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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어야 하나. 어디까지 신뢰해도 되는 걸까.
현관 앞까지 걸어간 재하가 문을 열지 않고 주저하자 도준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날 찾으러 온 거니까 내가 열게.”
“아니. 우리 집에 온 거니까 내가 상대해야지.”
이미 도준은 충분히 자신을 돕고 있었다. 재하는 손을 뻗자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았을 뿐, 집 안을 둘러싸고 있던 방어 막이 재하의 움직임에 맞춰 바깥으로 움직였다. 이거라면 누가 왔어도 안심이지만, 재하는 문을 열기 전 다시금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각성자 보호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증거 있나요?”
“예? 증거요?”
“네, 모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무조건 믿으라는 건 아니죠?”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깥에서 우왕좌왕하며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문 하나를 두고도 선명하게 들렸다.
민증을 보여 주면 될까, 센터 출입증 꺼내면 되지 않냐, 이능력 쓸 줄 아는 놈은 하나도 안 따라왔냐며 짜증 내는 소리까지. 듣다 보니 긴장이 풀릴 정도로 그들 역시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게 보였다.
재하가 문고리만 잡고 기다리자 도준이 앞으로 나섰다.
“어? 나가려고?”
“응, 일단 대화는 해 볼까 하고.”
슬슬 도준은 집에 가야 했고, 저들을 돌려보내기 위해서라도 대화는 필요했다. 도준이 문을 열고 나가자 의견을 나누던 이들 중 맨 앞에 선 인상 좋은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주도준 에스퍼.”
“제 얼굴도 아시나 보네요.”
“하하,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유력한 각성자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익혀 둔 것뿐이니까요.”
남자는 그새 꺼내 둔 센터 출입증과 주민 등록증을 함께 내밀었다. 투명한 막에 부딪쳐 구겨질 뻔한 걸 도준이 방어 막 일부만 해제한 후 받아 들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주도준 에스퍼의 가드를 맡은 에스퍼 구기철입니다.”
“에스퍼라고요? 능력은요?”
“아, 부끄럽게도 F급이라 별다른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도 일반인보다 튼튼하고 마나의 흐름이나 균열을 볼 수 있습니다.”
도준이 이곳에 있다는 걸 감시뿐 아니라 에스퍼 특유의 마나 흐름을 쫓아 알고 온 모양이었다.
그제야 도준은 건네받은 신분증과 출입증을 살폈다. 위조일 수도 있지만, 도준은 꼼꼼히 확인하는 척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에스퍼 구기철이라 소개한 남자는 도준을 향해 호감 어린 눈빛을 보이면서도 초조해하거나 불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도준 역시 느끼고 있었다. 현관 앞을 지키고 선 여럿의 에스퍼 대다수에게서 흐릿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게 마나라면 이들이 에스퍼라는 걸 믿을 수 있었다.
“잘 봤습니다.”
“그럼 저희가 안전하게 센터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가지 않을 건데요.”
“예? 하지만 보안 시설이 돼 있는 센터로 가셔야…….”
“제가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할 텐데요.”
도준의 자신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걸 가드들은 알고 있었다. 구기철은 도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바깥에서 힘을 쓰면 부작용이 큽니다. 사용하는 힘을 거둬 주십시오, 주도준 에스퍼.”
“글쎄요. 저는 전혀 힘들지 않은데요.”
도준의 대답에 구기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새로운 정보였다. 가드들의 얼굴에 새로운 희망이라도 본 양 설레는 기색마저 떠올랐다. 그러나 구기철은 방심하지 않고 도준의 상태에 우려를 나타냈다.
“어쩌면 주도준 에스퍼의 마나가 다른 에스퍼에 비해 월등히 많거나 효율이 좋은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남용하면 언젠가 마나가 고갈되거나 변합니다. 던전에서 사용하는 건 괜찮지만, 외부에서는 빠르게 소모되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구기철은 도준을 걱정해 열성적으로 주의 사항을 알렸다. 도준은 물론 재하 역시 처음 접하는 정보에 귀를 열고 집중했다. 성실하기까지 한 두 사람의 태도에 구기철은 더욱 열을 올렸다.
“주도준 에스퍼, 센터에 가면 모든 검사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강력한 에스퍼의 힘에 대응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견고한 숙소 역시 준비되어 있습니다.”
구기철의 시선이 도준의 등 뒤에서 이쪽을 열심히 견제하는 재하에게로 향했다.
“친구분이 이번 일에 휩쓸린 것 또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분과 함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에스퍼와 그들의 가족은 보호 대상이라며, 이미 모든 걸 준비해 두었음을 언급했다.
도준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힘에 대해 궁금하기는 했다.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언론을 장악한 대성 그룹의 힘은 일반인이었던 두 사람이 보기에도 상당해 보였다. 그런 대성이 준비한 안전한 장소라면 정말 안전하지 않을까.
도준이 돌아보자 재하가 도림을 안은 채 각오를 다진 듯 눈을 빛냈다.
“까짓것 가 보자고.”
재하가 간다면 도준 역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 새끼가 아는 여기보다야 낫겠지.”
* * *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일전에 재하가 한 번 왔던 리조트였다. 정확히는 리조트처럼 보이는 검진 센터였다. 다만 이전과 달리 입구가 다른지 좀 더 안쪽으로 향했다.
리조트를 본 도준의 표정이 굳자 재하가 팔을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나 여기 전에 재윤이랑 와 봤어.”
“여기를? 왜?”
“각성 검사인가 뭔가 하러 간다더니 갑자기 웬 호텔 같은 델 가더라고. 근데 이게 다 위장이고, 안에 다른 손님은 하나도 없다더라.”
