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13. 동생이 달라졌어요
재하가 보인 죄책감에 직원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블랙 피그 고기 자체는 몸에 좋으니까요. 다만, 일반인이 섭취할 때 중화 처리를 하면 돼요.”
“중화 처리요? 그거, 어려운 건가요?”
“아뇨. 연구실에 가면 남아도는 게 중화 처리 시설인 걸요.”
직원은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 중 상당수는 일반인에게 과민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굳어 있던 재하의 얼굴이 안심하면서 풀리자 눈만 굴리던 도림이 재빨리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 도림아?”
“나 저거 안 먹어. 오빠가 해 준 거 먹을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먹이는 도림을 재하가 안아 들었다. 직원과 눈이 마주친 재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하하, 얌전한 애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떼를 쓰는지 모르겠네요.”
평소 얌전하던 도림이 떼를 쓰기 시작하니 방도가 없었다. 재하가 도림을 안고 달래자 결국 울먹임이 서러운 울음으로 바뀌었다. 당황한 재하가 식당 밖으로 나가려는데 죽 지켜보던 연구원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요. 애는 다 울면서 크는 거니까.”
어머니뻘로 보이는 여성의 다정한 조언에 재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도림인 잘 안 울거든요. 갑자기 왜 이렇게 떼를 쓰고 우는지 모르겠네요.”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요.”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은 재하가 도림을 토닥이는데 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이 그릇을 들고 일어나며 말을 얹었다.
“아이도 다 알거든요. 자신이 떼를 써도 되는지 안 되는지.”
우는 도림의 등을 두드리던 재하가 멈칫했다. 연구원의 말이 재하의 마음 한가운데를 쿡 누르면서 뭉클한 감정을 불러왔다.
“하지만…… 도림인 도준이랑 있을 땐 잘 안 울었어요.”
“그동안 이런 적 없었다면, 욕심부리면 안 되는 환경이었을지도 모르죠. 오빠분이 그만큼 아이를 편안하게 잘 대해 왔다고 생각해요.”
“예? 전 그냥 얘 오빠 친구일 뿐인데요.”
연구원의 조언이 사실이라면 자신을 무척이나 따른다는 뜻이었지만, 그 말을 뒤집어 보면 도림을 성심껏 돌봐 온 도준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도준을 모르는 이가 그의 노력을 오해하는 게 불편해진 재하는 연구원에게 단호하게 답했다.
“도준이, 아이 오빠가 그만큼 잘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는 건 제가 부족한 거겠죠.”
“어머, 점수 좀 따 보려다가 미움받은 건가요?”
천연덕스러운 연구원의 웃음에 재하는 당황했다. 왜 자신에게 점수를 따려는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이쪽 사정을 모른다 해도 자신을 위해 해 준 말에 괜히 날을 세운 게 미안해졌다.
“아, 아뇨. 어…… 칭찬 감사합니다.”
“히잉…… 톡톡 고기…….”
“어, 그래. 도림이, 고기 먹고 싶었구나.”
코맹맹이 소리로 울먹이는 도림은 귀엽기까지 했다. 당장 집에 가서 꽝꽝 얼려 둔 블랙 피그를 가져오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렇다고 안전을 위해 들어온 센터에서 함부로 나갈 수는 없었다.
재하는 말을 걸어 준 직원과 연구원을 향해 물었다.
“혹시 여기서 블랙 피그를 구할 수 있나요?”
“블랙 피그라면 최근 사냥한 적이 없어서 고기는 없을걸요.”
“맞아요. 고기는 없지만, 연구실에 살아 있는 샘플은 있는데. 보실래요?”
“네? 샘플이요?”
“오빠, 나 갈래.”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붙잡고 조르는 도림의 행동에 재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최근 바빠서 연락이 잘 안 되던 재윤에게 톡을 보내자 다행히 쉬는 중이었는지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연구소에 블랙 피그 보러 가도 되나?
거기에 있는 건 새끼니까 괜찮아.
“오, 웬일로 답이 빠르네. 재윤이가 가도 된대요.”
