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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과거에 두고 온 미래 Ver.4
외전 4. 권해일
A급 에스퍼 권해일. 발화 능력자.
권해일은 고등급 에스퍼임에도 한동안 전담 가이드가 없었다. 가이드의 숫자가 항상 부족하기는 했어도 협회 대표 에스퍼인 권해일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권해일은 항상 협회 소속인 가이드들에게 돌아가며 부족한 가이딩을 받았다.
실상은 대다수의 경우 권해일에게 가이딩 효율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까지 전담 가이드가 될 만한 이를 만나지 못했다.
가이드의 인권이 땅에 떨어진 때. 제아무리 권해일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아니, 올바른 이였다.
부족한 가이딩에도 권해일은 모든 가이드를 정중하게 대했다.
힘과 권력에 취한 다른 에스퍼들과 달리 권해일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임무를 이행했다. 누군가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권해일은 망설임 없이 힘을 가진 자의 의무라고 답했다. 대성이 써 준 시나리오라 할지라도 신뢰감을 주는 정직한 미소에 호감을 주는 미남의 한마디는 언제나 묵직했다.
* * *
권해일은 가이딩에 갈증을 느껴 왔다.
저급한 말로 가이드를 조롱하는 에스퍼의 대화에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깊은 관계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효율을 바라며 동의하에 관계한 적도 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가이딩 효율로 탈력감만 커졌다. 무엇보다 마음 없는 잠자리는 공허함만 가져왔다.
손을 잡는 걸로 충분했다. 신사 권해일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능력은 수호자 주도준이 월등했지만, 에스퍼 대표를 뽑으라면 가이드를 포함한 대다수가 주저 없이 권해일의 이름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많은 양의 임무를 소화하는 권해일은 언제나 최전선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수호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주도준과 마주치고는 했다.
언제나처럼 눈인사를 주고받은 권해일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불길을 내며 뛰어들었다. 주도준은 능숙하게 권해일의 사각지대에 방패 대용으로 방어 막을 세웠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계단 대신 사용할 방어 막을 만들기도 했다.
능력의 남용에도 주도준은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던전 숲을 불바다로 만든 권해일이 지친 얼굴로 돌아왔을 때, 주도준은 느긋하게 포션을 홀짝이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하나 드릴까요?”
“호의에 감사드리나 괜찮습니다.”
“하긴. 포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테니까요.”
아무리 던전에서는 힘을 사용할 때 제약이 덜하다고는 하나 이 정도 규모를 불태우는 일은 에스퍼를 지치게 했다.
“가이딩이 필요해 보이시는데 빌려드려요?”
손에 든 작은 포션을 권하듯 제 가이드를 빌려주겠다는 주도준의 태도에 권해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간해선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권해일이 드물게 드러낸 감정이었다.
“설마 가이드를 이곳까지 데려온 겁니까?”
“던전 안은 아니고요. 입구에 대기 중이니 안전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가이드를 위험한 던전에 데려온 게 아니란 말에 권해일의 찌푸려진 얼굴이 조금 펴졌다.
“전 괜찮습니다. 협회로 돌아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협회에선 2단계도 잘 안 해 주잖아요. 여기서 하고 가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시간제한도 없으니 하고 가세요.”
감정을 갈무리한 권해일은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돌아온 답은 가볍다 못해 저속했다.
가이드를 물건이라도 되는 양 함부로 다루고 빌려주는 주도준의 태도는 권해일을 불편하게 했다. 일전에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주도준의 제안에 응했다가 난잡한 침실 상황을 목격해 버린 이후로 더욱 그러했다.
* * *
가이딩이 부족한 권해일은 점점 예민해지는 신경을 감추고자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졌다. 고통은 인내하는 것이 당연했고,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센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B급 에스퍼가 기약 없이 가이딩을 기다리며 겪는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해일 에스퍼, 가이딩 시간 됐어요.”
“네, 오늘은 얼마나 가능합니까?”
“세 시간씩 세 명 대기 중입니다.”
그중 하나를 양보하면 저 B급 에스퍼가 숨통이 좀 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권해일의 걸음을 느리게 했다. 권해일의 시선이 가이딩 부족 현상을 겪는 에스퍼에게 머문 걸 본 안내원은 급히 그를 끌어당겼다.
“아홉 시간이라고 해 봤자 수면 시간 전부 투자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두통 좀 가시는 수준인 거고요. 내일 합동 사냥 가실 거면 최소 여덟 시간 이상 꼭 회복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제대로 가이딩 받겠습니다.”
남을 배려하기엔 더 큰 일이 매일 권해일 앞에 놓여 있었다.
다음 날 휴식 시간까지 모조리 가이딩에 매달리고 나서야 정상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근 양 애매하고 느린 가이딩은 권해일을 지치게 했으나 이렇게나마 정상 컨디션을 찾을 수 있어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갈수록 비효율 게이트의 에스퍼 참여율은 줄어들었고, 권해일의 일은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제 밥그릇을 챙기는 에스퍼들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흐읏…… 큭…….”
그러나 아무리 참을성 강한 권해일이라도 못 견디게 힘든 날이 있었다.
