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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이딩 테스트
― 오늘은 가능한 많은 데이터를 확보할 예정입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니, 테스트니 뭐니 해도 결국 뽀뽀하라는 거잖아요.”
무슨 데이터를 뽑겠다는 건지도 모를 상황에 몰래카메라인가 싶었다. 재하가 도준을 노려보자 그 역시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하야, 혹시 설명 못 들었어?”
“그냥 검사만 좀 한다고 하던데. 각성 검사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그 사람들, 설명도 제대로 안 했구나.”
평소 친절한 웃음을 짓는 도준의 얼굴에 피로감이 깃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친우의 모습에 어색해진 재하가 짜증을 가라앉히며 나름 침착하게 물었다.
“이거, 왜 하는 건데?”
“음. 직접 보는 게 낫겠어. 재하야, 뒤의 모니터 봐 봐.”
도준의 말에 재하는 고개를 돌려 여러 대의 모니터를 봤다. 저 중에 뭘 보라는 건가 싶어 고개를 기울이는데 이미 잡고 있던 손 외에 비어 있던 손마저 잡혔다. 양손이 잡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있으려니 목이 다 뻐근해지려는데 불규칙하게 튀던 여러 개의 그래프 중 하나가 부드러운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 제일 큰 모니터 표시가 바뀌는데?”
“맞아. 계속 보고 있어 봐.”
도준의 말이 끝나자 재하의 양손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얌전해졌던 그래프가 다시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치솟기도 하고, 잘게 흔들리기도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 움직임에 재하 역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게 뭔데?”
“내 마나 파동.”
“마나는 너 힘 쓸 때 필요한 거라며. 저렇게 막 이상하게 움직이는데 괜찮냐?”
“안 괜찮아.”
웃는 얼굴로 안 괜찮다고 말하는 도준에 재하는 불안해졌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쳐다보는 재하에게 도준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수영하다 물 밖에 나오면 되게 처지잖아. 그것보다 배로 묵직하게 몸을 누르거든. 공기가 물이 돼서 날 누르는 것처럼.”
재하도 아는 감각이었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두통도 심하고. 전에 반에서 제일 머리 작은 애가 썼던 응원 띠 기억나?”
“와, 그거 써 봤다가 머리 터지는 줄 알았지.”
“그걸 계속 하고 있는 거같이 아파.”
“약은? 진통제 같은 거 안 통해?”
“응.”
도준이 자신에게 멀쩡한 얼굴로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계속 아픈데도 참고 있었던 건가 싶어 재하는 모니터를 다시 보면서 도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날뛰던 그래프 중 하나가 가라앉았다.
“지금은?”
“훨씬 나아.”
다시 양손을 잡자 여러 개의 그래프 중 하나가 또 느리게 변했다. 그래도 아직 몇 개의 그래프는 팝콘 튀듯 팍팍 뜨고 있었다.
“이거, 누구라도 되는 거야?”
“모르겠어. 일단 센터 직원이나 에스퍼 중에는 없는 거 같아.”
“그런데 나는 왜 되는데?”
“그걸 알아보려고 테스트하는 거야, 재하야.”
“그, 그러……네.”
무슨 원리인지 몰라도 자신과 손을 잡으면 도준의 상태가 안정되는 걸 확인하니 물러설 수도 없었다.
― 준비되셨으면 다른 부위 테스트 진행해 주세요.
태연하기만 한 연구원의 목소리에 모니터를 보던 재하가 발끈했다.
“아, 진짜. 제발 성별만이라도 다르게 안 되는 거냐고.”
― 이건 어디까지나 테스트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근데 얘는 친구잖아요. 맨날 보는 애랑 무슨 뽀뽀를 해요.”
― 처음 만나는 사람과 악수하고 키스하는 것보다는 익숙한 사람이 낫지 않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국가를 위해서라며 열성적이던 연구원의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변했다. 이에 재하는 양손을 털고 일어섰다.
“궤변이다! 누가 친구랑 포옹하고 키스를 해! 못 해! 안 해!”
― 친구보다는 가족이 더 편하실까요?
“뭐?”
― 동생분을 불러 드릴까요?
“아악! 그게 아니잖아요!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해!”
갑자기 가족을 건드리는 연구원의 말에 재하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왜 갑자기 남의 동생을 건드리는 건데?”
“그건 네 동생도 에스퍼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 어?”
도준의 덤덤한 말에 당장이라도 검사실을 뛰쳐나갈 기세이던 재하가 멈춰 섰다. 평온하기만 한 도준의 반응과 반대로 날뛰는 그래프의 파동이 재하의 눈에 들어왔다.
“재윤이도 지금 꽤 힘들걸. 나보다 더 힘 쓰고 다니잖아.”
“이거…… 에스퍼는 다 이러는 거야?”
“연구원들 말에 따르면 그래.”
모니터의 들쑥날쑥한 그래프와 재윤 역시 마찬가지 상태라는 말에 재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생각이 많아진 재하가 다시 의자에 앉자 도준 쪽에서 먼저 연구원에게 제안했다.
“시간당 가이딩이 얼마나 되는지 체크해 보는 건 어떨까요?”
“가이딩?”
“아, 그것도 설명 안 했어?”
도준이 핀잔을 주는 게 아닌데도 재하는 마치 기본 규칙조차 숙지 안 하고 모임에 참석한 새내기가 된 기분이었다. 뻘쭘하고 할 말이 없어 잡힌 손만 꼼지락거리자 도준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
낯선 이야기였지만, 중간중간 예시까지 들어 가며 도준이 설명해 준 덕에 이해하기 쉬웠다. 어느새 꽤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 30분째 일정한 가이딩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매일 두세 시간만 가이딩이 돼도 현상 유지가 가능하리라 예측됩니다.
