재하는 냅다 재윤의 손을 붙잡았다. 막상 붙잡고 나니 두툼한 가죽 장갑에 손이 닿아 어이가 없었다.
“야, 요즘 날씨에 웬 가죽 장갑? 땀 차겠네.”
“아이템이라 괜찮아.”
“아이템? 무슨 아이템인데?”
재하의 질문에 재윤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턱짓하며 걸음을 옮겼다.
“늦었다며.”
“아, 맞다. 니가 갑자기 나타나서 정신없어서 그랬지.”
재윤을 따라 걷던 재하는 목 끝까지 꽁꽁 감싼 그의 차림에 눈을 굴렸다. 손이고 목이고 손대기 쉬운 곳은 다 가렸으니 남은 건 머리뿐이었다. 동생 머리 쓰다듬는 셈 치고 손을 뻗자 재윤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벌렸다.
“너 지금 피한 거냐?”
“가이딩 안 해도 된다니까.”
“때려 주고 싶게 생긴 뒤통수라 한 대 치려고 했을 수도 있지.”
변명도 안 되는 말이었으나 재윤은 피식 웃어 주는 의리를 보였다.
“나한테 손대고 싶으면 가이딩 연습이나 해.”
“안 그래도 지금 테스트하러 가는 중이라니까.”
“아니. 형은 지금 여러 사람 가이딩 하고 다닐 때가 아니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다가오는 재하를 가볍게 피하며 재윤은 단호하게 굴었다.
“형은 가이딩 조절이 안 되고 있어. 그거부터 연습해.”
“그게 조절이 되는 거야?”
“피부가 닿는다고 무조건 가이딩이 되면 가이드가 말라 죽어. 빼앗기지 않는 방법을 익혀야 해.”
연구원도 모르는 주의 사항이 재윤에게서 술술 나왔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걸 당연하게 알고 있는 재윤을 보며 재하는 새삼 동생의 회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가이딩 하지 말라는 것도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물어보자 싶어 재하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재윤이 느른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되면 그때는 날 만져도 좋아.”
왜 말을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견지호랑 잠깐 만났다고 플러팅이 옮아온 건가 싶어 소름이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