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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과거에 두고 온 미래 Ver.3
외전 3. 주도준
세상이 바뀐 후에도 사계절은 여전했다.
봄은 빠르게 지나가고 여름은 숨 막히게 더웠다. 불쾌할 정도로 지독했던 날을 지나 선선한 바람과 함께 계절이 바뀌는 시기.
에스퍼 전용 병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보다 몇 배는 늘어난 환자는 물론이고, 큰 상처를 입고 실려 오는 경우도 잦았다. 방금도 옆구리가 뜯겨 나간 에스퍼가 제 발로 걸어와 의사를 찾는 통에 입구부터 피투성이였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렇게나 피를 쏟아 내고 걸어 다닐 수 없었다. 엉망진창인 바닥을 치우는 데 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아직 교육 중인 신입이 청소 직원을 도와 바닥의 피를 닦아 내는 데 한 손 보태고 난 후에야 짧은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신입이 손을 씻고 돌아오자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사수가 가볍게 반겼다.
“수고했어. 힘들지?”
“아니에요. 각성하니까 피로도 잘 안 느껴져서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하다 보면 결국 각성자든 아니든 힘들긴 매한가지야.”
병원의 직원과 의료진은 대부분 각성자였다. 에스퍼로 활약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체력이나 담력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그들조차도 이번 달은 유독 힘들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온 이들도 막상 에스퍼들의 제멋대로인 행동과 이기적인 모습에 회의감이 들고는 했다.
“게다가 우리가 상대하는 건 에스퍼들이라고. 체력을 아껴야 해.”
“참. 최근 에스퍼 입원이 늘지 않았어요? 부상 상태도 심각하고요.”
“아, 맞다. 너 신입이었지. 다른 지역은 몰라도 우리 병원은 매년 이 시기에 항상 그래.”
신입이 집중한 걸 확인한 사수는 주변을 살핀 후 가볍게 말을 이었다.
“수호자 없이 싸우니 다들 고생이지.”
“수호자요?”
“어머, 얘 좀 봐. 아무리 지방에서 올라왔어도 그렇지. 투명한 방패 만드는 에스퍼 있잖아.”
“아, 주도준 에스퍼 말씀하신 거구나. 그분이라면 수호자란 별명이 딱 맞네요.”
에스퍼의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안 된 신입 간호사의 눈이 반짝였다.
신입은 각성 후 야심 차게 서울행을 택했다. 에스퍼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각성자 우대 조건의 회사는 서울에 널려 있었다. 예상대로 유명한 대성 그룹 산하의 에스퍼 전문 병원의 취업은 쉽게 이루어졌다. 아직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은 낭만과 꿈이 살아 있었다.
“너 얼굴 빨개졌어. 수호자 좋아해?”
“에이, 수호자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가장 최전선에서 뛰는 영웅이잖아요.”
유튜브에서 보던 에스퍼의 멋진 모습을 실제로 볼 생각에 두근거렸던 신입은 몇 달도 안 되어 알게 된 에스퍼의 실체에 실망만 쌓여 가던 차였다.
가장 기대했던 고등급 에스퍼의 치료는 치료사 계열의 에스퍼를 통하기에 병동이 아닌 인근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 오는 에스퍼는 다 고만고만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존심만 세고 힘을 과시하는 무뢰배들이 상당했다.
그러던 중 일반인에게도 유명한 에스퍼, 수호자 주도준의 이야기는 신입을 들뜨게 했다.
“선배님은 보셨어요? 센터에 가야만 만날 수 있겠죠? 딱 한 번만 가까이서 봤으면 좋겠어요.”
아직 이 바닥의 때가 묻지 않은 신입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본 사수가 주변을 쓱 살폈다.
“실은 말이지…….”
당직을 서는 두 사람뿐임을 확인한 사수는 신입에게 가까이 붙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매년 이맘때면 수호자가 잠적하거든. 그래서 이 시기에 에스퍼들이 걸레짝이 돼서 병원에 오는 거야.”
“네? 수호자가 잠적하면 나라는 누가 지켜요?”
“별수 없지. 이 시기만 되면 가이딩을 거부하는데.”
에스퍼에게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건 최근 발표된 사실이었다. 병원 측에서는 미리 이 사실을 공유받기는 했으나 신입에게는 조금 낯선 이야기였다.
“가이딩, 그거 안 받으면 힘 못 쓰지 않아요?”
“힘을 못 쓰는 정도가 아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하고, 정신을 놔 버리는 일도 있으니까. 외형에 변화가 올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는 에스퍼도 있고.”
“그, 그 정도예요?”
“이런, 신입이라고 너무 풀어 줬나 보네. 에스퍼 가이딩 관련 문서 아래 서랍에 있으니까 시간 날 때마다 읽어 둬.”
“네, 바로 읽을게요.”
수시로 게이트가 열리고, 현존하는 던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고등급 에스퍼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 혹은 마나는 사용할수록 탁해지며, 그대로 계속 힘을 사용할 시 위험해질 수 있어 반드시 휴식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에스퍼를 일으키는 게 가이드의 존재였다.
이렇게만 보면 굉장히 귀한 대접을 받을 것 같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던 에스퍼는 뒤늦게 알려진 가이드의 존재에 이를 갈았다.
