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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방적 재회
해일에게 꽉 끌어안긴 재하는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뺨을 스치는 강바람은 실내가 아닌 외부임을 상기시켰다. 외부의 개입 없이 미리 각오한 후 진행한 가이딩과는 상황이 너무도 달랐다. 민망하고 어색한 데다 해일과 맞닿은 뺨과 허리를 감은 손을 통해 가이딩이 이루어지며 약간의 불편함도 느껴졌다. 해일의 지친 모습에 손을 잡아 주러 왔다가 대뜸 끌어안겨 바닥과 가까워진 재하는 곤란함을 느꼈다.
“하아…… 재하.”
항상 정중하던 해일이 자신과 닿는 면적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해일의 간절함이 뺨과 귀에 닿을 때마다 이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송을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윽, 길마 형. 힘 좀만 빼 주세요.”
“네, 재하. 후우…… 그러겠습니다.”
해일은 대답과 달리 재하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피부에 직접 닿고 싶은지 품이 큰 맨투맨 안으로 손이 들어와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윽, 진짜로 숨 쉬기 힘들어서 그래요.”
“조심하겠습니다.”
“아오, 손 좀!”
지호가 보기에도 해일은 재하를 지나치게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재하가 입은 옷이 넉넉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남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바로 직전까지 재하를 통해 가이딩을 경험한 지호는 해일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성보다 본능이 재하를 놓지 못하는 상황임을. 이대로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두느니 두 사람 다 협회로 옮기는 게 낫겠다 싶어 손을 뻗었다.
“선배랑 그쪽 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숙소로 가서 하시죠. 숙소 내부는 못 가지만, 입구엔 데려다줄 수 있어요.”
“잠깐만.”
곧바로 실행하려던 지호의 모습에 재하는 즉각 거절했다. 지호는 의아해하면서도 손을 거두었다. 이에 안심한 재하는 숨 쉬기 힘들어하면서도 해일에게 물었다.
“길마 형, 재윤이는요?”
재하를 필사적으로 끌어안던 해일의 행동이 멈췄다. 가이딩에 취해 잠시나마 날아갔던 이성이 순식간에 돌아왔는지 눈빛마저 선명해졌다.
“같이 나왔어야 했는데……. 다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지호의 눈에는 해일의 마나 파동이 거친 게 보였으나 그는 재하를 놓고 일어섰다. 재하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 해일은 땀이 맺힐 정도로 힘겨워하면서도 믿음직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하.”
재하는 해일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는 짧은 순간 손끝이 아릴 정도로 튀는 감각을 느꼈다.
폭주 직전인 지호보다는 나았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다. 이미 힘을 많이 사용했고, 가이딩이 필요한 상태라는 걸 확신했다.
지난밤 지호를 끌어안고 한숨 푹 자기까지 했던 재하였다. 앞으로 가이딩 할 일이 몇 번이고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재윤을 게이트 안에서 빼내 올 가능성이 가장 큰 이는 지친 해일이었다.
재하의 심각한 얼굴에 해일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서재윤 씨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안의 상황이 어떤지 물을 틈도 없었다. 다만 해일이 이토록 힘겨워하는 모습은 처음인 데다 아직 게이트 안에 동생이 있었다. 재하는 더 잴 것도 없이 해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재하?”
“길마 형, 짧게 할게요.”
재윤을 생각하면 빨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도 해일은 저를 붙드는 재하를 밀어낼 수 없었다. 재하가 비장한 얼굴로 가까워지는 걸 본 해일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재하의 돌발 행동을 지호가 말리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는데 게이트 안쪽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 안에서 뭐가 나오는데요?”
“다행히 늦지 않게 나오셨군요.”
해일과 지호가 먼저 반응했고, 그들의 시선이 옮겨 가는 것에 재하 역시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 앞에 멈춰 선 재윤은 해일과 함께 있는 재하를 보고 당황했다.
“형?”
형이 왜 여기 있냐는 듯 의문 가득한 부름이었지만, 재윤의 목소리에서는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해일이 힘을 다 써 쓰러진 것과 달리 멀쩡하게 게이트를 걸어 나온 재윤은 대신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예상치 못한 동생의 노출에 재하의 눈이 흔들렸다.
“너…… 옷이 왜 그래?”
“옷? 아, 게이트 닫히기 전까지 방어하느라 좀 뜯겼어.”
재윤의 말대로 그의 등 뒤 게이트가 닫히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면에 시선을 뺏길 만도 한데 정작 재하의 눈은 재윤에게로 향했다.
제복 상의 앞섶이 제대로 뜯긴 재윤은 각진 복근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평범한 몸에는 도드라진 근육이 거의 없기에 저도 모르게 가자미눈이 되어 불만을 드러냈다.
찰칵. 찰칵.
이때 멀찌감치서 셔터 소리가 쏟아졌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재하가 재윤의 앞에 서서 양팔을 벌려 최대한 그의 모습을 감췄다. 구경꾼들이 워낙 많아 아쉬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아, 찍지 마세요.”
“형, 괜찮아.”
