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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 돼서야 눈을 뜬 재하는 어리둥절했다.
처음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낮이라는 것에 놀랐고, 이어 낯선 공간이라 당황했다. 다행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 때쯤엔 어제 에스퍼 전담 가드를 따라온 리조트라는 걸 떠올렸다.
“뭐야? 나 얼마나 잔 건데?”
핸드폰을 꺼내 급하게 재윤의 톡을 확인하니 읽씹 상태였다.
“이 새끼가. 읽어 놓고 답을 안 해?”
짜증은 나지만, 어제 본 영상을 떠올리면 정신없을 것 같기는 했다. 자신만 해도 어제의 일들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긴 잠을 자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방을 나가자 얌전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도림이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오빠, 일어났어?”
“어어, 도림아. 혼자 있었어?”
“응. 오빠, 쑥쑥 체조 해!”
“어?”
방금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도림이 재하의 손을 붙잡고 TV 앞에 섰다. 마침 어린이 프로에선 인형 탈을 쓴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노래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저런 건 아침 프로에서나 하는 거 아니었나?’
다시 보기 탓에 시간대가 무의미하긴 했다.
“오빠, 쭉쭉!”
“어어. 도림이도 쭉쭉.”
눈도 잘 안 떠지는 상황에서 재하는 도림이 원하는 대로 손을 잡고 체조를 함께 했다.
이어 종이접기까지 따라 하려는 도림을 위해 프린트된 안내지를 희생했다. 도림이 색연필을 찾았으나 있을 리 없었다. 볼펜이나마 찾아 손에 쥐여 주니 글자 하나 쓸 때마다 재하에게 보여 주며 자랑해 왔다.
“와, 우리 도림이 글씨도 잘 쓰네.”
“여기에 스티커 붙이고 싶어.”
“그러네. 스티커랑 색연필, 스케치북도 사야겠다.”
“지금?”
도림이 눈을 반짝이며 매달리자 무척 귀여웠지만, 안전을 위해 들어온 숙소였다. 제멋대로 나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재하는 일단 얼버무렸다.
“금방 구해 볼게, 도림아.”
“샤샤랑 나나두.”
“그, 그건 뭘까?”
“샤샤가 언니고, 나나가 동생이야. 꼭 둘이 같이 있어야 해.”
“알았어, 꼭 둘 다 가져올게.”
평소 도준과 셋이 볼 때는 항상 준비돼 있어서 그런지 뭔가 조르는 적이 없었던 도림이었다. 그랬던 도림이 연신 조르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니 귀엽기만 했다. 아직 잠이 덜 깨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재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 배고파.”
“도준이랑 아침 안 먹었어?”
“아침에 막 무서운 아저씨들이랑 공부한다고 갔어.”
무서운 아저씨면 아마 구기철이나 김병태가 도준을 데려간 모양이었다. 에스퍼가 된 도준에게 관련 정보라도 전하려는 건가 싶어 수긍은 갔지만, 당장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도림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애 밥부터 먹여야지. 뭐가 그리 급해서.”
투덜거리던 재하는 테이블에 놓인 과일 바구니의 과일이 장식용이 아님을 깨닫고 바나나를 챙겼다.
“도림아, 일단 이거 먹고 있어 봐. 금방 씻고 나올게.”
“응!”
아무래도 리조트 안을 돌아다니려면 사람 꼴은 해야 할 것 같아 급히 욕실로 향했다. 어제 먼지 폭풍에 휩쓸리고 뛰어다니느라 찝찝하기도 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런 몸으로 잘도 대낮까지 잠들었구나 싶었다.
“윽, 이틀 연속 야작 했을 때보다 심한데.”
욕실에 들어가니 까치집이 된 머리에 꼬질꼬질한 얼굴이 가관이었다. 이런 몰골을 보고도 웃어 준 도림은 천사가 분명했다.
“어휴, 빨리 씻고 도림이 밥 먹여야지.”
욕실에 들어가니 김병태가 면박까지 주던 CCTV가 보이지 않았다. 의문은 들었지만, 안심하고 씻을 수 있었다.
옷장에 새 옷도 있어 깔끔해진 재하는 도림의 손을 잡고 가뿐하게 방을 나섰다.
“일어나셨습니까.”
“으악! 까, 깜짝이야.”
문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말을 걸어오자 놀란 재하가 도림을 감싸며 뒷걸음질 쳤다. 시커먼 그림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장신의 남자였다.
“누……구세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서재하 님의 전담 가드 이천오입니다.”
“네? 저 에스퍼 아닌데요.”
“예, 저도 에스퍼는 아닙니다.”
재하의 경계에 상대는 허리를 숙이며 센터 출입 카드를 내보였다. 재하도 어제 숙소에 들어오며 챙겨 받은 카드였기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전담 가드라니…… 숙소는 안전한 거 아니었나요?”
“물론 안전합니다. 가드 임무보다는 센터 안내자로 여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천오는 에스퍼 가드들 사이에서 재하를 지키지 못한 일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숙소에서는 재하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면서도 재하의 가드를 자처해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그건 너무 인력 낭비인 것 같은데…….”
“오빠, 배고파.”
