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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준이 너…… 왜 그래?”
도준의 우울한 목소리가 낯설어 당황한 재하마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 새끼 때문에 너희가 다치는 줄 알았어.”
도준이 영우를 지칭하는 말이 거칠었으나 재하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도 도림이 다칠까 봐 걱정됐는데, 가족인 도준이 느꼈을 공포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내게 왜 이런 힘이 생긴 건지 모르겠어.”
갑작스럽게 생겨난 힘에 도준은 혼란스러운 것처럼 재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었다. 재하는 뜨거운 숨이 피부에 닿는 걸 피하고 싶어도 당장 혼란스러워하는 도준을 밀어낼 수 없었다.
“얀마, 네 덕에 우리 모두 무사하잖아.”
“응, 그건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내게 힘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폭탄을 터트리던 영우 앞에서 도준에게 힘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언급했다. 이에 재하 역시 가라앉혔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람이 죽었어, 재하야.”
사실 도준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감정적으로 동요가 일지 않았다. 재하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방어 막 건너에 선 영우가 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으…….”
도준과 달리 재하는 폭발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린 존재를 떠올리고 몸을 움츠렸다. 그런 재하를 온몸으로 끌어안자 밀어내는 기색도 없이 마주 끌어안아 왔다. 공포를 상기시키자 도준의 체온에 매달리며 두려움을 쫓으려 필사적이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도준은 제 품에서도 덜덜 떨기 시작한 재하를 깊이 끌어안으며 천천히 소파로 몸을 뉘었다. 몸이 기울자 당황한 재하가 도준의 등을 꽉 붙잡았다. 재하의 접촉에 닿은 곳부터 한숨이 나올 만큼 편안해졌다. 몸이 느끼는 기꺼운 감각과 반대로 도준은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새끼는 왜 우리한테 나타나서 폭탄을 터트린 걸까…….”
질문이 아닌 혼잣말처럼 흘린 도준의 말에 재하의 몸이 굳었다. 영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을 바라보며 재하를 불러 댔다. 재하를 만나러 왔다고. 보고 싶었다고. 손을 잡아 달라며 끊임없이 그에게 다가오려 했다.
영우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으나 도준이 재하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불행이었다. 게다가 도준이 없었다면 자신이 무사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하는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도림이가 다쳤다면 절대 용서 못 해. 지금도 못 하지만.”
도준이 도림을 언급하자 재하는 위장이 조여드는 죄책감을 느꼈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재하야.”
자신을 걱정하고 안도하는 도준의 속삭임이 더욱 부채감을 불러왔다. 이대로 떨고만 있을 수 없기에 재하는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며 도준의 등을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괜찮아. 우리 모두 무사하잖아.”
“응. 그래도 실감이 안 나. 너랑 내가 무사하다는 게. 몇 번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도준은 의도적으로 재하의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재하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도준의 이런 행동은 그답지 않았으나 그는 재하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의도대로 재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소파와 도준의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면서도 밀어내지 못할 만큼. 도준의 숨이 몇 번이고 목과 어깨로 쏟아져 내리는데도 지호를 밀어낼 때처럼 거부할 수 없었다. 더운 숨이 어느새 축축하게 변해 자신의 목과 어깨를 문지르는데도 오늘 일을 떠올리며 뒤늦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벌벌 떨었다.
“재하야, 왜 이렇게 떨어?”
“어?”
“무서워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아, 아냐. 괜찮아. 지켜 주긴, 뭘.”
“그런데 지금은 좀 나도 놀라서…….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 체온이 느껴져서 그런가 안심이 돼.”
“어어,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소파에 밀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맨살이 닿은 것 같아도, 목에 자꾸만 입술이 닿는 것 같아도 재하는 눈을 굴리며 인내했다. 도준이 겁을 먹으면 달라붙는 타입이구나 생각하며 천장 무늬를 세고 있는데 축축하던 목에 물컹한 감각이 느껴졌다.
욕설이 튀어 나가려는 걸 꾹 참은 재하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대체 친구 놈이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조금만 더라는 게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해졌다. 자꾸만 허리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이 신경 쓰여 몸이 움찔거렸다.
‘5분. 5분이면 되겠지.’
어떻게든 감각을 분산시키고자 재하는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TV 소리라도 좀 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알량한 생각으로 틀었다가 야릇한 음악이 흘러나와 서둘러 채널을 돌렸다. 부모님과 함께 19금 영화 화면을 봤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버튼을 연타했다. 무난하게 뉴스 채널이나 틀어 놓자 싶어 멈춘 화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이 비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현장에서 입수된 영상이 고르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평소 듣기 좋은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다급함을 숨기지 못하고 속보를 전했다.
프로펠러가 멈춘 헬기가 기울어진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추락해야 마땅한 헬기가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이상한데 바깥에 매달려 문짝을 떼어 내는 남자가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허공입니다. 마치 무언가에 걸려 있는 듯 보이는 헬기에서 구조 활동을 벌인 남성입니다. 해당 남성과의 인터뷰는 잠시 후 공개될 예정이며…….』
헬기 전체를 비춰 주던 영상은 사람을 구해 내는 남성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비춰 줬다. 너무도 명확하게 찍힌 익숙한 얼굴에 눈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재윤이……?”
재하의 입에서 느리게 흘러나온 이름에 도준 역시 고개를 들었다.
“네 동생?”
