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영우의 목소리는 재하에게 닿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집요한 시선에 예민해진 재하는 엉뚱한 쪽으로 경계심을 보였다.
“아니, 인권 없냐고.”
사정없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재하가 필사적으로 동생을 지키느라 버둥대는 동안 게이트 틈새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줄어들었다. 게이트가 소멸하면 이들이 밟고 선 공간도 사라질 터. 사람들의 호기심도 불편했고, 어차피 장소를 이동하는 게 나았기에 지호가 곁으로 다가왔다.
“선배, 함께 돌아가죠.”
지호가 해일과 재윤의 손목을 양손으로 하나씩 잡는 걸 본 재하가 본인은 뭘 잡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 모습에 지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목은 왜 내미는데?”
“아까처럼 공중에서 떨어지면 위험하잖아요. 제대로 잡으세요.”
지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재하는 지호의 목에 팔을 걸며 매달렸다. 동생도 그렇지만, 지호마저 자신보다 커서 매달리게 되는 게 쪽팔렸다. 그냥 팔을 붙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재하의 시야가 변했다.
해일과 재윤은 공간 이동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나 재하는 지호의 목을 끌어안고도 조금 휘청였다. 지호는 곧장 두 사람의 손을 놓고 재하를 끌어안았다.
“선배, 세 명이나 옮기는 거 힘들었어요. 저도 가이딩 해 주세요.”
“알았어. 지금 해 줄게. 손 내놔.”
자신을 끌어안은 지호를 밀어내며 손을 내밀자 그가 고개를 흔들며 불만을 드러냈다.
“에이, 좀 전에 저 사람한테는 뽀뽀해 주려고 했잖아요.”
지호가 지목하자 해일은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재윤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재하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까는 비상사태였잖아.”
“제가 다 죽어 갈 때도 포옹밖에 안 해 주시고선.”
“내 동생이 위험하니까 정신없어서 그랬지. 아니었으면 손만 잡았을 거야.”
재하의 필사적인 변명은 재윤의 굳은 얼굴 때문이었지만, 지호는 그걸로도 만족스러운지 생글거렸다.
“미수였으니까 괜찮아요. 대신 전 포옹해 주세요.”
“손이면 충분해, 형.”
재윤은 다른 말은 접어 둔 채 재하가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언했다. 재윤의 참견에 재하는 보란 듯이 손을 내밀었다. 지호는 아쉬워하면서도 손깍지를 끼며 재하에게 달라붙었다.
“야, 넌 왜 손을 꼭 이따위로 잡냐?”
“저 원래 손 이렇게 잡아요.”
재하가 짜증을 내며 손을 털어 봤지만, 같이 움직일 뿐 떨어지지는 않았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협회 문이 열리고 안에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권해일 에스퍼, 마나 측정하겠습니다.”
“게이트에 대한 보고를 부탁드립니다.”
로비를 지키던 직원들은 대형 화면을 통해 게이트 앞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소속 에스퍼들이 센터 입구로 나타나리라 예상한 직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중엔 연구원도 포함돼 있었다. 연구원은 손에 들고 나온 측정기를 에스퍼들에게 죽 대 보더니 재하에게 결과를 말해 주었다.
“권해일 에스퍼의 수치가 제일 심각합니다. 권해일 에스퍼의 수치가 절반 정도 내려가면 서재윤 에스퍼의 가이딩을 바로 해 주셔야 합니다.”
지호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심각한 연구원의 말에 재하 역시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가 아쉬워하며 잡은 손을 푸는데 재윤은 한 발 물러서며 거절했다.
“아뇨. 전 가이딩실로 갈게요.”
행동과 목소리에서 단호함을 느낀 연구원은 재윤이 아닌 재하를 보며 설득했다.
“가이딩실 효율은 너무 낮습니다. 대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서재하 가이드라면 두세 명 정도는 너끈합니다.”
재하를 가이드라 칭하는 말은 재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였음에도 지친 탓에 감정 제어가 되지 않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재하가 재윤 쪽으로 몸을 틀자 그가 빠르게 한 번 더 거절했다.
“형이랑 가이딩 안 해요.”
단호한 말에 재윤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기류가 미묘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재윤이 왜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 못 하겠다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몇몇 직원은 답답해하는 표정을 짓는 대신 그 기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긴, 손잡는 게 쪽팔리긴 하지.”
“아기 때면 모를까, 다 커서 형이랑 손잡는 건 좀…….”
“누나랑도 싫은데 형은 진짜 아니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재하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벽 보고 있어. 형님이 친히 포옹을 해 줄 테니까.”
일부러 장난스럽게 양팔을 벌리는 재하의 행동에 지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선배, 저는요?”
“낄 데 껴라, 진짜.”
“죄송하지만, 권해일 에스퍼부터 가이딩 부탁드립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에 연구원이 굳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 섞어 말을 건네던 재하는 그사이 안색이 더 나빠진 해일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동생 신경 쓰느라 길마 형을 방치할 뻔했네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현장에서 재하를 불편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두 분, 가이딩실로 모실게요.”