연달아 게이트를 공략하고 돌아오는 길, 돌발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수를 도심에서 잡는 건 남아 있는 마나를 모조리 털어 낼 만큼 고된 일이었다. 게이트 두 개를 공략할 때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힘을 쓸 때마다 불순물이 뒤섞인 마나가 온몸을 갉아 댔다.
이 상태에서 단순 가이딩을 받아 회복하려면 며칠이나 걸릴지. 한숨만 나왔다. 그나마도 온전히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긴급 호출이 들어오는 마당에 휴식은 불가능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착한 센터에는 남은 가이드가 없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잦아진 게이트 발생으로 인해 다른 에스퍼들도 자주 협회를 찾는다고 했다.
“하필 오늘 한 명도 없냐…….”
급하게 가이딩을 신청해 두고 에스퍼 숙소로 들어섰다. 힘겨운 걸음을 이어 가는데 주도준이 묵고 있는 숙소의 문이 열렸다. 정말이지 피곤해서 그냥 지나가고 싶었지만, 성격상 그럴 수 없어 고개를 들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려 했다.
“안녕하…….”
“가이딩이 급해 보이시네요.”
툭 하니 내뱉는 주도준의 목소리가 느릿하니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열린 문에 기대서는 나른한 움직임하며 열기가 남은 눈을 한 주도준이 자신과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보였다. 오늘따라 비웃는 것처럼 보여 감정이 좋지 않았으나 하루 이틀 볼 사이가 아니었기에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바쁜 하루였습니다. 그럼 이만…….”
“안으로 들어오세요.”
주도준은 반쯤 열린 문을 활짝 열기까지 했다. 안쪽에 얼핏 보인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권해일은 애써 시선을 내려 상대를 보지 않으며 거절했다.
“손님이 계신 것 같은데 나중에 오겠습니다.”
“저게 있으니까 초대하는 거죠. 안에 있는 가이드 빌려드릴 테니 쓰세요.”
“아뇨, 거절하겠습니다.”
“아, 제가 먼저 써서 찝찝하세요? 씻으라고 하면 되죠.”
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권해일의 팔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음에도 워낙 가이딩에 목말라 있던 권해일은 안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미약한 가이드의 기운에 이끌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주도준은 소파에 앉아 있던 이를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진 몸이 주도준의 손에 따라 움직였다. 억지로 들린 고개에 흐릿하게 뜨인 눈이 권해일과 마주쳤다. 엉망으로 젖은 얼굴, 저항 없이 마주한 까만 눈에 권해일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발갛게 부어오른 입술을 주도준이 직접 열어 보여 주었다.
“권해일 에스퍼, 특이 체질이시라면서요? 가이딩 효율이 최악이라고. 얘랑도 한번 해 보세요. 잘하거든요, 제법.”
“으…… 으응…….”
찡그린 얼굴로 주도준의 손가락을 입으로 받은 가이드는 끙끙거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도준의 손가락을 통해 가이딩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파동이 선명해졌다. 방금까지 다 죽어 가던 파동을 보인 가이드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봐요. 순진한 척하면서 손가락만 줘도 좋아 죽는다니까요. 권해일 에스퍼도 해 봐요.”
주도준은 대놓고 가이드를 권해일에게 넘겨주려 했다. 제 발로 걸을 수 없을 만큼 혹사당한 가이드가 주도준의 손에 떠밀려 권해일에게 다가왔다.
“일단 해봐요. 다른 에스퍼들은 다 좋다고 했다니까요.”
능청스러운 권유에 권해일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주도준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까닥이던 가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지는 순간, 권해일은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가이드 파동이 약합니다. 이런 상태면 쉬어야 합니다.”
권해일은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가이드의 파동이 애달프다고 느꼈다. 희생정신이 투철한 가이드가 자신을 위해 최후까지 가이딩을 해 줬을 때도 이것보다는 더 힘 있는 파동을 보였다.
“괜찮다니까요. 막상 해 보면 가이딩이 되더라고요.”
“아닙니다. 이분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하고 나면 계속 퍼져 잠만 잘 텐데 무슨 상관인가요.”
딱딱한 권해일의 반응에도 주도준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가볍게 응수했다.
“에스퍼는 최전선에서 마수와 싸우는데, 가이드는 잠깐 대 주고 푹신한 침대에서 계속 퍼져 있기만 하잖아요.”
“아닙니다. 그들이 없으면 저희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쯧, 권해일 에스퍼도 참 사서 고생이시네요. 생각 바뀌면 언제든 와요.”
그리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주도준의 파동이 지나치게 안정돼 있어 권해일은 마지막 유혹을 참아 내기 힘들었다.
* * *
그날의 일은 권해일에게 계속해서 죄책감을 불러왔다.
주도준의 유혹에 겉으로는 넘어가지 않았어도 머릿속에선 그 가이드의 파동과 지친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였으나 수호자 주도준의 가이드를 빼내 올 방도가 없었다. 설령 구해 준다 한들 자신이 그 가이드를 취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때의 후회와 고뇌는 밑바닥에서 굴려졌던 D급 가이드를 구하는 일로 이어졌다.
A급 에스퍼이면서도 고작 D급 가이드를 구하는 게 능력의 전부였던, 모두의 영웅 권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