“아, 맞다. 혹시 여기 식당이 있나요?”
“네. 레스토랑과 직원 식당 중 편하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천오가 한발 앞서 움직이자 재하 역시 뒤를 따랐다. 갑작스러운 가드의 존재가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천진난만하게 노래를 부르는 도림으로 인해 웃을 수 있었다.
“꼬르륵~ 꼬르륵~”
“이런, 도림이 많이 배고프겠네. 밥 먹으러 가자.”
“응! 나, 많이 먹을래.”
“에구, 미안해. 앞으론 배고프면 오빠 깨워.”
엘리베이터 옆의 배치도를 죽 살펴본 재하는 직원 식당이 따로 있는 걸 보고 눈을 빛냈다. 아무리 리조트로 위장했다고는 하나 레스토랑보다는 직원 식당 쪽이 저렴하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리조트로 위장해 놓고 직원 식당 표기가 따로 돼 있네?’
아니면 로비를 바꿨듯 배치도 표시도 원래대로 해 둔 걸지도 모르겠다.
이천오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는 걸 본 재하는 어색해하며 물었다.
“저기, 숙소가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함께 다녀야 할까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부담되신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앗, 아뇨. 숨으실 필요까지는 없고요. 음…… 식사는 하셨어요?”
“예, 전 괜찮으니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이천오가 편하게 있으라 한들 그게 쉽지는 않았다.
직원 식당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 가는 때라 그런지 한산했다. 몇몇 사람만이 줄을 서 있어 재하와 도림의 순서도 금방이었다.
“매운 건 안 되니까 도림이가 먹을 만한 게…… 도림아, 오므라이스랑 치즈돈가스 먹을까?”
“응. 나, 많이 먹을래.”
“그래, 도림이 다 먹어도 돼.”
도림이 배가 고픈지 귀여운 욕심을 부렸다. 직원 식당이라 이미 만들어진 음식을 빠르게 받아 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도림은 오므라이스를 향해 숟가락을 움직였다. 조그만 입을 크게 벌리고 양껏 떠 넣어 봤자 어른 숟가락의 반밖에 되지 않아 열심히 먹는데도 양이 별로 줄지 않았다.
“천천히 먹어.”
“응응.”
재하가 앞에 놓인 돈가스를 작게 잘라 주자 도림은 볼이 볼록해질 만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도림이 귀여워 재하의 광대가 내려올 줄 몰랐다.
턱을 괴고 지켜보던 재하는 주변 시선이 몰려 있음을 알아챘다. 혼자였다면 의아했겠지만, 귀여운 도림을 바라보는 거겠거니 싶어 긴장하지 않았다.
정작 그들이 바라보는 게 센터 직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한 재하 본인이라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우리 도림이는 정말 귀엽지.’
열심히 돈가스를 포크로 찍던 도림이 옆 테이블을 빤히 바라봤다. 도림의 시선을 따라가니 보기에도 얼큰해 보이는 빨간 김치찌개가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오빠, 나도 김치찌개.”
“도림이한텐 매워서 안 돼.”
“전에 먹었던 톡톡 쏘는 고기 먹고 싶어.”
“아, 그건…….”
재하가 만들어 줬던 블랙 피그 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는 도림이 먹을 수 있도록 찌개라기에는 국에 가깝게 만들었었다. 그때 맛을 본 블랙 피그가 맛있었는지 도림은 김치찌개를 보자마자 재하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김치찌개 먹을래.”
“나중에 해 줄게, 도림아.”
“싫어. 나 톡톡 고기 먹을 거야.”
갑자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도림의 행동에 재하는 당황했다. 평소 도준과 함께 있을 때 떼를 쓰는 일이 여간해선 없는 착한 도림이었다. 아직 밥을 반도 먹지 않은 도림이 포크마저 내려놓자 재하는 안절부절못했다.
“집에 가면 냉동해 둔 블랙 피그가 있으니까 그걸로 해 줄게. 지금은 오므라이스 먹자.”
“싫어, 안 먹어.”
재차 재하가 안 된다고 하자 도림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 테이블에서 힐끗거리던 제복 입은 직원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신입 에스퍼세요?”
“네?”
“동생분이 먹었을 때 따가웠다고 하는 걸 보아 처리되지 않은 블랙 피그 고기를 사용하신 거 같아서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재하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직원은 신입 에스퍼와 친해질 기회라고 여겼는지 그들에겐 상식인 내용을 떠벌렸다.
“직접 잡은 마수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에스퍼에게 있지만, 그대로 외부에 반출하시면 일반인이 접했을 때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위험한가요?”
“그럼요. 에스퍼나 예비 각성자에게는 아주 훌륭한 단백질…… 아니, 각성 효과가 있지만, 일반인들이 그냥 섭취하면 동생분처럼 입 안이 따갑다거나 열이 나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요.”
어쩌면 재윤이 자신에게 알려 주었을지도 모를 이야기지만, 그간 모든 걸 컨셉이라 여겼기에 대충 흘려들었었다. 그렇기에 재하는 직원이 해 주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제가 모르고 해 준 요리 때문에 도림이가 위험할 뻔했군요.”
칭얼대던 도림도 표정을 굳힌 재하를 보고 얌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