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재하는 여전히 재윤의 회귀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출 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 휩쓸리기엔 나이가 들어 버렸다. 그런데도 재윤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는 건 동생을 향한 형의 의리 같은 거였다. 더불어 회귀를 믿지 않는 거지, 재윤과 해일이 언급하거나 보여 준 마술 같은 초능력은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기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재윤이 언급한 ‘아웃렛 사고’는 반년 뒤의 일이라고 해도 꺼림칙했다. 재하는 도준을 만나자마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야, 오늘 아웃렛 말고 가까운 데로 안 갈래?”
“도림이 옷 사러 가야 하는데. 가까운 데 갈 만한 곳 있어?”
“응, 내가 다 찾아 놨지. 도림아, 예쁜 거 먹으러 갈래?”
“예쁜 거 좋아!”
일단 예쁜 거로 도림을 꼬신 재하는 도준과 함께 미리 봐 둔 가게로 향했다.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게 아닌, 걸어서 20여 분 거리의 작은 상가 골목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도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도림아, 토끼 아이스크림 먹을래?”
“토끼? 조아!”
양쪽으로 도준과 재하의 손을 잡은 채 삐죽이던 도림은 동물 모양으로 꾸며진 아이스크림을 받고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어, 도림아?”
“응, 맛있어. 귀여워.”
콧노래까지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쯤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옷 가게에 도착했다. 다행히 귀여운 가게 인테리어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도림은 발을 동동 구르며 흥분했다.
“오빠, 여기 인형의 집 같아. 들어가도 돼?”
“그래. 너무 막 만지지는 말고.”
도준의 허락에 옷 가게로 들어간 도림은 살랑이는 원피스 차림의 사장을 보고 더욱 흥분했다.
“언니, 공주님이에요?”
“그럼요. 꼬마 공주님, 우리 가게에 잘 왔어요.”
아이를 대하는 게 능숙한 사장의 태도에 도림은 더욱 신이 났다. 바깥에서 볼 때보다 다양한 옷과 소품에 안 그래도 커다란 도림의 눈이 반짝였다.
“옷 예뻐. 다 입어 보고 싶어요, 언니.”
“천천히 봐요, 꼬마 공주님.”
상냥한 사장의 응대에 신이 난 도림이 작은 가게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한눈에 보이는 가게 안이었기에 아이를 잃어버릴 걱정이 없는 데다 다른 손님도 없어 안심이었다. 눈이 마주친 사장 역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아웃렛보다 편안함을 느낀 도준은 도림을 지켜보며 안도했다.
“도림이가 좋아해서 다행이야. 동네에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 어떻게 알았어?”
“멀리 가면 힘들 거 같아서 찾아보니까 있더라고.”
새로 생긴 아웃렛이 아닌 동네 옷 가게를 급히 찾은 건 재윤의 경고가 신경 쓰여서였다. 다행히 취향에 맞았는지 도준과 도림이 기뻐했다. 재하 역시 찜찜한 재윤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는 뿌듯함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차. 한 시간 연락.’
도림과 도준이 화사한 드레스와 튼튼해 보이는 멜빵바지를 두고 가볍게 실랑이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던 재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꼬박꼬박 재윤의 요구대로 연락을 주고받는 상황만 봐도 재하는 제법 동생의 말을 신뢰했다. 다만 얼토당토않은 수준의 말들은 도저히 상식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
최근에는 식사할 때나 마주칠 때마다 ‘누구든 에스퍼가 될 수 있다.’라거나 ‘어디에나 그들은 있다.’ 혹은 ‘지금은 일반인이어도 갑자기 에스퍼로 각성할 수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해 왔다.
회귀에 이어 에스퍼에 심취한 동생의 진지함에 재하는 어쩔 수 없이 새겨들어 두었다.
더불어 재윤은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그게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꼭 자신에게 연락하라 했다.
“……허공이 왜 일렁거려?”
바로 지금과 같은 현상을 목격했을 때겠지 싶어 재하의 손이 저절로 재윤의 이름을 연타했다.
안 그래도 한 시간이 넘은 상황이었다. 평소라면 재윤 쪽에서 대답하라며 연신 톡을 보내와야 했는데 조용했다. 이쪽에서 보낸 톡도 확인하지 않았다.
허공의 일렁임이 조금씩 강해지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그날 해일과 재윤이 벽을 통과한 것과 같은 통로가 생겨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마술 같은 게 아니라 실재하는 현상이었다는 걸까? 저런 게 던전을 통과하는 장소라면 허공을 통해 무언가 오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재윤이 말이 사실이었다고?”
저게 던전이고 통로라면 마수의 존재도 사실이란 의미였다.
“오빠, 여기 너무 조아!”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도림의 웃음소리에 재하는 정신을 차렸다.