“윽, 두세 시간이나?”
“일단 연구원들은 다른 접촉이 더 효율적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뽀뽀는 안 해.”
“응. 그게 아니더라도. 꼭 양방향이 아니어도 효과는 있더라고.”
“그게 뭔…….”
쪽.
갑작스레 손등 쪽을 당했다.
너무 당황해서 손을 빼낼 생각도 못 하고 얼어붙은 재하를 본 도준이 눈짓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손등에 닿은 부드럽지만 소름이 끼치는 감각에도 꽉 잡힌 손을 뺄 수가 없어 재하는 일단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하게 툭툭 튀던 그래프가 꽤 낮은 움직임을 보였다. 눈으로 직접 수치가 변하는 걸 보니 연구원이 왜 테스트를 더 해 보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가긴 갔지만.
“……이거, 그만해도 되겠냐?”
“응. 힘들면 여기까지만 해.”
도준의 대답에 재하는 망설임 없이 몸에 붙은 패치를 떼고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마음의 거리만큼 최대한 떨어진 재하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나타난 연구원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손, 손을 씻어야 해.”
곧장 화장실 표지를 찾아 뛰어든 재하는 비누를 잔뜩 짜내어 손등을 북북 문질렀다. 더러워서라기보다는 민망한 감촉이 부담스러워 지워 내고 싶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우, 씨. 깜짝이야.”
언제 따라왔는지 가드 이천오가 도림을 안고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빠르게 손을 씻은 후 도림을 건네받고 나서야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네, 좀. 정신이 피로하네요. 쉬어야겠어요.”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방금 겪었던 일이 무슨 일인지 아직 와닿지 않아 일단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가이딩이고 가이드고 간에 자신도 각성했다는 의미인가 싶어 힘을 써 보려 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에스퍼와 닿아야만 쓸 수 있는 힘인가 싶기도 하고, 아직 명확하게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묻기 위해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뛰어나와도 되나 약간 후회도 됐다. 순한 얼굴을 하고 고통에 시달렸다고 말하던 도준을 떠올리자 고작 입술 좀 닿았다고 손을 벅벅 씻은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에스퍼라면 누구든 힘들 거란 정보가 재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항상 진중한 얼굴로, 눈이 마주치면 건실한 웃음을 지어 줬던 해일도 힘들 거고, 일전에 잠시 들렀다 갔던 재윤 역시 힘들 거라고 했다.
“재윤이 그놈은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형제끼리 손잡는 게 민망해서 말 안 했나?”
앞으로 에스퍼를 만나면 일단 쎄쎄쎄 하듯 손부터 잡아 줘야 하나? 한데 왜 하필 자신일까? 몰아치는 의문에 재하는 두통이 다 이는 것 같았다.
“아오, 머리가 복잡하네.”
* * *
민망하고 어색했던 가이딩 테스트를 한 이후, 재하는 재윤과 해일뿐 아니라 도준 역시 보기 힘들어졌다. 정확하게는 실제로 보기 힘들어졌다.
“오빠! 오빠랑 동생 오빠 TV에 나와!”
“어, 도림아. 도준이랑 재윤이가 나오네.”
영상에는 해일도 자주 등장했지만, 도림은 그를 모르다 보니 도준과 재윤에게만 집중했다.
새로 생긴 오픈형 게이트나, 공략을 위한 시현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에스퍼들의 다양한 퍼포먼스가 국민의 이목을 끄는 건 당연했다.
‘저렇게 힘을 쓰면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표정을 보면 완전히 신났는데?’
도림이 자꾸만 TV로 다가가는 통에 무릎에 앉히자 더 신이 나 폴짝거렸다. 그 탓에 화면 보기를 포기한 재하는 핸드폰으로 영상과 댓글을 확인했다.
여전히 댓글에선 에스퍼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과 외모 찬양이 이어졌다. 다행히 도준의 외모도 상당히 좋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다른 에스퍼와 같은 검은색 제복 차림이었지만, 금색 문양이 들어간 케이프를 둘러 좀 더 차려입은 것처럼 보였다. 단정한 이미지에 방어 막을 사용하는 도준에게 잘 어울렸다.
“메이크업도 받은 거 같고. 머리는 누가 해 준 거려나. 나도 하고 싶네.”
낮에는 만날 수 없지만, 어차피 밤에 자다 보면 언제 왔는지 옆에서 자는 도준이었다. 다른 침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옆에 와서 낑겨 자는 도준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중간에 깰 때마다 손을 잡은 걸 보며 가이딩이 필요해서임을 깨달았다. 어떨 때는 허리를 끌어안고 있어 식겁했지만, 뽀뽀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참다 보니 어느새 조금 익숙해졌다.
‘그런데 나만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안 그래도 잠이 늘어 낮까지 늘어지게 자는 데다 종일 도림과 놀아 주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머리를 땋아 달라고 하거나 산책을 조르거나 스케치북을 가져와 함께 놀자며 조르곤 했다. 지금처럼 도림이 내미는 크레파스를 붙잡고 같이 색칠을 하다 보면 현타가 살짝 왔다.
그러나 이런 재하의 고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한 이들로 인해 사라졌다.
하도 상황이 빠르게 흘러가 잠시 재하의 머릿속에서 잊혔던 존재.
개호. 견지호가 쓰러져 센터로 호송되었다는 소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