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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각
“길마 형, TV에 나오는 거 봤어요. 완전 멋있던데요.”
반갑게 자신을 부르는 재하의 등장에 놀랐던 것도 잠시, 해일은 이내 미소로 화답했다.
“무사했군요, 재하.”
해일이 보인 안도 섞인 미소는 보는 이들을 낯간지럽게 만들 만큼 다정했다. 해일의 이런 미소를 본 적 없는 가드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권해일은 필요할 때 대외적인 미소를 지을 뿐, 사적인 친분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었다. 고등급 에스퍼도 아닌 일반인인 재하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해일의 태도에 가드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누구보다도 김병태가 똥 밟은 표정을 짓는 게 재하에게도 보였다. 재하는 김병태가 일반인인 자신을 차별하면서도 도준에게는 잘 보이려 하는 걸 눈치챘다. 아마도 여기서 높은 사람일 해일과 자신이 친밀함을 보인다면 김병태는 속이 타지 않을까. 약간의 심술과 해일을 향한 반가움이 섞여 재하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며칠이나 못 봐서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그랬습니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물론, 이건 게임 이야기였지만, 듣는 사람은 두 사람이 자주 만난다고 생각할 터. 재하는 해일과 이렇게나 친하다는 걸 보여 주려 과장되게 덥석 끌어안았다.
“갑자기 만나니까 더 반가운 거 같아요, 길마 형.”
재하는 장난으로 끌어안은 거였지만, 해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진 가이딩에 종일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긴장마저 풀어진 해일은 얕은 한숨과 함께 재하를 더없이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어? 길마 형?”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재하.”
‘이, 이게 아닌데?’
재하가 당황하는 사이, 지켜보는 도준은 방어 막을 거둔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대성이 설립한 에스퍼 길드에 권해일이 길드 마스터가 된 건 아직은 공개되지 않았다. 센터 안에서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음에도 권해일을 ‘길마 형’이라 부르는 재하의 모습은 눈길을 끌었다.
에스퍼라기엔 마나의 흐름은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재하의 존재에 가드들은 의아해했고, 직원들은 혹시 미등록 에스퍼인가 하고 궁금해했다. 어느 쪽이든 재하를 바라보는 시선에 호의와 호기심이 짙어졌다.
“길마 형, 저기, 좀 민망한데요.”
“오늘 많은 일이 있어서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이제 안심이 됩니다.”
“하하, 전 괜찮아요. 도준이 덕에 아무 일도 없었고요.”
도준을 언급한 재하가 슬쩍 몸을 돌려 해일에게서 물러서자 자연스럽게 팔이 풀렸다.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도준을 향해 해일은 예의 믿음직한 미소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주도준 씨. 갑작스러운 각성으로 힘을 다루는 게 힘드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아뇨, 친구와 가족을 지킨 것뿐인데요. 다른 사람에게 감사받을 일이 아니죠.”
도준과 해일은 웃으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가운데에 선 재하는 어딘지 모르게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정쩡하게 선 재하 곁에 다가온 도준이 등 쪽으로 팔을 둘렀다.
“그쪽이 어떻게 아는지 몰라도 오늘 많이 힘들었거든요. 저희는 가 볼게요.”
“아, 재하도 이곳에서 머물 거라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엇, 아니에요. 길마 형 바쁘실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재하의 거절에 해일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해 왔다.
“제 옆방이라면 재하도 편하게 머물 수 있을 겁니다. 그 방엔 CCTV가 없으니까요.”
해일의 말에 도준을 따라 걷던 재하의 움직임이 멈췄다. CCTV가 없는 방에 재하는 솔깃했지만, 도준은 왜 하필 해일의 옆방인가 싶어 경계심을 드러냈다.
“안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각성 초기에 에스퍼는 마나 흐름이 불안정해 상시 체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인 재하는 굳이 감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보호 개념으로라도 필요할 텐데요. 오늘 재하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면서 그런 불안한 방을 내주겠다는 건가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숙소에는 마나의 발현을 무효화하는 시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도준과 해일이 웃는 얼굴로 살벌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듣던 재하가 손을 들며 질문했다.
“저기, 그 무효화 시설이라는 거 숙소에만 있나요?”
“리조트 전체에 마나 제어기가 설치돼 있습니다. 로비에서 에스퍼가 힘을 써 버리면 일반인인 직원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해일이 부드럽게 답하자 재하의 손이 도준을 가리켰다.
“그런데 도준인 계속 힘을 썼는데요?”
“네? 그럴 리가…….”
재하의 등에 둘렸던 도준의 팔이 그를 바싹 끌어당겨 안자 전조도 없이 방어 막이 생겨났다. 그 흐름을 한눈에 파악한 해일이 놀람과 동시에 도준이 보란 듯이 방어 막의 영역을 넓혔다.
“뭐, 뭐지?”
“센터에서 힘을 쓴다고?”
보이지 않는 방어 막에 해일을 비롯해 가까이에 있던 가드들이 밀려났다.
가장 먼저 자세를 바로 한 해일이 빠르게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긴 불꽃이 타올랐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해일이 처음으로 재하 앞에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어기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제실부터 확인하고, 당장 관리 팀에 연락해 상황 파악 후 보고하라고 전하세요.”
