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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45화 (4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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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재하 선배랑 했을까…….”

화사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목소리였다. 연구원 쪽에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지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고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검사는 언제 끝날까요? 여자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아, 네. 점심 전에는 끝날 것 같지만, 어제 수치가 위험했던 만큼 오늘은 센터에 머물러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재하 선배가 또 가이딩 하러 와 줄까요?”

해맑기까지 한 지호의 모습에선 조금의 음습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 친구와의 점심 약속을 언급한 이후기에 더더욱 단순한 질문처럼 보였다.

“그건 허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허가요? 재하 선배가 하는 건데도 허락이 필요해요?”

지호의 말은 타당했고, 어젯밤 죽을 뻔한 에스퍼답지 않게 상냥한 말투였기에 연구원은 기밀이 아닌 선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듣는 내내 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강제성은 없는 거였네요. 그럼 걱정할 게 없겠어요.”

환한 웃음에 살포시 팬 보조개가 지호의 웃음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집착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지호의 마음에 새로운 감정이 피어나는 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눈부신 미소였다.

* * *

이른 아침.

마나 안정화 효과를 증폭시키는 아이템들로 꾸며진 가이딩실에서 해일과 재윤이 각각 다른 표정으로 빠져나왔다.

해일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지만, 재윤은 한참 부족한 가이딩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이딩실에서 자고 일어나면 한결 몸이 가볍습니다.”

이곳에서 아이템을 착용하고 밤을 보내 봐야 실제 가이딩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재윤은 불만족스러웠지만, 해일은 이렇게나마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에 매번 감탄했다. 몇 년간 해일이 겪어 왔을 피로감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템 크기만 작았어도 상시 착용하면 좋았을 텐데.’

던전 원석과 상성까지 맞춰야만 해서 더더욱 외부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자신의 미래 지식과 대성의 아이템을 최대한 끌어모아 만든 가이딩실은 비효율적임에도 가이드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까지 유일한 대안이었다. 형의 존재를 감추고 한동안 신세 질 생각이었건만, 이미 주도준의 협력으로 형의 존재가 연구소 안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거면 모를까, 공표되지 않았을 뿐 알음알음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 게 뻔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가드 겸 비서가 빠르게 오늘 일정을 읊었다.

“권해일 님, 시현 장소로 가시는 동안 확인하실 보고서는 차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찬 요청은 게이트 참여로 거절해 두었지만, 협회장님께서는 되도록 참여하시길 바라십니다.”

“그렇군요. 조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해일과 달리 재윤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마나의 잔재가 재윤을 불편하게 했다. 일전에 힘을 크게 사용한 이후 색이 변해 버린 팔은 제 색을 찾지 못했다. 날이 더워지는데도 제복과 장갑을 착용하는 이유였다.

“서재윤 씨는 좀 더 머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미래를 공유하고 함께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해일은 재윤에게 말을 높여왔다. 재하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부담스러워했을지 모르나 재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뇨, 예상보다 빠르게 형의 존재가 드러날 거 같으니 쉴 틈은 없어요.”

대중에게 에스퍼를 긍정적으로 인식시키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에스퍼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가이드의 존재를 드러내려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의 집착을 믿고 주도준이 형을 감추리라 여겼다. 그러나 가이딩 부족 현상을 겪어보지 못한 도준은 형에게 달라붙으려고는 해도 집착하지 않았다. 연구원의 요청에 별다른 저항 없이 형의 존재를 연구소에 드러내 버렸다.

‘정말이지 뭐 하나 예상대로 되는 게 없어.’

대격변의 날이 앞당겨진 것부터 문제였다.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자신의 입지가 예상보다 늦은 상황 탓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해일을 제 편으로 만든 걸로 꽤 잘 풀릴 줄 알았으나, 그 역시 지위가 높아지는 건 몇 년 뒤였다.

“보고서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서재윤 씨는 눈 좀 붙이세요.”

“하아…… 피곤하네요.”

차에 올라타면 늘 읽던 보고서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해야 할 일을 떠올리니 한숨만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바란 건 형을 지키는 일뿐이었는데 정작 감추려 했던 형의 존재가 자꾸만 수면 위로 튀어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구소가 다른 층인 데다 폐쇄적인 연구원의 특성상 아직 에스퍼 사이엔 퍼지지 않았을 거라는 기대였다.

“음…… 서재윤 씨, 미리 말해 두는데 이미 끝난 일이라 지금 움직여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예? 갑자기 무슨…….”

“재하는 무사합니다. 제 발로 걸어서 숙소로 돌아갔고, 지금 휴식 중이라고 합니다.”

형이 언급되자 풀어져 있던 재윤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해일이 보던 보고서가 재윤에게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들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뺏고 싶은 걸 참아 낸 재윤은 감정마저 삼켜 냈다.

