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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서 있는 건 도준이 아닌 재윤이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잠깐 시간이 나서 들렀어.”
『시간이 부족해요. 각성했다면 망설이지 마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영상 속 목소리와 앞에 서 있는 재윤의 목소리가 겹쳤다.
어차피 영상은 녹화본에 재방송까지 여러 번 우려먹는 중이었다. 재윤이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이상하리만치 어색했다. 방송용으로 세팅된 반 깐 머리라든가 눈매를 더 강조한 메이크업이 낯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재하를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야, 너, 이 상처는 또 뭐야?!”
문을 연 채 들어오지 않고 서 있기만 한 재윤의 태도에 재하 역시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쳐다만 보던 상황이었다. 못 보던 상처를 발견한 재하는 단숨에 재윤과의 거리를 좁히며 드러난 이마를 살폈다. 평소 앞머리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매끈한 이마 한쪽에 손가락 길이만 한 긴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다쳤어? 이미 흉 진 거 아냐? 왜 이런 큰 상처가 생긴 건데?”
재윤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건드리던 재하는 손끝에 느껴지는 선명한 흉터 자국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오, 이거, 엄청 아팠겠는데.”
“형, 괜찮아. 안 아파.”
재하의 걱정에도 재윤은 느른한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재윤의 반응에 재하는 이상함을 느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재윤의 태도가 동생답지 않았다.
리조트 숙소에 있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재윤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준의 존재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침착하게 자신과 눈을 맞춘 재윤의 미지근한 반응이 이상했다.
재하는 조심스럽게 물으려 했던 주제를 툭 던졌다.
“지금 도준이랑 같이 있는데, 걔가 여러 번 구해 줬고…….”
“응, 알아.”
도준의 이름만 들어도 경계심을 드러내던 재윤이었다. 반응을 보고자 충동적으로 꺼낸 말에 정작 재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 위화감에 재하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지자 재윤이 급히 붙잡으려다 멈칫했다.
“왜 안 잡아?”
“어?”
불과 한 달 전 일이었지만, 재윤은 자신을 붙잡고 밀어내지 말라며 애원했었다. 도준을 만나지 말라며 경계하고, 자신을 지키겠다며 온갖 해괴한 짓을 해 댔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자신과 가까이 붙어 있으려 했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줄었지만, 눈이 자신을 좇았고, 가까이에 있으면 확인하려는 듯 팔이나 어깨가 닿아 있고는 했다.
“너 또 회귀인가 뭔가 한 건 아니지?”
“왜 그런 생각을 해? 아, 내 모습이 달라진 거 때문에 그런 거야? 이거 다 코디랑 헤어 담당이 붙어서 해 준 거야.”
“그런데 왜.”
재하가 다시 손을 뻗자 이번에도 얌전했지만, 재윤은 자신의 얼굴에 손이 닿자 눈을 질끈 감으며 무언가 참는 기색이었다.
“뭔데?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도 무슨 능력 생겼냐? 내가 만지면 막 따끔따끔해? 블랙 피그 만지고 와서 그런가?”
당황한 재하가 손을 옷에 마구 문지르자 재윤이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재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까닥였다.
“뭐냐? 왜 피해?”
“아냐, 그런 거. 그냥 형이 잘 지내나 보러 온 거야. 혹시 불편한 건 없나 해서.”
“나야 놀고먹는 중인데, 너, 왜 자꾸 날 피하냐고.”
재윤의 뒷걸음질에 재하는 발을 들어 열려 있는 문을 차서 닫아 버렸다. 입으로는 툴툴거려도 행동은 온건파인 재하의 거친 행동에 재윤이 놀랄 틈도 없이 재하가 바싹 다가왔다. 그러곤 재윤의 얼굴을 비롯해 팔이며 몸을 마구 만져 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머리와 팔을 주물럭거리다 제복까지 들추려 했다.
“혀, 형?”
“가만있어 봐. 우 씨, 팔이 더 단단해진 거 같은데? 너, 헬스 다니냐?”
“잠깐, 형. 말로 해.”
“말은 무슨. 너 이마에 그런 상처가 생길 동안 한 번도 말 안 해 놓고.”
재윤이 변명할 틈도 없이 재하의 손에 빠르게 제복이며 셔츠가 흐트러졌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재윤이 망설이는 사이 거의 반쯤 벗겨지다시피 한 상태에서 재하의 눈이 샅샅이 훑었다. 다행히 한 달 전 보았던 옆구리의 긴 흉터 자국과 뒤통수의 큰 상처 자국을 제외하면 새로 생긴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더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질색하면서 피하는데?”
“피한 거 아니라니까. 그냥 좀 바빠서. 바로 가야 해서 그랬어.”
“하긴. 너, 엄청 바빠 보이더라.”
재하가 순순히 인정하며 한 발 물러서자 재윤이 흐트러진 옷을 적당히 추스르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야, 그렇다고 바로 가려고?”
“응. 진짜 얼굴만 보고 가려던 거였어.”
“칙칙한 형님 얼굴 봐서 뭐 하려고 시간도 없는데 굳이 들르고 그래.”
툴툴거리면서도 재윤의 상태를 충분히 살핀 재하는 안심한 채 태연하게 물었다.
“얼마나 바쁜 건데? 잠깐 앉았다 갈 시간도 없이 바로 가냐?”
“미안해, 형. 며칠 정신없을 거야. 형도 당분간만 숙소에서 나가지 말고 있어.”
“며칠 정도야 별거 아니지만…… 너,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툭 던져진 재하의 걱정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재윤이 멈춰 섰다. 그리고 이어진 건 짧은 한숨이었다. 동생 밥 걱정했다고 지금 한심한 취급 받은 건가 싶어 재하가 발끈하려는데 어느 순간 재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윽! 이 타이밍에 헤드락 거냐!”
