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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51화 (5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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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행동에 해일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해일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재하가 입고 있던 맨투맨을 벗어 던졌다. 그 모습에 진심으로 놀란 눈을 한 해일을 향해 재하는 거의 몸을 내던지며 꽉 끌어안았다.

삑―.

들려온 기계음으로 단숨에 경계수위가 내려갔음을 알 수 있었다.

“재하, 어째서…….”

해일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힘겹게 떨려 왔다. 재하는 해일과 맞닿은 몸에서 빠르게 흘러 나가는 기운을 느꼈다. 어찌나 빠른지 찌릿찌릿 전기가 오른 것 같아 불편했지만, 양팔까지 해일의 등에 둘러 끌어안았다.

“길마 형이 끝나야 재윤이한테 갈 수 있잖아요.”

재하는 해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윤을 떠올렸다. 함께 들어간 던전에서 아무리 재윤이 뛰어났다고 한들 그 역시 힘을 썼을 테고, 티 내지 않아도 힘들 게 분명했다.

재윤을 걱정하는 형다운 말에 해일은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지극한 우애에 해일은 호응하듯 재하의 허리를 끌어당겨 더욱 몸을 밀착했다.

힘을 남용한 탓에 무겁던 몸이 재하와 닿은 곳에서부터 가벼워지는 감각은 아찔할 정도로 좋은 기분이 들게 했다. 좀 더 오래, 좀 더 많이 안고 싶었다.

자신의 뺨이 재하의 뺨에 스치자 그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는 반응에 해일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얼굴이 닿는 건 불편해하는 것 같아 다른 곳에 닿으려다 해일은 낯선 흔적을 보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깊게 끌어안은 재하의 어깨와 목이 붉은 자국과 깨문 흔적들로 가득했다. 가이딩을 통해 몸이 가벼워지면서도 한편으론 지나치게 기분 좋은 탓에 생겨난 열기와 달리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여전히 재하를 끌어안은 채 해일은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어제 견지호 에스퍼의 폭주를 막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에이,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자고 일어나니까 다 끝났더라고요.”

“그 정도 가이딩은 괜찮은 겁니까?”

“그 정도요? 음…… 지금이 더 민망한 거 같은데요.”

격리실에 갇힌 지호와 가이딩 할 때 재하는 제대로 옷을 입고 있었다. 지금처럼 상의를 탈의하고 체온을 나눌 정도로 끌어안지 않았다. 물론 재하가 잠든 사이 지호 쪽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만져 댔다는 걸 모르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오히려 옷을 입어야…… 으억?!”

지난밤 지호에게 한참을 깨물리고 빨렸던 목에 이번에는 해일이 입술을 묻어 왔다. 그 감촉이 어찌나 익숙하면서도 낯선지 저절로 피하고 싶어져 재하가 몸을 뒤로 물렸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재하가 뒤로 물러나려는 기색을 읽은 해일이 그대로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 푹신하지 않고 단단한 게 딱 병원 침대 느낌이었으나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 기, 길마 형?”

“해일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아니, 지금 호칭이 문제가 아니고요.”

“해일 형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다른 때는 조르지 않던 해일이 오늘따라 호칭을 재차 언급하며 재하의 어깨에 숨을 묻혀 댔다. 위기를 느낀 재하는 굳이 버틸 것 없이 해일이 원하는 대로 그를 불렀다.

“해일 형!”

“네, 재하.”

“그러니까…… 목을 막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가이딩은 되거든요.”

재하가 생각하기에 해일은 이성적이고 차분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당연히 들어주리라 여기고 꺼낸 말에 해일의 숨이 어깨에서 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재하의 목에 붉은 흔적이 잔뜩 남았습니다.”

“흐익! 거기서 말하지 말아요!”

재하의 외침에 해일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얼굴을 마주한 게 더 민망하지만, 목이 근질거려 참기가 힘들었기에 최선을 다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견지호 에스퍼가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재하가 그 일이 별거 아니었다고 한다면 제게도 같은 기회를 주십시오.”

“길마…… 아니, 해일 형. 형은 이런 식으로 막 찝쩍거리는 사람 아니잖아요.”

“견지호 에스퍼가 찝쩍였습니까? 그건 신고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가이딩 시 참관자를 둘 수도 있습니다.”

단둘이 있어도 쪽팔리고 미치겠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고 있으란 말에 재하의 한숨이 깊어졌다. 정작 에스퍼들은 연인들이나 할 법한 행동을 남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들처럼 각성하면서 몸도 튼튼, 멘탈도 단단해진 상태가 아니기에 거절했다.

“아뇨,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이대로도 괜찮아요.”

“재하, 불편해 보입니다.”

“편하진 않죠.”

재하의 답에 해일의 상체가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달라붙는 도준과 애교를 부리며 필사적으로 달라붙던 지호와도 다른 반응에 재하는 당황했다.

“해일 형?”

“재하가 불편하다면 가이딩을 중지하겠습니다.”

“아까 연구원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해 준 것만으로도 상당히 나아졌습니다. 이후는 천천히 회복하겠습니다.”

재하는 모니터를 힐끗 확인했다. 상당히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불편……까지는 아니고요.”

“괜찮습니다. 가이딩은 가이드의 승낙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거절하는 연습도 필요합니다.”

해일은 가이드인 자신을 우선시하라고 조언했다. 본인을 거절하라며 진심처럼 보이는 믿음직한 미소를 보였다.