적은 숫자의 가이드에 에스퍼들의 눈이 돌아갔다. 당연히 취해야 하는 제 것을 이제야 내놓는 거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부족한 숫자의 가이드는 에스퍼 간의 공유를 당연하다고 여기게 했다. 무엇보다 가이드에 대한 공식 발표가 나기 전부터 고등급 에스퍼 사이에선 가이드를 공유해 왔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숫자가 적으니 귀하게 여겨야 했을 가이드를 오히려 하찮게 취급하며 함부로 대해 온 방식은 그대로 아래 등급 에스퍼에게도 이어졌다. 가이드란, 언제든 에스퍼가 필요로 하면 달려가야 하는 5분 대기조로 취급당했다.
에스퍼나 대중이 가이드를 보는 시선은 병원 휴게실에 모여 앉은 이들의 대화만 들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온 가이드는 영 와꾸가 별로야. 안는 맛이 안 난다니까.”
“약을 맛으로 먹냐? 몸에 좋으니 먹는 거지.”
“약이라기보다는…… 가이드란 건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공기 청정기 개념 아냐?”
“정화조.”
“푸핫! 딱이네, 그거.”
적나라한 누군가의 말에 웃는 사람과 찌푸리는 사람이 뒤섞였다. 대부분이 저급하게 킬킬대는 속에 인상을 찌푸린 몇몇이 불쾌한 속내를 드러냈다.
“말 참 이쁘게 한다?”
“가이드한테 고마워해라. 어찌 보면 투석하는 거랑 비슷하지 않나?”
“정제 개념보다는 불순물을 빨아들이는 거.”
“쓰레기통이네.”
“하아, 이것들이 입에 걸레를 물었나. 니들은 국물도 없어, 새끼들아.”
“팩트만 말한 건데 급발진하고 난리? 누가 보면 니가 가이든 줄 알겠다, 새꺄.”
가이드에 대한 평가가 이러하니 에스퍼 중에서는 가이드를 혐오하거나 불편해하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소유하거나 소모품 취급하는 에스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항시 부족한 가이드의 숫자에 에스퍼는 만성 통증에 시달렸다. 통증은 사람을 민감하게 만들고, 엉뚱하게도 그걸 풀어 주기 위해 마주한 가이드를 향해 분풀이가 이루어졌다.
에스퍼와 가이드 간의 관계는 최악으로 시작해 협회의 간섭하에 억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 간의 관계가 어찌 되었든, 고등급 에스퍼인 주도준에게 가이드가 없어 가이딩을 못 받는 때는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주도준의 출동 횟수나 활약상을 보면 그 역시 가이딩을 수시로 받아야 했을 터.
그간 아무 문제 없이 잘 받다가 갑자기 거부하는 이유가 의아했다.
“빨리 기운을 되찾으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어쩔 수 없지. 매년 이러니까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랄 수밖에.”
가이드 참고 자료를 넘기던 신입은 주도준의 잠수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부터 점점 목소리가 커져 여기까지 들려오는 소음에 휴게실에 모인 환자들을 병실로 돌려보내고자 움직였다.
* * *
주도준의 잠수는 매년 이맘때. 누구보다도 소중했던 동생 주도림을 잃었던 대격변의 날이 가까워질 때였다.
주도준의 잠수는 가이딩의 거부에서 시작됐다. 가이딩 거부는 에스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주도준은 가이딩을 따로 할 필요 없을 만큼 수시로 서재하와 뒹굴어 왔다. 가이드 쪽에서 가이딩 하려는 노력조차 할 필요도 없이 맞붙은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가이딩이 되어 왔었다.
덕분에 주도준의 컨디션은 늘 최상이었다. 협회의 갑작스러운 협조 요청에도 주도준이 거절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도준의 활약은 최전선에서 항상 유효했고, 그의 컨디션이 유지되는 이유를 아는 협회의 묵인하에 가이드 서재하는 모든 걸 구속당했다.
게다가 주도준은 서재하를 독점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든 요청이 있으면 서재하를 다른 에스퍼와 공유했다. 타인과의 과도한 가이딩으로 서재하가 정신을 못 차리는 날에도 주도준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섞었다.
주도준에게 서재하와의 잠자리는 그게 쾌락이든 가이딩이든 상관없이 일상처럼 이어졌다. 오히려 너무 잦은 관계 탓에 특별하지 않을 정도였다.
평소 서재하를 쉽게 공유해 주었음에도 연인으로 오해받는 일이 잦아지자 주도준은 불쾌해했다. 마치 아무 감정이 없다는 듯 외부 사설 가이드 센터에 서재하를 밀어 넣기까지 했다. 가이딩을 돈으로 사고파는 장소였다. 고등급 에스퍼 몇 명만을 상대해 왔던 서재하를 나락으로 빠트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렇게 서재하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주도준은 정작 아무렇지 않게 매일 사설 가이드 센터로 출근 도장을 찍어 왔다.
주변에서 보기에 주도준이 서재하에게 가진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증이라 해도 이해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그랬던 주도준이 갑자기 서재하를 배척하고 모든 가이딩을 거부하는 때였다. 어떤 방식의 가이딩이든 모조리 거부하며 틀어박히는 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어둠 속에서 주도준은 스스로 택한 괴로움에 빠져들었다.
온몸을 짓눌러 오는 불순물 섞인 에너지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해도 주도준은 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떠올리는 건 동생 주도림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