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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헉.”
활짝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온 도준은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기만 해도 숨 가쁘게 했다.
“뭐냐, 너. 날아오기라도 한 거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어도 이렇게 빠를 수 없었다. 계단을 어떻게 뛰어 올라온 건지 도준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건데?”
“하아, 그건, 후욱.”
“도림인? 설마 혼자 두고 온 거냐?”
“방어 막, 해 놓고. 후아…….”
도준이 숨을 헐떡이며 해 온 대답에 재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아무리 그래도 혼자 두고 오면 안 되지. 다시 가서 도림이부터 챙겨.”
“후우, 괜찮아. 안전해.”
다른 때라면 도림을 우선시했을 도준이 자신을 찾아온 상황이 재하는 불편했다. 등에 달라붙은 뜨끈한 껌딱지를 떼려 몸을 비틀면서도 도준의 상태를 살폈다. 초능력 같은 힘이 생기면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하는 중이었다.
“거기 너, 재하한테서 떨어져.”
금세 호흡이 안정된 도준이 곧장 지호와 재하에게로 다가왔다. 그 기세가 상당해 재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보였다. 도준이 멈칫하는 걸 보고 안심한 재하가 빠르게 입을 털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봐. 얘는 개…… 아니, 견지호라고 우리 과 후배. 너도 알 거야.”
“아. 개호구나. 그래서? 쟤가 왜 여기 있어?”
기껏 본명을 말해 줬는데도 도준은 덤덤하게 지호의 별명을 언급했다. 정작 그 말을 들은 지호는 재하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굴었다.
“재하 선배님이 절 잔뜩 유혹해 놓고 방치하셔서요.”
“뭐, 인마? 누가 누굴 유혹해? 이 손이나 좀 놓고 떨어져!”
이 새끼도 정신이 나갔나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자신의 허리와 어깨를 끌어안은 지호의 팔을 난타하듯 두드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실은 걱정되니까 보러 온 거예요. 오늘 여기저기서 폭탄도 터지고 어수선하길래 괜찮으신지 확인하러 온 건데…… 여기도 폭탄이 터지고 있더라고요.”
생각보다 폭발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거리가 워낙 가까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호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을 터.
도준 역시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지호를 향한 경계가 한풀 꺾였다. 지호를 마구 두드리던 손 역시 슬그머니 멈췄으나 재하는 등 전체에 달라붙은 뜨거운 체온이 불쾌했다.
“구해 줘서 고마운데, 고마움이 징그러움으로 바뀌기 직전이거든. 이제 좀 떨어져 주라.”
“선배님, 다른 여친들은 고맙다고 뽀뽀해 주던데요.”
“어, 그래. 여친들한테 가서 더 받고. 우린 악수나 하고 떨어지지 않을래?”
튀어나오려는 욕을 참아 내고 침착하게 대응한 건 재하 딴에는 큰 노력이었다. 지호와 떨어지고자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정면에 선 도준에게 팔을 내밀었다.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익숙한 친구 도준이 재하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지호는 재하를 놓아주긴커녕 더 꼬옥 끌어안았다.
“재하 선배님, 자꾸 튕기시면 저 진심이 돼 버리거든요.”
“악! 제발! 그런 말은 니 여친 후보들한테 가서 써먹으라고!”
“아무리 개호라고 불린다지만, 아무 데나 찝쩍대면 진짜 개인 거지.”
도준과 팔을 맞잡은 재하는 여전히 제 허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는 지호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혔다.
“견지호, 재하를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주도준 선배님이야말로 재하 선배님 대리인도 아니시면서 끼어드는 거 좀 별론데요.”
“보다시피 우리가 힘든 일이 있어서 좀 쉬어야 해. 그 팔 좀 놓지.”
“제가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선배님이야말로 그 손 좀 놓으시죠.”
재하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으로 인해 피로도가 극한을 찍었다. 기가 쪽쪽 빨려 나가는 것처럼 기운이 빠져나갔다.
“있잖아, 얘들아. 일단 둘 다 좀 놔주지 않을래?”
종일 여러 일이 있기는 했어도 유난히 더 피곤했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갑자기 나타난 견지호는 수상할 정도로 달라붙고, 돕겠다는 도준 역시 지나치게 자신과 접촉한 상태였다.
“쟤가 놔야지.”
“선배가 놓으셔야죠. 친구보다 연인 후보가 더 가까운 거니까.”
“아, 쫌! 놓으라고! 힘들어 죽겠네!”
기껏 도와준 지호에게 진심으로 짜증을 내 버린 재하는 아차 싶었다. 걱정과 달리 지호는 적정선을 알아채는 게 빨랐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지호의 팔이 풀리자 자신의 팔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잡아당기던 도준에게로 끌려가듯 안겨 버렸다. 결국, 지호의 품에서 도준의 품으로 옮겨 온 것뿐이었다.
그래도 달콤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능글맞게 비비적거리는 지호보다야 담백하게 붙잡아 주는 도준이 훨씬 편했다. 그래서 그런지 둘에게 잡혀 있을 때보다 덜 피곤했다.
“지호 너, 어떻게 알고 갑자기 나타난 건지 몰라도…….”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요, 재하 선배님.”
“꼬시는 멘트 말고. 그런 거 말고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질문을 기다리는 지호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 모습에 오히려 묻기가 곤란해졌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초능력자가 돼서 사람을 터트리고 방어 막을 세우거나 하늘을 날아오르는 상황을 물어본다 한들 답을 알고 있을까.