“재하 넌 이미 여길 와 봤구나.”
“응. 그땐 여기가 센터라는 걸 못 믿었지만.”
경계가 한풀 꺾인 도준과 함께 재하가 안으로 들어가니 이전과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호텔 로비 느낌의 고급스러운 장식품은 치워지고 그 자리에 보란 듯이 무기와 방어구가 전시돼 있었다. 한쪽 벽에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재윤이 헬기를 뜯어내는 모습과 해일의 인터뷰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직원들의 복장 역시 부드러운 유니폼이 아닌, 각 잡힌 제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리번거리느라 걸음이 느려진 재하와 도준보다 앞선 구기철을 향해 직원들이 인사해 왔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주도준 에스퍼 도착했습니다. 숙소 배정 후 테스트 일정 잡아 주세요.”
“숙소는 어느 정도로 준비할까요?”
“최고 등급으로 진행해 주세요.”
“예? 그건 A급 에스퍼부터 신청 가능합니다만…….”
당황하는 직원을 향해 구기철이 처음으로 웃는 낯을 구겼다.
“주도준 에스퍼라니까요. 테스트 전이라고 해도 잠재 등급이 등록돼 있을 텐데요.”
“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구기철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직원이 빠르게 카운터로 향했다. 다른 직원이 다가와 도준과 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짐을 들어 드리겠…… 윽!”
재하가 멘 배낭을 들어 주려던 직원은 손이 가로막히자 놀라 한 발 물러섰다.
“괜찮으세요?”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놀란 직원을 걱정하는 재하와 달리 도준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곳에 오는 내내 도준은 재하와 도림의 주변까지 방어 막을 유지해 왔다. 낯선 곳에서도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주, 주도준 에스퍼. 추정 등급 A급 이상. 바로 숙소 배정해 드렸습니다.”
직원의 떨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했다. 재하의 등에 팔을 두른 채 주변을 살피는 도준의 평범한 행동에도 직원들이 긴장하는 게 보였다.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재하가 생각났다는 듯 가까이 서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그 숙소에도 CCTV 있는 거 아니죠?”
“물론 있습니다. 저희는 에스퍼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나온 대답에 재하가 어이없어했다.
“아니, 인권은요?”
“쯧, 이래서 일반인들은 안 된다니까.”
불퉁하게 튀어나온 거친 목소리에 재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넝마가 된 옷을 입은 커다란 사내가 서 있었다. 마주친 것만으로 뒷걸음질 칠 만한 거구에 험악한 얼굴을 한 이는 에스퍼 가드 팀장 김병태였다.
“야, 김 팀장. 그 꼴로 여길 오면 어쩌냐?”
“왜? 에스퍼가 에스퍼 센터에 오는 데 꼬라지가 뭔 상관인데.”
부상 흔적마저 보이는 김병태의 삐딱한 반응에 동기인 구기철은 턱을 긁으며 말을 돌렸다.
“아니, 고생했으니까 가서 쉬라는 소리지. 센터 말고 병원 가라고.”
“됐고, 신입 에스퍼가 왔는데 가드 팀장인 내가 빠지면 되나.”
이영우의 전담 가드라며 기세등등하던 김병태는 제 에스퍼를 놓치고 복귀하자마자 다른 줄을 잡기 위해 내달렸다. 다행히 주도준이 아직 로비에 있는 걸 발견한 김병태는 폭발에 휘말려 엉망이 된 모습으로 달라붙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에스퍼 전담 가드 팀장, 김병태입니다. 김 팀장을 찾아 주시면 언제든 최우선으로 달려오겠습니다.”
마치 나이트 삐끼 같은 저렴한 멘트였지만, 워낙 몰골이 꾀죄죄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으로도 책임을 다하려는 김병태를 향해 재하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감사해요. 혹시 숙소에 있는 CCTV는 끌 수 있나요?”
“안 됩니다.”
“하다못해 침실이나 욕실이라도…….”
“보호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쪽은…… 각성자도 아닌 거 같은데, 까딱하면 뒈져요.”
저렴한 표현에 이죽거리는 김병태의 행동은 재하의 작은 동정심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이래서 멋모르는 일반인을 센터에 데려오면 안 되는 건데.”
고작 CCTV 하나만 언급한 것뿐인데도 강경하기만 한 가드의 태도에 재하는 황당했다.
“아니, 그쪽에서 데리러 왔잖아요.”
“당신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도준 에스퍼의 일행이신데 최선을 다해 편의를 봐드릴 겁니다.”
재하를 낮잡아 보는 김병태의 모습에 도준이 나서려 하자 그가 곧바로 꼬리를 내리며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두 사람이 불만을 드러내기 전, 구기철이 눈치껏 사이에 끼어들며 도준과 재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오늘 하루 힘드셨을 텐데 일단 쉬시죠.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일단 쉬자, 재하야. 도림이도 내가 안을게.”
“어. 오늘따라 우리 공주님이 조금 무겁네.”
재하는 잠든 도림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이며 도준에게 도림을 넘겼다. 방어 막을 펼치는 데 방해가 될까 싶어 도준 대신 계속 안고 있어서 그랬는지 오늘따라 유달리 힘이 달리는 팔을 탈탈 털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직원들이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도준이 A급 에스퍼인 걸 알게 된 후에 보였던 긴장감과 비슷한 번잡스러움이었다.
“권해일 에스퍼 도착하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 손에 의해 문이 열리고 해일이 들어섰다.
영상에서 보았던 배우 뺨치게 잘생긴 얼굴이 메이크업을 받았는지 아예 빛이 나는 수준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도 반가운 마음에 충동적으로 해일을 부르고 말았다.
“길마 형!”
“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