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17. 거절하기엔 좀 많은…….
에스퍼 숙소에 머무는 동안 재하는 자각하지 못한 불안에 붕 뜬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이 에스퍼가 돼서 각자 활약하는 마당에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가이딩이니 뭐니 테스트를 하는 것 또한,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동기와 스킨십하는 상황은 아찔할 정도로 민망했다.
그랬던 상황이 바뀌었다.
월급과 테스트 수당 이야기를 들은 재하는 매우 의욕적으로 변했다. 가이드 수칙도 여러 번 읽어 두었다.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에 관한 설명과 에스퍼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처벌 방법까지 상당히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가이딩 방법과 효율에 대한 부분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흐린 눈으로 열심히 읽었다.
아무래도 아직 테스트되지 않은 2차 가이딩 이후의 단계는 공란으로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건 자신이 또는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 새로운 데이터를 줄 때 기재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것만 봐도 가이드 수칙은 빼곡한 내용과 별개로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짧은 사이 규칙을 많이도 만들었어.”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가이딩은 도준의 사례를 통해 자신이 가이드임을 처음 발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이드에 대한 지식이나 처우 등에 관한 건 고작 며칠 사이 세워졌다는 의미였는데 그런 것치고 무척 체계적이었다.
“역시 빨리빨리 민족이라니까.”
가이드에 관한 데이터는 재하 하나뿐이라 그에게 맞춰 모든 게 작성되었다. 앞으로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나면 얼마든지 조율될 내용들이었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재하는 전에 없이 의욕이 샘솟았다. 월급을 받으며 대충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이딩은 1차만 할 생각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에스퍼들이 무리하게 힘을 사용하기 전에 가이딩 하는 게 중요했다.
혹여나 지호 때처럼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되면 생판 모르는 남이랑 부둥켜안고 밤을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그건 좀 많이 싫을 거 같은데.’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많은 테스트와 실전 가이딩을 해야 했다.
과도한 의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재하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월급에 수당까지 받는 걸 알게 됐는데 TV나 보며 뒹굴뒹굴할 수 없었다.
도림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가이딩 테스트를 하기 위해 먼저 찾아갔다.
가이딩실에는 매번 테스트하러 올 때마다 재하를 반겨 주는 연구원, 이유리 혼자 기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언제나 바싹 묶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가 차가워 보였지만, 지호를 구하러 함께 달려 줄 만큼 에스퍼를 위해 헌신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연구원님.”
먼저 인사를 건네는 재하의 목소리에 가벼운 반가움이 깃들었다. 친근하게 건넨 인사에 이유리 역시 조금이지만 웃음을 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서재하 가이드.”
“일찍 와야 더 많이 테스트하죠.”
“의욕적이라 좋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이유리는 다른 방으로 재하를 이끌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가벽으로 나누어진 방이었다. 구멍이 난 가벽 앞에 안락의자가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재하가 쳐다보자 이유리는 태연히 설명했다.
“가이드는 현재까지 서재하 가이드뿐이라 보안이 필요하거든요.”
“……저 어제 엄청나게 얼굴 팔렸는데요.”
친한 사람들이 에스퍼가 되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재하는 자주 인터넷 반응을 살피곤 했다. 거기에 재하의 존재를 추측하는 댓글들도 여럿 보였다. 마침 그날 재윤이 가이드의 존재를 언급한 데다 쓰러질 정도로 힘들어 보였던 해일이 재하를 끌어안은 후 홀로 일어선 것에 기인한 추측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번 노출된 걸 덮기는 힘들었다.
회의적인 재하의 태도에 이유리는 차분히 설명했다.
“지금 오는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한 명뿐이라는 걸 몰라요. 부러 여러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을 흘리는 중이기도 하고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그럼요. 서재하 가이드는 아직도 자각을 못 하신 것 같으니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재하 나름 공부했지만, 연구원만큼 본인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했다.
“에스퍼들과 사막을 횡단 중인데 물을 가진 사람이 서재하 가이드뿐이에요. 가진 물이 얼마만큼인지 확실치 않고요. 아무리 사이좋게 나눠 마신다고 해도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사막에 물을 예시로 드니 확실하게 와 닿아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나눠 마시니까 부족해. 독점하고 싶어.”
“아.”
“저러다 물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내가 먼저 실컷 마셔야겠어. 아니면, 나만 물을 마시고 싶으니 독점해야겠어.”
이기적인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재하는 지호나 해일에게 안겼을 때 아무리 힘을 써도 벗어나기 힘들었던 걸 떠올렸다. 에스퍼가 작정하면 재하는 반항 한번 못 하고 끌려갈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얼굴을 안 보이는 게 맞겠네요.”
“네. 그러니 에스퍼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우리 연구원이 답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테스트는 재하에게 위험 부담보다는 민망함을 이겨 내는 게 힘들었다. 이제야 에스퍼에게 가이딩이란 게 얼마나 간절하며 그로 인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이유리의 말에 재하는 벌써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이유리가 빠르게 덧붙였다.