맞붙었던 몸을 떼어 내고 손까지 놓으며 자신을 존중했다. 밀어내도 달라붙던 지호나 도준과 달리 깔끔한 물러섬에 당황한 건 재하 쪽이었다.

“하지만 필요하잖아요. 하고 싶지 않으세요?”

“당연히 원합니다. 하지만 재하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은 에스퍼가 아니기에 그들의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다만, 자신 역시 조금 전 게이트 앞에서 재윤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이성이 날아가는 걸 느꼈다. 게이트 안에 홀로 있을 재윤을 도울 사람은 그와 함께 내부 상황을 아는 해일뿐이었다. 동생을 돕기 위해 지친 해일과 입을 맞춰서라도 빠른 가이딩을 하려 했었다.

여기까지 떠올린 재하는 그때 자신이 느낀 간절함에 빗대어 에스퍼의 마음이 어떤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불편한 건 당연하다고 봐요.”

“전 재하가 불편하다면…….”

“아뇨, 전 해일 형이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르게 봐요. 남자끼리 막 끌어안고 부대끼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 불편한 게 당연하지.”

떨어져 앉은 해일을 향해 재하가 손을 뻗었다. 다행이랄까, 해일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해일 형이나 친구에게 필요한 거라면 참을 수 있어요.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고요.”

“해야 하는 일이란 건 없습니다. 재하가 거부한다면 누구도 당신을 강제할 수 없게 할 겁니다.”

해일은 정직하고 도덕적이었다. 그런 사람조차도 자신이 다시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기면 거부하지 못했다.

에스퍼가 가이딩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걸 재하는 실시간으로 확신했다. 그만큼 간절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그런데도 해일이 자신을 위해 밀어낸다는 것도 알아챘다.

“싫은 건 아니니까 빨랑 해치우자고요.”

이번만큼은 해일도 거절하지 않았다.

끌어안기가 무섭게 어깨에 닿는 숨결에 재하는 이번에도 고개를 돌리며 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 * *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해일의 상태가 안정됐다.

진득하게 붙어 있던 게 거짓말처럼 해일은 정중하게 물러서서는 재하를 위해 옷을 건네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하.”

“아, 넵. 해일 형도 수고하셨어요.”

차라리 붙어 있을 때는 가이딩 하느라 정줄을 반쯤 놓고 있어 어색함도 몰랐는데 떨어져 옷을 주워 입으려니 민망했다. 재하가 등을 돌리고 꾸물대는 사이, 해일이 먼저 패치를 떼고 빠르게 흐트러진 제복을 바로 했다.

“연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요. 함께 나갈까요?”

한결 친근해진 말투에 재하는 되레 민망해져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일이 먼저 나가고 나서도 재하는 한참 동안 부스스해진 머리를 만지며 시간을 끌다 밖으로 나왔다. 가이딩을 끝내고 나온 재하에게 연구원이 눈을 빛내며 물어 왔다.

“서재하 가이드, 혹시 2차 가이딩 했어요?”

“2차는 또 뭐예요?”

“저번에 설명해 줬잖아요. 1차는 손잡기나 가벼운 포옹. 2차는 키스…….”

“안 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건 해일 형한테 물어봐도 되잖아요.”

“그건 아니죠. 이건 가이드 쪽의 의사가 중요한 거고, 비밀 유지도 가이드의 권한이고요.”

“그래요?”

딱히 관심 없어 하는 재하의 태도에 연구원이 들고 있던 탭을 빠르게 두드린 후 내밀었다.

“서재하 가이드, 이거 보세요.”

“네?”

연구원이 내민 탭에는 목차가 한가득했다.

가이드 개요, 가이드 자격, 가이드 조건, 가이드 비밀 엄수, 가이드에 가이딩에 끝없이 이어지는 목차에 재하가 어리둥절하자 연구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까진 서재하 씨라고 불렀지만, 이젠 서재하 가이드가 되신 거예요. 가이딩 테스트가 아니라 견지호 에스퍼나 권해일 에스퍼에게 한 것처럼 실제 가이딩을 하시는 거고요.”

“똑같은 가이딩인데 제 호칭이 달라진 게 무슨 상관이에요?”

“월급이 나옵니다.”

단호한 연구원의 답에 재하는 시켜만 주십시오를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아직 가이드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테스트 참여 시 일정 금액을 책정하고 있었고…….”

“얼만지 물어봐도 될까요?”

임상 실험은 상당히 큰 금액을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재하의 눈이 반짝였다.

연구원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만원……?”

“……서재하 가이드는 정말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군요. 테스트하는 동안 그렇게 교육을 해 드렸는데도 흘려들으시더니.”

“흘려들은 건 아닌데……. 앞으로 열심히 들을게요.”

10만 원인지 100만 원인지 몰라도 고작 손 좀 잡고 시간을 보낸 걸로 매일 돈이 쌓이고 있는 거였다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리바리하던 재하의 표정이 달라졌다. 눈빛마저 반짝이는 재하에게 연구원은 당당하게 탭을 들이댔다.

“실전인 이상 제대로 숙지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사항을.”

“제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조만간 2기 에스퍼가 들어올 테니 가이딩 테스트 해 주시고요.”

“넵. 열심히 하겠습니다.”

“2차 가이딩도 좀 협조해 주시고요.”

“아니, 그건 좀…….”

연구원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는 순간 재하의 눈빛이 많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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