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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까.’
재윤이 언급한 상황대로 흘러가는지 확인차 들른 거였지만, 해일의 정신은 온통 다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에스퍼의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는 재윤의 계획은 그의 형인 서재하를 지키기 위한 초석이었다.
처음 계획은 해일을 내세우려 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대격변은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한강 게이트가 열리지는 않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게이트 입구에 헬기가 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치료를 포기하고 한강으로 달려간 재윤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다면 폭발로 인해 인명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해일이 합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지금 문제는 전해야 할 소식이었다.
‘주도준의 각성은 막았다고 했는데.’
재윤은 자신의 형을 지켜보기까지 하면서 도준의 각성을 막아 냈다고 했다. 재윤에게 전해 들었던 도준의 능력을 생각하면 아까운 일이었지만, 재윤의 선택이니 지지했다. 그러나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국 주도준은 각성해 버렸다.
게다가 이영우의 능력은 재윤이 알려 준 것과 달랐다. 재윤은 투시와 투과라고 했는데 실제 이영우가 사용하는 건 폭탄이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서재하가 있었다는 게 문제야.’
재윤이 준 정보의 불확실성을 따지기보다 그가 강하게 요구한 재하의 안전이 지켜지지 못했다는 게 해일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하라는 해일의 명령에도 가드 측에서 한발 늦게 알려 왔다. 그것도 이영우 에스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하며 겸사겸사 들어온 정보였다. 재윤이 요청한 일반인 가드의 보고가 아니었다면 재하에 대한 소식은 아예 누락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도준의 각성으로 재하가 무사하다고는 하나 직접 보지 못해 불안했다. 해일은 당장이라도 재하의 안전을 확인하러 달려가고 싶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재윤에게 향하는 내내 초조함이 가시질 않았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재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암담했다.
처음 재윤을 만났던 날, 각성 전인 이영우가 재하와 함께 있다는 소식에 짙은 살기를 내뿜던 재윤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린 해일의 한숨이 깊어졌다.
* * *
“오빠, TV에 동생 오빠 나와!”
TV 앞에 앉아 간식을 먹던 도림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재하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동생 오빠’는 재하의 동생인 재윤이었다. 도림이 재윤의 이름을 아직 외우지 못해 나온 희한한 호칭이었다.
“어, 그래. 금방 갈게, 도림아.”
배고프다는 도림을 위해 급하게 햄김치볶음밥을 만들던 재하는 연신 재촉하는 도림을 위해 열심히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조금도 식욕이 없던 재하도 입맛이 돌아 금세 3인분을 만들어 소파 앞 테이블로 가져왔다.
“도림아, 과자 내려놓고 밥 먹자.”
“미안해, 재하야. 소파는 내가 치울게.”
“됐으니까 너도 밥부터 먹어.”
30분 전만 해도 도준에게 끌어안겨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던 소파는 도림이 방방 뛰며 흘린 과자 부스러기로 어지러웠다.
마침 자다 깬 도림이 배고프다며 칭얼댄 덕에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림이 흘리는 과자 부스러기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대성 그룹의 공식 입장문에 이어 에스퍼 대표와의 인터뷰가 준비되었습니다. 채널 고정해 주세요.』
뉴스가 아닌 오락 프로그램에서까지 속보와 함께 영상이 이어졌다. 그 탓에 애매하게 하이 텐션이 된 MC의 목소리를 들으며 볶음밥을 한 술 뜨려는 순간,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안녕하십니까. 대성 그룹의 지원을 받아 이 자리에 서게 된 에스퍼 권해일입니다.』
“길마 형?”
당황한 재하의 숟가락이 멈추자 볼이 불룩할 정도로 볶음밥을 먹은 도림이 리모컨을 집었다.
“오빠, 나 만화 보고 싶어.”
“어? 어, 그래. 틀어 줄게.”
재하는 해일이 무슨 말을 할지 너무도 궁금했지만, 도림을 위해 만화를 틀어 주었다. 대신 핸드폰을 꺼내 급하게 해당 영상을 찾아 보았다.
『……해서 각성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상황입니다. 대성 그룹은 혼란스러운 여러분들을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언제든 방문하실 수 있도록 대성은 문을 열어 두겠습니다.』
해일이 하는 말은 뻔하디뻔했으나 영상 아래 댓글은 엉뚱한 방향으로 불타올랐다.
⤷ 에스퍼가 되면 잘생겨지는 건가요
⤷⤷ 각성 팁 공유합시다.
⤷⤷ 혈육 메이트 각성했는데 오징어임.
⤷ ☆권해일 팬클럽 모집☆
⤷⤷ 링크 공유 좀.
⤷ 대성 가면 해일 오빠 볼 수 있나요?!
⤷ 에스퍼? 영화 홍보 아님?
⤷⤷ 저 님이 배우 아니면 우리나라 배우 없음.
“댓글만 보면 위기감은 전혀 없는데.”
“재하야, 네 동생 또 나왔어.”
“어?”
재하가 댓글에 정신이 팔린 사이, 도준이 보여 준 핸드폰에는 재윤의 모습이 비쳤다.
화면에 비친 재윤의 모습은 풀 세팅, 그 자체였다.
“푸웃!”
사태의 심각성보다 완벽하게 꾸민 재윤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아무래도 가족이 꾸민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들이대진 상황이 어색해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평소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던 재윤이 머리를 반쯤 까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헬기를 뜯어낼 때만 해도 입고 있던 교복처럼 보이는 애매한 옷 대신 입은 칼 각 잡힌 제복 스타일의 옷은 해일 못지않게 잘 어울렸다. 역시 어깨가 넓고 키가 크니 뭘 입어도 태가 났다.