“거기에 뭐가 쓰여 있든 형은 안전하다는 거, 이해했으니까 보여 주든지 말하든지 하시죠. 다 뒤집기 전에.”

해일은 말을 하는 대신 보고서를 내밀었다. 건네받은 보고서에는 바쁜 그들을 위해 중요 내용에 표시가 돼 있었다.

, , <가이딩에 의한 안정화>

평소보다 두툼한 보고서 뒤로는 가이딩에 관한 연구소 측 테스트 결과와 모든 각성자를 대상으로 테스트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까지 붙어 있었다.

그것들만 빠르게 살폈는데도 이미 재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스스로 폭주 위험에 접어든 에스퍼를 찾아가 능력을 드러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형.”

밤새 가라앉힌 마나가 일렁이며 기세가 거칠어졌다. 운전 중이던 가드가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할 만큼 거칠어진 파동에 해일은 그가 아는 정보를 최대한 끄집어냈다.

“봐서 알겠지만, 재하가 살린 건 견지호 에스퍼입니다. 서재윤 씨가 재하를 보호하는 데 있어 염두에 뒀던 인물 아닙니까.”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건넨 해일의 말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이미 끝난 일에 화를 낸다 한들 바뀌지 않았다.

형이 살린 에스퍼는 자신이 처음에 점찍어 두었던 견지호였다. 폭주할 만큼 힘을 남용한 게 의아해 자세히 살피니 예상보다 높은 등급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에스퍼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치자 견지호의 외형과 공간 이동이라는 눈에 보이는 능력을 내세우려 등급을 높게 책정한 듯했다. 실생활에 유용한 능력이다 보니 짧은 기간 동안 여기저기 불려 갔던 내용이 줄줄이 이어졌다.

“국회 의원 친인척 방문까지 불려 갔다고?”

공간 이동 능력자를 사적으로 써 댄 흔적에 재윤이 기막혀하자 해일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서재윤 씨. 제가 신경 써야 했는데.”

“아뇨, 당신이나 저나 죽을 만큼 바빴으니 이건…… 협회장이 미친 거죠.”

던전 안이 아닌 곳에서 에스퍼가 힘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사리사욕을 위해 에스퍼의 능력을 이용했다. 다만 이렇게 빨리 폭주 위험으로 격리실에 갇히고 구역 폐쇄까지 간 건 등급 오류 때문이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격이었다.

“하아……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네요.”

형을 위해 미래를 바꾸는 데에만 신경 쓰는 사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조심스럽게 능력에 접근했어야 할 견지호가 택시처럼 여기저기 불려 다녔고, 이영우는 폭탄 살인마가 돼서 사라졌다.

이영우 쪽은 추적한 결과 예상대로 빌런 조직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중간에 꼬리가 끊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찾으려면 자신이 가진 기억으로 찾을 수 있지만, 당장 더 급한 일이 수두룩했다.

손 닿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게 어그러지고 빠르게 진행됐다.

게다가 기대했던 이천오마저 속을 썩였다. 대격변이 왔으니 곧 각성하리라 여겨 형의 가드로 붙여 둔 이천오는 여전히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일반인이라 해도 형이 폐쇄 구역으로 향하는 걸 막지 못한 건 용납이 안 됐다. 최소한 보고라도 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윤은 급히 폰을 찾았으나 어제 시현 중 부서졌던 게 떠올랐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재윤은 당황스러웠다.

형을 지키겠다고 돌아와서는 정작 형의 안위를 가장 나중에 접하는 현재 상황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답답함에 이를 가는 재윤에게 해일이 먼저 제안했다.

“서재윤 씨, 오늘은 재하를 만나러 가세요. 오후 스케줄은 제가 맡겠습니다.”

무척이나 달콤한 제안이었으나 재윤은 지금이야말로 서둘러야 할 때임을 알았다.

“아뇨, 당장 오늘부터 가이드에 대한 정보를 풀어야 해요. 이러다 어영부영 가이드에 대한 처우가 결정돼 버리면 큰일이니까요.”

* * *

하루가 가기도 전에 재윤은 계획을 실행했다.

계속해서 검증을 원하는 국민과 정계의 요청대로 능력을 시현한 후 마련된 인터뷰를 통해 가이드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재윤과 해일이 언급한 내용은 단순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에스퍼의 힘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게이트가 아닌 곳에서 힘을 사용할 시 더욱 빠르게 고갈되며 힘을 사용하는 데 제한이 생깁니다. 한데 가이드가 그 제한을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가이드는 균열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퍼는 가이드와 함께하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본인, 혹은 주변에 가이드로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가이드는 가이딩 시 감정 상태의 영향을 받습니다. 가이딩 대상과의 친밀도에 따라 효율이 높아집니다.』

마지막 말은 재윤이 처음부터 준비한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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