지금까지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던 이천오가 재하의 말에 수긍했다.
“예, 연구소라면 숙소보다 더 철저하게 통제되는 곳이니까 안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여러 번 확인하는 자신의 태도에 권해 준 연구원의 표정이 미묘해졌지만, 어린 도림과 낯선 곳에 가는데 이 정도 확인은 필요하지 싶어 재하는 오히려 당당하게 굴었다.
* * *
연구원을 따라 도착한 연구소의 규모는 상당했다. 넓은 리조트의 지하 한 층을 전부 사용하는지 어디를 봐도 전부 연구 시설뿐이었다. 규모에 기가 질린 재하는 뒤늦게 걱정을 내비쳤다.
“저기, 저희가 이런 걸 봐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서재하 씨의 편의를 봐주라는 지시가 있었거든요.”
이유 있는 친절이었나 싶어 조금 불편해지려던 찰나, 연구원이 단단해 보이는 벽 앞에서 분주히 손을 놀렸다. 그러자 단단한 벽이 열리며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드러났다. 바닥은 흙이었고, 일부 식물도 심겨 있었는데 그 사이로 살아 있는 블랙 피그를 볼 수 있었다.
꾸?
“미…….”
“귀여워!”
재하의 입에서 미쳤다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도림이 먼저 귀엽다며 방방 뛰었다.
한쪽 유리 벽 너머로 아직 새끼인 작은 블랙 피그가 짧은 다리로 빠르게 다가왔다. 익숙한 동물 형태의 마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귀여울 줄은 몰랐다.
유리 벽 너머로 도림이 손을 내밀자 블랙 피그의 고개가 기울며 머리 위의 꽃이 흔들렸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재하는 낯선 장소라 긴장하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꺼내 도림의 모습을 남기려 했다. 연구소다 보니 촬영을 자제해달라는 연구원의 말에 아쉬워하며 열심히 눈으로 도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만져 보고 싶어.”
“안 돼, 도림아. 위험해.”
머리의 꽃이 독초라는 걸 기억한 재하가 안 된다고 하자 연구원이 웃으며 문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들어가서 만져 보셔도 돼요.”
“하지만 블랙 피그의 머리에 핀 꽃은 독초라고 들었는데요.”
재윤이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처음 블랙 피그를 잡아 왔을 때 했던 말도 사실일 것이다.
“여기 샘플은 성체가 아니라서 독이 없어요. 던전 독초를 일정량 이상 섭취하면서 성체가 되는 거라서요.”
독초 먹고 큰 돼지를 먹었던 거구나. 재하는 역시 도림에게 고기를 먹이는 건 보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도림은 새끼 블랙 피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거, 괜히 보여 준 거 아닌가.’
자신의 눈에도 너무 귀여워 도림이 푹 빠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연구원의 배려로 도림은 실컷 새끼 블랙 피그를 만질 수 있었다. 머리의 꽃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뽑히면 매우 슬퍼한다는 말에 머리를 피해 몸만 살살 만지는 착한 도림의 모습에 재하와 연구원의 올라간 광대가 내려오질 못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이제 닫아야 할 것 같네요.”
“꾸꾸야, 안녕.”
혹시나 헤어지기 싫다고 떼를 쓰지 않을까 걱정한 것도 무색하게 도림은 아쉬워하면서도 밖으로 나왔다.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연구원이 언제든 보러 와도 된다고 달래 준 덕에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똑똑한 우리 도림이.
팔불출이 된 재하가 도림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을 때, 여전히 문 옆을 지키고 선 이천오를 볼 수 있었다. 일 때문에 온 사람을 방치한 것 같아 뒤늦게 신경이 쓰였다.
“도림아, 먼저 들어갈래?”
“응, 오빠도 빨리 들어와.”
도림이 이천오를 힐끗 보고는 재하의 손을 꼭 잡았다 놓고 들어갔다. 아무래도 무표정에 까까머리인 이천오는 인상이 강해 도림으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연구소에 갈 때 돌려보냈더니 먼저 올라온 이천오의 기가 죽은 게 보였다.