질문을 고르느라 입술만 달싹이는 재하를 향해 지호가 여유로운 미소로 먼저 말을 꺼냈다.
“거미한테 안 물렸고요. 방사능에 노출되지도 않았어요. 엄마가 외계인도 아니시고. 또…….”
“그런 거 말고. 너도 검은 균열을 본 거지?”
“선배님도 보셨나 보군요.”
“봤지. 아무래도 그게 너희들한테 생긴 초능력이랑 관계있는 거 아닐까 해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역시 저희는 통하나 봐요.”
“어, 그러냐? 여기 도준이도 그럴 테니 삼각관계네.”
휩쓸리지 않으려 가만히 있는 도준을 끼워 넣자 예상과 달리 지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하. 소꿉친구 커플 사이에 끼는 거 꽤 자극적이겠는데요.”
“시이발…….”
수시로 플러팅을 해 오는 지호에게 툭 하니 던진 말이 폭탄이 돼서 날아왔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재하의 멘탈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와 달리 지호는 고개까지 가볍게 끄덕이며 보조개가 팰 정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롭네요. 여친 쪽에서 양다리 치는 건 못 봤는데. 첫 남자 친구가 생기니 새로운 경험도 하고 즐거워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좀 해라.”
“그만하자고요? 선배님, 설마 지금 저 먹버 하시는 거예요?”
“아, 진짜 뭔 개소리냐고!”
질색하는 재하의 반응에도 지호는 꿋꿋하게 제 주장을 펼쳤다.
“그야 선배님 솜씨로 제 위장을 포로로 만드셨잖아요. 전 선배님이 가져다준 음식에 푹 빠졌는걸요.”
“그렇게 따지면 얘도 엄청 먹였거든?”
“선배님, 바람둥이……. 우린 정말 잘 맞는 거 같아요.”
“아악! 아니라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지호의 뻔뻔한 태도에 재하는 미칠 것 같았다.
“재하 너, 너무 여기저기 퍼 주는 거 아닌가 싶다.”
도준의 진지한 반응에 재하는 진심으로 황당해졌다.
영우한테 줄 때도 암말 안 하더니 이제 와서 왜 이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게다가 가장 많은 음식을 받아 간 건 도준이었다.
“선배님, 지금 우리 집에 가실래요? 재료는 제가 준비할게요.”
“개호라서 그런지 먹는 거에 집착이 심한데.”
“아니, 도준이 넌 별명 같은 걸로 비꼬고 그러는 성격 아니잖냐.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오늘따라 힘든 일이 많기는 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도준이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영우는 폭탄을 쓰질 않나, 그 와중에 도준은 자신과 도림을 지키느라 더 힘들었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하는 다시금 도림의 부재를 깨달았다.
“악, 도림이!”
“아.”
“앨 혼자 두고 무슨 헛소리나 하고 있는 거냐고, 이 무심한 오빠 놈아!”
도준에게 붙잡힌 재하가 머리로 어깨며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자 그 역시 당황한 듯 움직이려 했다.
“놓고 가, 놓고.”
확실히 도준도 제정신이 아닌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이동하려다 걸음이 뒤엉켰다. 이제 보니 다리도 좀 풀린 거 같고. 한꺼번에 십여 층을 뛰어오르느라 무리한 게 보였다.
옥상 문을 지나가려던 재하는 팔을 가볍게 잡아 오는 느낌에 눈을 깜박였다. 고작 그것만으로 풍경이 바뀌며 1층에 도착해 있었다. 마치 조금 전 1층에서 옥상으로 올라왔던 것처럼.
지호의 능력인지 물으려던 재하는 1층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조는 도림을 발견했다. 재하가 도림에게 향하는 걸 확인한 도준은 동생에게 씌워 둔 방어 막을 해제했다.
“도림아, 이리 와.”
“우웅…… 오빠?”
재하가 도림을 챙겨 안아 드는 모습은 다정한 남매처럼 보였다. 순한 이미지가 비슷해 도준보다 도림과 더 남매 같았다.
“혼자 둬서 미안해.”
“웅…… 졸려.”
“그래, 계속 자. 오빠가 데려다줄게.”
자다 깬 도림을 귀여워하던 재하의 귀에 사이렌 소리가 들려 그는 의아했다. 소리를 들은 건 재하만이 아니었다.
아파트 입구로 경찰차를 비롯해 커다란 차량까지 들이닥쳤다. 마치 조금 전 영우를 둘러싸던 때의 반복처럼 보였다.
설마 이번엔 시간을 되돌리는 초능력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으나 다행히 영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과 경찰까지 주위를 살피면서도 세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험악한 기세였던 경찰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과 졸음을 못 이겨 하품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폭발물 신고가 들어와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은 어리둥절했으나 도준이 먼저 의문점을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범인 체포와 수사는 따로 출동하시나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말 그대로인데요? 아까 오신 분들은 체포만 하셨으니까요.”
어리둥절한 재하와 심각해지는 도준의 얼굴을 본 경찰이 다급해졌다.
“아까 누가 와서 범인을 체포했습니까? 목격하신 게 있다면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마치 영우의 구속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한 경찰의 반응에 재하와 도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기…… 선배가 체포됐는데도 조사가 급한 건가요?”
도림을 집에 데려다주고 싶어 가볍게 물은 재하의 질문에 경찰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언급하신 선배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나, 출동 후 최초 목격자인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영우를 데려간 경찰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이 경찰이 맞기는 한 건지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