“큭, 재윤이 저거 메이크업도 받은 거 같은데.”
쪽팔려서 웃음이 실실 나는데 정작 재하의 핸드폰으로 보이는 댓글은 새로 고침 할 때마다 난리가 났다.
⤷ 에스퍼 절대 지켜!
⤷ 각성 팁 좀!!!
⤷⤷ 최고의 성형은 각성이다!!!!!
⤷⤷ 아니 울 호적 매이트는 오징어라고.
⤷ 에스퍼 되면 외모가 바뀌나요?!
⤷ 저 존잘님 존함 좀.
⤷⤷ 화면 아래 이름 뜸.
⤷⤷ 권해일 ☆ 서재윤 팬클럽 링크 놓고 감.
각성하고 싶다는 외침과 더불어 에스퍼가 되면 잘생겨지는가에 관한 토론이 오가는 댓글 창은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에스퍼 팬클럽 회원을 모집한다는 댓글과 수십 개의 대댓글까지.
뉴스난은 온통 에스퍼 이야기로 도배가 됐고, 조회 수 상위권 영상마다 댓글은 불타올랐다.
“생각보다 다들 쉽게 받아들이는데?”
“인터넷은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밖에 나가 보면 다르지 않을까?”
에스퍼의 존재에 실제로는 다들 혼란스럽겠지만, 인터넷만 보면 오히려 평화롭기까지 했다. 적응력 만렙의 요즘 애들인가 싶기도 하고, 공감 가는 부분도 꽤 있었다.
무엇보다 해일과 재윤의 외모에 호감을 보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특히 각성하면 잘생겨지냐는 질문이 쉼 없이 올라왔다. 잠시 생각하던 재하는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하긴. 지호도 잘생기긴 했지. 영우 선배도 외모로는 어디 가서 빠지진 않고.”
영우는 폭탄 살인마가 된 것 같아 씁쓸하지만, 각성한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외모가 상당했다. 각성해서 잘생겨지는 게 아니라 잘생기면 각성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하던 재하의 시야에 머쓱해하는 도준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정하고 착한 외모를 가진 친우의 어색한 웃음에 재하가 서둘러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도준이 너, 남자답게 잘생겼어.”
얼결에 위로하는 모양새가 돼 버린 재하가 양손 엄지를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식당 아주머니도 너만 보면 잘생겼다고 하시잖아. 슈퍼 아주머니도 사위 삼고 싶다고 항상 그러시고.”
“으응. 고마워, 재하야. 너도 귀엽게 잘생겼어.”
“아니,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을 왜 붙이는데? 그리고 나도 남자답게 생겼거든.”
“응, 재하 말이 맞아.”
서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사이, 화면에서 재윤이 사라지고 다시 해일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어진 해일의 목소리는 낮고 깊은 울림을 가져 진중하니 저절로 집중하게 됐다.
『국민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저희 에스퍼 협회는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해일의 듬직한 목소리와 함께 화면 아래로 ‘해당 내용은 대성 그룹 협회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지나갔다.
대성 그룹 서버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재하도 대성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니 당연하다는 듯 무한 로딩이 반겨 주었다. 대성씩이나 돼도 한꺼번에 몰려드는 트래픽을 이겨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딱히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싶어 재하는 도준과 함께 식은 볶음밥을 먹어 치웠다.
도림이가 그랬듯 도준 역시 볼이 불룩해질 만큼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재하보다 빠르게 식사를 끝냈음에도 도준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걸 본 재하는 제 몫의 볶음밥 절반을 도준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애초에 동일한 양을 퍼 와 매번 남는 걸 도준에게 넘기던 습관 탓이었다. 도준 역시 익숙하게 놓았던 수저를 들었다.
어색할 틈도 없이 이어진 일상에 재하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파에서의 이상한 기류는 잠깐의 일탈이었을 뿐이라 여겼다.
빈 그릇까지 치우고 슬슬 도준과 도림이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행히 재하는 아까처럼 두렵지 않았다. 잘 시간이 다가오자 눈을 비비며 졸려하는 도림을 편하게 재우는 게 우선이었다.
“졸려…….”
“도준아, 도림이랑 올라가 봐.”
“괜찮겠어?”
다른 때라면 도림을 안고 올라갔을 도준이 좀처럼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도준의 앞에 재하가 먼저 앞서 현관으로 향했다.
“응, 이제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지자고.”
“혼자라고 해 봤자 게임할 거잖아.”
“당연하지.”
일상을 이야기하자 도준도 안심한 듯 평소와 같은 다정한 웃음을 보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똑똑.
현관에 다다르기 전, 바깥에서 들려온 가벼운 노크 소리에 도준이 멈추어 섰다.
재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벽이 주변을 감싸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완벽하게 안전해지는 감각은 걱정과 더불어 안심이 됐다. 도준이 팔을 뻗어 재하를 끌어당기자 자연스레 반쯤 안긴 자세가 됐다.
똑똑.
“안에 주도준 에스퍼 계십니까?”
도준의 집은 위층임에도 바깥에 선 사람은 확신한 듯 도준의 존재를 물어 왔다. 재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에스퍼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저 말을 믿어야 할지, 설령 믿는다 해도 무슨 일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