“오셨습니까.”
“혹시 종일 이렇게 대기하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돌아오시는 것만 확인되면 가 보려고 했습니다.”
“음…… 혹시 뭐 좀 부탁해도 돼요?”
“네,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표정이 확 밝아지는 이천오에게 재하는 마음에 걸렸던 일을 꺼냈다.
“어제 저랑 친구가 갔던 옷 가게가 있는데요. 거기서 폭탄이 터져서 가게가 피해를 보았거든요. 물어 줘야 할 것 같은데…….”
“균열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거라면 협회에서 사고 수습 후 보상 처리까지 진행할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막힘없는 이천오의 대답에 재하는 안심했다. 마음에 걸렸던 일이 쉽게 해결되자 도림이 원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심부름일 뿐인데도 이천오는 싫은 기색 없이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중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내일 가져다주셔도 돼요. 되는 것만 부탁드릴게요.”
“아닙니다. 전부 구해 오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장함만 보면 학용품이 아닌 만년 삼이라도 가져올 기세였다. 이천오가 곧바로 자리를 비우는 걸 본 재하는 그제야 안심이 됐다. 이천오가 안전하지 않아 붙여진 가드가 아니었다는 걸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확신했다. 이천오라는 가드가 왜 저에게 부채감을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뛰어가는 걸 보니 재하 역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졸려하는 도림이 낮잠을 자는 동안 재하는 TV를 틀었다. 도림이 보던 어린이 채널을 제외하곤 전부 에스퍼와 대성 그룹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어제 봤던 것 외에도 해일과 재윤이 에스퍼의 힘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다며 시현하는 모습이 다각도로 촬영된 영상이 올라왔다.
“진짜 CG로밖에 안 보여.”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재윤은 철없는 평범한 동생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쿡 찌르면 빽 화를 내는 평범한 형제였다. 양말 짝이 안 맞아도 대충 신고 다니던 동생이 화면 속에서는 스타일링까지 받았는지 인터뷰하는 연예인 옆에서도 꿀리지 않았다. 다른 채널에선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모습도 보였다.
화면 속 재윤은 의연하고 어른스러웠다. 많은 이들 앞에서 듬직한 목소리로 연설하는 해일에 비해 조금은 미숙할지 몰라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재윤의 눈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제대로 믿어 줄걸.’
재윤은 자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중 도준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장은 보호받는 처지라 힘들었다. 재윤에게 이런 상황인데도 도준을 멀리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준에게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저를 믿고 떼를 쓰는 도림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재윤의 말을 믿지 않은 게 후회됐다.
“으…… 하지만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였는걸.”
재하는 TV 속 재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듯 혼잣말을 이어 갔다.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봐 왔던 재하는 조심성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믿고 주변을 받아들이는 성향은 언제나 그에게 좋은 사람들과 기회를 만들어 줬다.
한때 그의 동생이었고, 지금도 동생으로 여기는 재윤 역시 그런 경우였다. 한번 가족으로 받아들인 재윤을 서류상 남이 되었다고 해도 재하는 놓을 수 없었다.
“밥은 먹고 다니나 몰라. 입맛도 까다로운 애가.”
계속해서 TV에 나오는 재윤을 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채널을 돌리다 보니 토론 채널에선 대국민 사기극이 아니냐는 둥, 배우 지망생을 영입한 거라는 억측에 음모론까지 이어졌다.
“저것들이 누구를 사기꾼으로 몰아!”
재하 본인조차 믿지 못했음에도 남이 동생을 욕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당장 해당 채널에 항의 전화라도 걸기 위해 폰을 찾던 재하는 문 쪽에서 들린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카드 키를 인식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아 도준이 돌아온 듯했다.
“야, 주도준. 넌 인마 동생 밥도 안 챙기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데?”
물론 에스퍼가 된 도준이 바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재하는 평소처럼 가볍게 핀잔을 주며 문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재하는 정작 마주한 인물이 예상치 못했던 상대라 조금 당황했다.
“형.”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