“형이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내 걱정은 더더욱.”
재윤을 밀며 버둥거리던 재하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어색하게 팔을 내렸다.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재윤의 목소리가 하도 애절해서 재하는 장난도 칠 수 없었다. 게다가 재윤의 품에 얼굴이 닿은 재하는 머리를 누르는 게 아닌, 가볍게 안긴 상태임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아직 딱딱한 제복에서 나는 새 옷 냄새에 옷 갈아입으러 왔다 잠깐 들른 건가 싶기도 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형의 안전을 확인하러 들러 준 동생을 의심하고 살펴본 게 민망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재하는 계속 마음에 걸렸던 일을 다시 꺼냈다.
“너, 도준이 싫어하잖아. 신경 쓰이면 방 옮길게.”
“아냐. 주도준이 형을 지켰다는 거 들었어. 함께 있는 편이 나아.”
“엥? 진짜? 너, 완전 싫어했잖아.”
재하가 슬쩍 몸을 떼며 얼굴을 마주하자 등을 감싸 안고 있던 재윤의 팔이 순순히 풀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너무 예민했다는 거 인정해. 형을 지켜 주는 사람을 내칠 이유가 없잖아.”
재윤이 한발 물러서자 재하가 망설이다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도준이랑 계속 친구 해도 되냐?”
“내가 하지 말라면 안 하려고?”
“당장은 힘들고. 그래도 좀 덜 만나려고 노력은 하겠지.”
“혹시라도 그럴 일이 생기면 형이 망설일 필요도 없게 해 줄게. 그런 생각은 이제 하지 마.”
재윤이 말하는 해결 방법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인 것 같아 재하는 섬뜩해졌다. 재하가 재윤에게 무슨 방법을 쓸 건지 묻기도 전에 수신기에서 호출음이 들려왔다.
“아, 이건 진짜 급한 거야. 가 볼게, 형.”
“어어, 그래. 잘 다녀와.”
서둘러 밖으로 나온 재윤의 등 뒤로 재하의 배웅이 이어졌다.
“몸조심하고! 다치면 우리만 손해야!”
자연스럽게 재윤 혼자의 일을 우리로 엮는 재하의 외침에 재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재윤은 손목까지 꽉 채운 장갑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하의 손이 이마에 닿는 순간부터 재윤은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회귀 전에도 생각했지만, 형에게 받는 가이딩은 다른 가이드에게 받는 것과 결이 달랐다.
닿은 곳에서부터 상냥하게 감싸 오는 봄바람 같은 가이딩은 열에 들끓는 몸을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이대로 얌전히 형의 손길을 받고 싶을 만큼 간절해졌다. 이내 떨어지는 손에 게걸스럽게 달려들고 싶은 욕망이 튀어나오려 했다. 잊고 있던 감각은 한순간의 가이딩에 민낯을 드러내려 했다.
몇 번이고 각오하지 않았다면 붙잡을 뻔했다. 형의 손이 팔을 붙잡고 셔츠를 끌어 올려 흉터 자국을 더듬는 순간 이성을 날리지 않은 건 형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인내심을 모조리 끌어 올려 끌어안는 걸로 멈출 수 있었다. 재윤의 예상과 달리 깨어 있는 재하에게선 옷을 사이에 두고도 은은한 가이딩 효과가 있었다.
지금도 뒤돌아 재하에게 달려가 피부를 샅샅이 훑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아 내며 재윤은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재윤을 따라붙던 가드가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그, 옷차림이…….”
가드가 볼 때 서재윤은 에스퍼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였다. 보이지 않는 한강 게이트에 나타난 재윤은 인명 구조를 시작으로, 언론 노출과 고위직과의 만남에 적극적이었다. 대성에서 대표로 미는 권해일보다 더 눈에 띌 정도였다.
매시간 잡혀 있는 숨 막히는 스케줄에 일반인 보조들은 하루 만에 나가떨어졌다. 그들을 대신해 비서 겸 매니저 역할까지 떠맡게 된 가드는 재윤의 흐트러진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대충 정리하면 돼.”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재윤의 귀 끝이 붉게 물든 걸 봐 버린 가드는 최대한 모른 척 맞장구쳤다.
“그, 그렇죠. 시간도 서두르면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작 가드가 묻고 싶었던 건 어째서 형을 만나러 간다던 재윤의 옷차림이 엉망진창이 됐냐는 거였지만, 재윤의 반응을 보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싸웠다고 보기엔 에스퍼인 재윤이 일반인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느낌이라 답을 듣는 게 오히려 곤란해질 것 같았다.
“다음 주 스케줄은 정말 비워 두실 겁니까? 차라리 이번 주 급하지 않은 건을 다음 주로 미루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이번 주에 최대한 잡아. 잠은 안 자도 상관없으니까 홍보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다 받아 둬.”
“지금도 충분히 과해서 이대로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의욕적인 재윤의 모습은 가드의 눈에 인기와 과시욕 넘치는 신입 에스퍼처럼 보였다. 남이 저를 어떻게 보든 재윤은 이마의 상처를 누르며 이미 사라진 가이딩의 잔재를 찾아내려 애썼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순식간에 무장 해제 시키는 감각을 쫓게 됐다.
‘이번 토벌 작전만 끝나면 가이딩실에 처박힐 거니까 그 뒤에 보면 돼.’
지금은 가이딩이 절실해서 참기 힘든 것이리라. 그렇게 판단한 재윤은 지금보다 더 바쁘게 달릴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