“괜찮긴. 어허, 남의 동생을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초상권은 어떻게 된 거냐고!”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모인 게 재하는 어이없었다. 남자 몸통 좀 드러났다고 저렇게나 집중할 일인가. 오싹할 정도로 불안해진 재하는 더욱 필사적으로 동생을 보호했다.
* * *
하지만 재하를 오싹하게 만든 시선은 정작 재윤이 아닌 그를 향해 있었다.
경찰로 위장한 빌런에게 납치당했던 이영우. 그가 오랜만에 보게 된 재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있었다.
“재하는 여전하구나.”
그리움과 반가움이 영우를 웃게 했다.
다가갈 수 없어 안달복달하면서도 재하를 눈에 담았다.
“재하를 만나고 싶은데…….”
그날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재하 곁에 있었을 것이다.
대격변의 날, 영우는 재하를 찾아가 그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재하를 다치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재하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는 방어 막을 약화할 생각으로 주변에 폭탄을 흘렸을 뿐이었다. 다만, 영우는 폭탄과 그의 거리가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터진다는 걸 알지 못했다.
“옷이 커 보여. 귀엽잖아.”
재하에게 말을 걸듯 영우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 갔다.
“손잡고 싶어, 재하야.”
재하가 무사하다는 건 빌런 조직의 빠른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를 데려오는 일은 어려웠다.
영우는 납치당한 셈이었으나 의외로 그들은 정중했다. 몇 년 전 각성한 이들을 대성이 무력으로 통제해 왔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힘도 없는 일반인이 지배하는 세상은 옳지 않다며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게 빌런이라면 스스로 빌런이라 칭하겠노라며 그들은 당당했다. 그들의 사상에 영우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손에 힘이 생겼음에도 재하를 놓친 게 아쉬웠다.
영우는 조직에 머무는 대가로 재하를 원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하던 순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들은 재하가 집이 아닌 에스퍼 숙소에서 머문다는 소식을 가져오는 건 빨랐으나 빌런이 드나들 수 없는 장소라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 후 보름이 넘어가도록 재하를 만날 수 없었다.
재하를 데려오지 못하는 빌런 조직의 무능함에 슬슬 짜증이 났다. 스스로를 빌런이라 하더니 정작 몸을 사리며 일을 저지르지도 못하니 답답했다.
영우의 불만을 눈치챈 빌런 수장이 그들의 기지를 소개했다. 그들이 보유한 시설은 재력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영우의 눈에도 대단했다.
섬 하나를 통째로 기지화시킨 데다 영우에게는 힘을 실험할 수 있도록 작은 섬 하나까지 내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영우가 가진 능력의 본질은 투시와 투과였다.
균열의 본질을 투시로 들여다보고 투과 능력으로 핵을 손에 쥐고는 폭탄처럼 사용했다.
아직 문이 생성되지 않은 게이트가 영우의 눈에는 보였다. 보이는 핵을 손에 넣어 합치거나 힘을 불어 넣으면 게이트가 열리거나 사라졌다.
조직에선 열광했으나, 영우는 제 손으로 게이트를 열거나 닫을 수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왜냐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힘이 부족한 핵에 힘을 더해 주면 열리는 단순한 이치였다.
능력을 사용하는 데 흥미를 잃은 영우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직접 재하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감시자가 붙기는 했지만, 영우의 외출을 막는 이는 없었다.
포털 능력자 덕에 쉽게 섬에서 한강 주변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허공에 존재하는 게이트를 발견했다. 섬에서는 보지 못한 커다란 게이트에 영우는 호기심이 일었다. 재하에게 향하기 전 가벼운 유희 거리라 여겼다.
인식 저하 능력을 갖춘 감시자 덕에 쉽게 게이트에 접근했고, 두 개의 핵이 보이기에 가지고 놀았다. 아직 흐릿한 핵에 가지고 있던 다른 핵을 합치자 빠르게 색이 변했다.
두 개의 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영상을 통해 보았던 재하의 동생과 협회 대표 에스퍼가 게이트에 들어갔다. 재하가 아닌 재하의 가족을 본 것만으로도 반갑고 기뻤다. 영우는 제 감정이 생소하면서도 재밌게 느껴졌다.
게이트를 지켜보는 건 지루한 일이어야 했는데 마냥 즐거웠다. 한참 만에 핵 하나가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핵마저 사라졌다. 이후 협회 대표 에스퍼가 튀어나왔다. 잔뜩 지쳐 보이는 남자의 상태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재하의 동생도 나오겠지 싶어 지켜보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재하가 나타났다.
“재하.”
그 한마디에 감시자가 급히 영우를 붙잡았다. 영우 역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설 생각은 없었다. 협회 대표 에스퍼가 재하를 끌어안는 걸 바라보는 영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게이트 안에서 재하의 동생이 튀어나왔다. 그의 옷이 찢겨 있었고, 그걸 본 재하가 펄쩍 뛰며 앞을 가로막았다. 재하는 언제나 곤란한 사람을 지키려 했다. 그런 재하가 좋았다.
“곧 데리러 갈게, 재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