“예, 바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일이 당황한 얼굴로 도준과 재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로비 구조가 바뀌면서 시스템 쪽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숙소 쪽은 따로 관리되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으아, 고개 드세요. 길마 형이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요.”
“정신없어 보이는 건 알겠네요. 이래저래 재하는 저랑 같이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고요.”
도준은 덤덤하게 주장했고, 재하 역시 평소라면 허리를 꽉 붙잡은 팔을 두드려서 떼어 놨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안전하다던 장소가 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불안함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안전이 보장된 도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해일 역시 그런 재하와 도준의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재윤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게 해일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재하를 떼어 놓으려 했으나 센터 측의 실수가 드러나며 불안만 늘었다.
여기서 해일이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주도준 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마 형, 자꾸 고개 숙이지 마세요. 방도 내주시는데 저희가 감사하죠.”
“맞아요. 아까부터 계속 말하지만, 부탁받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아오, 도준이 넌 왜 자꾸 까칠하게 구는데? 동생 놈처럼 굴지 좀 마.”
도준의 팔을 팡팡 두드리던 재하가 퍼뜩 떠올린 듯 해일을 돌아봤다.
“길마 형, 재윤이는요?”
“재하가 여기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서재윤 씨도 이쪽으로 올 겁니다. 숙소에서 쉬고 계시면 일이 끝나고 찾아갈 겁니다.”
“아, 넵.”
이 대화를 끝으로 해일은 급하게 안쪽으로 향했다.
해일이 사라지자 번잡하던 분위기가 더 어수선해졌다. 그 와중에도 해일보다 도준을 더 신경 쓰는 구기철이 다가왔다.
“그럼 이제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이제부터는 팀장인 내가 맡아야지.”
틈이 생기자마자 끼어드는 김병태의 약삭빠름에 구기철이 인상을 썼다.
“아니, 넌 옷부터 좀 갈아입어야 하지 않냐?”
“쯧, 격렬한 전투의 흔적은 명예로운 거다.”
안내를 해야 할 구기철과 김병태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도준은 재하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가드라기엔 힘겨루기를 하는 짐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직원에게 물어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오, 저번 방이랑 비슷하네. 좋다.”
배정받은 숙소는 지난번 재하가 하루 머물렀던 방과 비슷했다. 그때도 호텔방에 방이 따로 있다는 것에 놀랐는데 숙소로 삼을 장소라니 더 좋아 보였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안쪽 침대방에 도림을 눕히고 나온 도준은 다른 침대방에서 제 방인 양 뒹굴뒹굴하는 재하에게 다가갔다.
“야, 에스퍼란 거 되게 좋다. 이런 방을 막 빌려주고.”
“그러게. 이 방은 네가 쓰면 되겠어.”
“내가 지낼 곳도 따로 챙겨 주지 않을까?”
“그냥 여기서 같이 지내. 방도 여러 개고.”
“에이, 막상 같이 지내면 불편할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하는 이미 침대와 한 몸이 돼서 베개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뒹굴뒹굴하던 재하가 구석에 있는 CCTV를 발견하고 투덜거렸다.
“저거 진짜로 있네.”
“응. 그리고 힘도 쓰기 힘들어.”
“진짜? 그럼 다른 에스퍼가 와도 괜찮겠네.”
안도하는 재하와 달리 도준은 계속 방어 막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마나가 증발하는 감각이 불쾌했다. 숨 쉬듯 사용하던 힘이 발현되지 않는 것에 지켜보는 재하 역시 신기해했다.
“안 되나 봐? 제어기인가 뭔가 정말 작동하나 보네.”
“음…… 노력하면 조금은 가능할 거 같아.”
“어? 원래 아예 못 쓰는 거 아냐?”
도준이 집중하자 재하 역시 한곳을 빤히 쳐다봤다.
“후우, 됐다.”
“진짜?”
재하가 손을 뻗자 도준의 손 위로 한 겹 막이 쳐진 듯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 이상은 힘든지 금세 풀려 버렸지만, 힘을 쓸 수 없다던 것과 달리 쉽게 사용해 버렸다.
“길마 형도 되는지 물어봐야겠네.”
“안 될걸. 그 사람, 나보다 약해.”
“와, 주도준 입에서 저런 건방진 말이 나오다니.”
장난스러운 핀잔에도 도준은 덤덤하기만 했다. 피곤함에 절어 침대에 엎어진 재하는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크, 카리스마. 완전 멋진데.”
“여전하구나, 재하 넌.”
세상이 변하고 도준에게 특별한 힘이 생겼는데도 재하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야 재하 눈에는 친구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준이 가진 능력은 재하의 불안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하암…… 난 좀 잘란다. 긴장 풀려서 그런가 졸려 죽겠다. 침대 좀 빌릴게.”
“응. 안심하고 자. 지켜 줄 테니까.”
“어, 하암…… 너도…… 자.”
평소와 같은 온화한 도준의 목소리에 재하는 망설임 없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씻고 자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버렸다. 등을 가볍게 쓰다듬는 도준에게 징그러우니 치우라는 말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