연구원이 앞서 달려가자 해일과 재하가 그 뒤를 따랐다. 지호 역시 그 잠시를 놓치지 않고 재하의 손에 손가락을 얽으며 붙잡았다. 하룻밤 내내 잡았던 손이라 이제 쑥스럽지도 않고 그러려니 싶었다. 돌아보니 재윤이 그새 사라져 재하는 걱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서재윤 씨는 곧 돌아올 겁니다.”
“손이라도 잡아 주면 좋았을 텐데……. 재윤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부끄럼을 타네요.”
“재하 선배, 쟤도 성인이에요. 저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요.”
지호의 투덜거림에 재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 그런가? 너보다 훨씬 어리게 보이는데.”
“어린 건 제 쪽이 더 어리게 보일걸요.”
“아니, 그건 아니지.”
재윤의 나이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지호와 재하를 지켜보던 해일이 결론을 지었다.
“재하에겐 귀여운 동생일 테니까요.”
동생은 맞지만, 앞에 붙은 형용사는 떼 줬으면 싶었다.
재하가 가볍게 삐죽대는 사이, 가드가 와서 지호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아무래도 어제 폭주 위험이 있었던 지호가 제멋대로 능력을 쓰며 돌아다니는 게 불안했으리라. 연구원까지 따라붙으며 잔소리가 시작되자 지호가 웃는 얼굴로 사과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시원해진 손을 탈탈 턴 재하는 곧은 자세로 옆을 지키는 해일과 함께 앞서 걷는 연구원을 따라갔다.
“서재하 가이드에겐 익숙할 거예요.”
“아, 네. 그러네요.”
연구원이 말한 가이딩실은 가이딩 테스트를 진행하던 곳과 가까웠다.
“패치 붙이는 것만 돕고 모니터링은 다른 방에서 할 겁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데이터만 확인할 테니 안심하고 가이딩 하세요.”
안심하라는 말이 오늘처럼 불안했던 적이 있을까. 급속도로 어색해져 벽에 붙어 선 재하와 달리 해일은 연구원이 패치를 붙이는 동안 찬찬히 방 안을 살폈다.
재윤이 여러 아이템을 이용해 만든 가이딩실과 달리 평범했다. 소파 하나와 침대를 보면 1인 병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침대 옆 마나 파동 측정기와 모니터가 그나마 병실로 보이지 않게 했다.
연구원은 해일의 가슴과 등에 패치를 붙이며 다시 한번 언급했다.
“혹시 패치가 떨어지더라도 가이딩을 우선시해 주세요. 저희가 데이터를 얻으려는 건 에스퍼를 위해서니까요.”
“알겠습니다.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해일은 낯빛이 좋지 않으면서도 언제나처럼 정중했다. 연구원은 밖으로 나가기 전, 재하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격리실을 함께 다녀온 후 연구원이 재하에게 가진 신뢰와 친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까부터 계속 파이팅을 외치는 듯한 연구원의 태도에 재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이 나가며 전등불까지 일부 꺼 버려 대낮처럼 환하던 공간이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가이딩 할까요?”
“재하가 괜찮다면 부탁하고 싶습니다.”
단둘이 남아 버리자 재하는 괜스레 어색해져 눈을 굴렸다. 모니터의 그래프가 완만하지 못하고 한 번씩 뾰족하게 튀는 게 해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려 주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어 재하는 차근차근 진행하더라도 일단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손부터 잡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재하의 느릿한 제안에도 해일은 재촉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양 손바닥이 보이게 뒤집어 재하에게 내미는 해일의 행동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도 막상 손을 잡으려니 너무도 어색했다.
이게 다 연구원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불까지 반이나 끄고 나가 버린 탓이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재하가 손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다 문 쪽을 쳐다보자 해일이 말을 걸어왔다.
“재하.”
“네, 넵!”
“전 기다릴 수 있으니 편하게 해 주십시오.”
긴장한 재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우자 해일이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물리적으로 조금이나마 멀어진 해일에 재하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더불어 해일은 눈까지 감았다.
해일이 먼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재하에게 여유가 생겼다. 그래프는 여전히 불길하게 움직였지만, 해일은 평온하게만 보였다. 패치를 붙이느라 흐트러진 제복 차림조차 정갈하고 신뢰를 주는 해일의 이미지를 해치지 못했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러운 거다. 그렇게 마음먹고 해일과 손을 맞대고 꾹꾹 누르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해일이 진심으로 웃는 모습에 재하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함께 웃으며 긴장이 풀렸다. 양손을 잡다 보니 마주 보게 되어 민망해 대화하며 분위기를 풀려 했다.
“길마 형, 아까 거기서 뭐 했어요?”
“게이트를 닫았습니다.”
단순한 대답에 비밀인가 싶어 재하가 입을 다물자 해일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갑자기 열린 게이트. 이중 게이트의 존재. 게이트 석을 파괴한 후 탈출하던 과정에서 입구 주변에 마수가 여럿 있어 재윤과 함께 사냥했다는 것. 불을 질러 다른 마수들이 게이트를 지나지 못하게 하느라 마나를 남용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듣게 된 재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재하의 표정에서 걱정을 읽은 해일은 그제야 너무 정직하게 말했나 싶어 수습하려 했다.
“위험한 일은 없었습니다. 서재윤 씨가 워낙 뛰어나서 문제없었…… 재하?”
“가이딩 제대로 할게요.”
손을 풀어낸 재하가 해일의 풀어진 셔츠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