“어. 걔가 왜 저기서 나와?”
* * *
속보! 한강 헬기 추락하다 멈춤!
한강에 K-히어로가 떴다!
요즘 고딩은 헬기를 찢어…….
⤷ 이게 무슨 어그로냐 했던 날 반성한다.
⤷ 아니 전국에 폭탄 테러범 떴는데 이딴 어그로가... 아니네?
⤷ 요즘은 뉴스도 CG로 보도함?
⤷⤷ 헬기 찢는 분 얼굴 CG 인정.
⤷⤷ 영상 흔들려서 애매하긴 한데 존잘 맞는 듯.
뉴스 보도보다 빠르게 인터넷에 업로드된 영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됐음에도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까지 보도되며 에스퍼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에 대성 홍보 팀을 비롯해 에스퍼 관련 업무를 맡은 이들은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대격변의 날이 당겨진 것에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누가 봐도 영웅적인 행동으로 전파를 탄 히어로의 등장에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쳤네…….”
“지금 헬기 문짝 찢은 거야? 아까는 막 날아가는 거 같던데?”
“비행 능력 에스퍼는 아직 발현한 적 없잖아.”
“아니, 오늘 각성한 에스퍼가 저렇게 움직이는 게 말이 돼?”
“정보 들어왔습니다! 서재윤! 예비 각성자 명단에 없는 인물입니다!”
“잠깐만, 익숙한 얼굴인데? 최근에 연구 팀에 협력하던 민간인 아냐?”
누군가의 한마디에 홍보 팀 직원이 연구실로 내달렸다.
정작 각성 팀 직원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한 후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최근 갱신된 각성자 목록에 이름이 있는데요?”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저런 각성자가 있는데 공유를 안 했다고?”
대성 그룹의 이름을 걸고 준비한 에스퍼 협회가 이리도 주먹구구식인 줄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모든 게 예정보다 빠른 대격변 탓이었다.
소통의 부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대격변의 날까지 재윤의 존재를 최대한 감춰 달라는 요청이었다. 무리한 부탁에도 해일은 이를 받아들였고, 각 팀 간에 정보가 공유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나 단절돼 있을 줄은 몰랐기에 해일은 그들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이해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연구소 직원끼리만 공유한 겁니까?”
“그건 좀 억울한데요. 저희는 열심히 일한 것뿐입니다.”
“이걸 전담 팀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
해일이 전해 준 정보가 공유된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이 명확히 나뉘었다. 앞으로 이용할 사람과 내 편으로 만들 사람을 여기서부터 구분해 나가야 했다.
벽 하나를 두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해일이 움직였다.
“서재윤 에스퍼에 대한 정보는 올려 두었으니 전원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권해일 에스퍼?”
“해일 씨, 서재윤에 대한 정보를 알고 계셨습니까?”
한바탕 소란이 이는 가운데 해일이 나타나자 각 부서의 대표들이 달려왔다. 그중 해일과 오래 봐 온 김만태 부장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해일아, 너도 영상 봤냐? 저거 저렇게 막 방송 타도 되냐?”
“네, 봤습니다. 저희 쪽이랑 합의된 사항으로, 홍보 팀에게도 연락이 갔을 텐데…… 왜들 이렇게 허둥대시죠?”
“그, 그랬지. 하하, 보고서가 참 늦게 도착해서.”
평소에도 태만한 김만태 부장은 해일이 사전에 보낸 대격변 이후 진행될 일정을 받아 보고도 대충 넘겼다. 거기에 쓰인 내용은 허황된 구석이 많을뿐더러 해일은 지금까지 쓰기 편한 사냥개 정도로 여겨졌기에 그가 준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탓이었다.
이미 이렇게 진행되리란 걸 예상한 해일은 김만태 부장 너머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기자나 언론사에 접촉 중인 홍보 팀에게로 다가갔다.
“일전에 드렸던 서재윤에 대한 정보를…….”
“어허! 다들 빨리빨리 못하나? 우리 권해일 에스퍼가 이 바쁜 와중에 사무실 따위에 박혀 있어야 하겠어?”
해일이 나서려 하자 김만태 부장이 서둘러 그 사이로 끼어들며 목소리를 키웠다.
“흠흠. 해일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도 전면에 나서자.”
김만태 부장의 시선이 빠르게 여러 대의 모니터를 훑었다.
“지금 에스퍼에 대한 반응이 되게 좋거든. 넌 불도 막 피울 수 있으니 연출도 화려하게 할 수 있고, 에스퍼 대표로 대중에게 각인시키기 좋을 거야.”
이자는 게으르긴 하지만,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에스퍼의 등장에 혼란스러울 민심을 달래려면 구심점을 잡을 인물을 표면적으로나마 내세워야 했다. 재윤은 그게 권해일임을 본인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켰다. 자신을 낮게 보던 해일이었지만,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재윤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됐다. 거기에 홍보 팀장의 빠른 판단이 그가 가야 할 길을 만들어 냈다.
“서재윤이 인터뷰할 때 해일이 네 쪽으로 시선이 가게 하자고. 기자에게도 연락하고, 전담 팀 붙여 줄게.”
“알겠습니다. 바로 세팅해 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 나 김 부장이야!”
김만태의 허세에도 능력은 믿을 만했기에 해일은 주저 없이 움직였다. 재윤과 합류하고자 헬기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