“각성 테스트 받겠다며 신청서가 몰려들고 있어요. 그중에 가이드가 있을 수 있고요. 가이드 숫자가 늘어나면 서재하 가이드의 신변에 대해 걱정할 일도 없을 거예요.”
“아, 그러네요. 물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목마른 사람이 불안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요. 테스트 중엔 가드도 배치될 테니 안심하세요. 서재하 가이드는…… 가이드님은 손만 내주시면 돼요.”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린 재하가 안락의자에 앉았다. 이전 테스트 때와 달리 푹신해진 의자에 좀 더 편안해졌다. 그리고 곧 가벽 너머로 인기척이 들리더니 걸쭉한 목소리가 인사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안…….”
반사적으로 인사하려던 재하는 이유리의 날카로운 눈빛에 입을 벌린 채로 말을 멈췄다. 이내 건너편에서 다른 연구원이 주의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의 사항 엄수해 주세요. 어기시면 퇴실 조치합니다.”
“에이, 귀한 분 만나는데 인사도 못 하게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테스트는 10분입니다.”
“네네. 잘 부탁드립니다~”
딱딱한 연구원의 태도에도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가 이어지더니 가벽 구멍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마디가 굵고 단단한 게 주먹깨나 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워 재하가 망설이자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까닥거렸다. 장난스럽기까지 한 움직임을 보이며 또 말을 걸어왔다.
“뽑기 잘못해서 30분을 놓친 것도 억울한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손에 힘주지 마시고 가이드님이 불편해하면 바로 중단합니다. 동의하십니까?”
“하이고, 앞에서 다 동의하고 서명까지 했는데 또 묻습니까? 동의합니다, 해요.”
껄렁한 태도였지만, 계속해서 장난스럽게 까닥이는 손은 생김새와 달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하도 망설임을 지우고 손을 겹쳤다. 예상대로 딱딱하게 못이 박인 손이 거칠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살며시 손을 잡았다.
방금까지 은근히 불만을 드러내며 껄렁거리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재하가 잡아 준 거친 손이 조심스럽게 맞잡아 왔다. 워낙 조심스러워 부담되지 않았다.
차라리 얼굴도 보이지 않고 어색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으니 부담이 덜했다. 에스퍼 상태가 좋지 않았다면, 부담이 됐을 텐데 이렇다 할 감각도 없었다.
모니터를 보니 가이딩은 제대로 되는 중이었다. 이런 식이면 몇 명이든 가이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의욕이 샘솟았다. 다만 10분이란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다.
재하가 지루해하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유리는 모니터링에 열심이었다.
이유리의 예시에 긴장했던 것도 잠시, 너무도 지루해진 재하는 두 번째 가이딩 때는 핸드폰이라도 보자 싶었다.
“10분. 가이딩 테스트 종료되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1번 테스트 결과 저장하겠습니다.”
연구원끼리 가이딩 종료를 알리며 정리하려 했다.
재하도 손을 놓으려 힘을 풀자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잡고 있던 상대방이 강하게 붙잡아 왔다.
“윽!”
“방춘재 에스퍼, 당장 손 놓으십시오!”
“시발, 이 좋은 걸 왜 놔?”
능글거릴 정도로 느긋하던 상대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에스퍼의 반응에 재하는 테스트 전, 이유리와 주고받은 예시를 떠올렸다. 고작 10분의 가이딩은 목마른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을 건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하는 어떻게든 손을 풀려 애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손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으나 재하는 소리를 내는 걸 참았다. 이런 상대에게 자신의 정보를 최대한 알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계약에 명시된 대로 무력 사용하겠습니다.”
익숙한 이천오의 목소리에 이어 사람 패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째서 자신의 가드가 저쪽에 가 있나 했더니 필요한 상황에 누구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일 이를 에스퍼 쪽에 둔 듯했다.
마나 억제기 탓에 에스퍼는 이능을 쓸 수 없지만, 기본 체력이 일반인과 비교하면 월등히 좋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장치가 돼 있는지 일반인 가드에게 제압당하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왔다.
“놓으십시오.”
“크흑! 윽!”
고통에 찬 소리가 들리는데도 재하를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팔을 부러뜨리기 전에 놓으세요.”
이천오의 서늘한 경고에도 잡힌 손은 그대로였다.
“으윽…….”
“가만히 계세요.”
다급히 다가온 이유리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아파하는 재하를 보며 망설임 없이 에스퍼의 손등에 주사기를 꽂았다. 제 손도 아니건만 보는 것만으로도 움찔할 정도로 굵은 주삿바늘이었다.
“지금 떼면 경고 1회로 치지만, 계속 버티시면 가이딩 대상에서 영구 제명 하겠습니다.”
침착하지만 단호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