가게 문턱에 서 있던 재하가 안을 들여다보니 한쪽에 수북이 쌓이는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코가 둥근 구두를 각각 다른 색을 신고 거울에 비춰 보는 도림은 너무도 귀여웠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도준에게 다가간 재하는 티 나지 않게 옆구리를 찔렀다.
“너도 저거 보여?”
“응? 뭐?”
허공을 가리키자 도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잘 보이지 않는지 재하를 지나 입구에 가까워져서야 알아챘다.
“아지랑이?”
“야, 무슨 아지랑이가 허공에만 피냐?”
“그럼 저게 뭐…… 어?”
평화로운 공간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감탄사가 나와 버렸다. 놀란 도준을 따라 재하가 돌아보자 일렁이던 허공이 갈라지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빨랐다. 하필 가게 입구와 골목 사이에 생긴 균열에 재하는 도준을 안으로 끌어당겼다. 열려 있던 가게 문까지 닫고 나서야 재하는 뒤로 물러섰다. 고작 유리문 하나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저 균열이 뭔지도 모른 상황에서 가까이 갈 생각은 없었다.
“재하야?”
“넌 도림이 챙겨. 저거 자꾸 커진다.”
긴장한 재하의 모습에 도준 역시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옷을 보며 신나 하던 도림을 도준이 끌어안으며 구석으로 물러나자 도림이 불만스러워했다.
“아직 옷 더 입어 봐야 하는데.”
“도림아, 잠깐만. 오빠랑 잠깐만 쉬자.”
“나 안 힘들어. 더 입어 볼래.”
도림이 억지를 부리자 도준은 곤란해했다. 재하는 주변을 살피다 박스와 대걸레 등을 찾아 와 입구를 막았다.
더불어 이 상황을 재윤이 알 것 같다는 생각에 톡을 보냈다. 전화는 받지 않으니 제발 빨리 톡을 봐 주길 바랄 뿐이었다.
“제발 빨리 좀 봐라.”
재하와 도준이 심각해진 모습에 가게 사장은 조심스럽게 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밖에 뭐가 있나요?”
재윤은 부지런히 입구를 막기 위해 움직이며 다급히 말했다.
“사장님, 경찰이나 119, 어디든 신고 좀 해 주실래요?”
“왜, 왜요? 밖에 진짜 뭐가 있어요?”
“이 상황을 말로 하면 안 믿을 거 같으니까 저거 찍어서 보내 보세요.”
“네? 뭘…… 찍어요?”
어리바리한 사장의 말에 재하는 답답했다. 지금도 일렁임을 키워 가며 불길하게 벌어지는 균열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저기 허공이요. 찢어졌잖아요.”
“네? 허공이 찢어져요?”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만 하는 사장의 반응에 재하가 어이없어 돌아보는데 도림 역시 이쪽을 보면서도 발만 까닥거리며 지루해할 뿐이었다. 마치 저 균열이 안 보이는 것처럼.
“도림아, 혹시 너도 이거 안 보여?”
“벽. 해바라기 그림!”
활짝 웃으며 답하는 도림의 대답에 재하는 허공이 일렁여 제 눈에는 뭉개진 것처럼 보이는 노란색이 해바라기 그림임을 짐작했다.
‘설마 이거 남자한테만 보이는 건가?’
재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도준 역시 더 심각해졌다.
저게 무엇이든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이 세상 것이 아닐 것 같았다. 이런 짐작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왔다.
재하와 도준이 굳어 있자 사장이 뒷걸음질 치며 불안해했다.
“두 분, 장난치시는 거면 그만 나가 주세요. 계속 이러시면 정말 신고할 거예요.”
어린 여자아이와 함께 온 대학생 남자들을 향해 작게나마 호의를 가졌던 사장의 눈은 불안으로 흔들렸다.
어느새 구석으로 물러선 사장과 도준에게 안긴 채 칭얼대기 시작한 도림의 모습에 재하는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끼이이.
균열이 뒤틀리며 기이한 소리를 내자 재하는 도준을 돌아보았다. 도준 역시 그 소리가 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사장과 도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까톡.
긴장감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무엇보다도 기다렸던 소식이었다.
최대한 떨어져. 건드리지 마. 시한폭탄 같은 거야. 시간 지나면 터져.
폰을 확인한 재하가 황급히 안쪽으로 내달렸다.
“여기 창고나 숨을 곳 없나요? 어디든 더 안쪽으로 피해야 해요.”
“꺅! 이러지 마세요!”
달려드는 재하를 본 사장이 놀라 옷걸이 사이 커튼 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곳에 공간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재하의 귀에 안쪽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미친.”
사장으로선 대학생 손님이 강도로 변한 것과 진배없는 상황일 수 있었으나 재하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다. 힘으로 밀어 볼까 하다 철문인 걸 보고 바로 포기했다.
마땅히 피할 곳이 보이지 않자 재하는 정신없이 옷들을 끌어모아 도림의 위에 덮어씌웠다.
“재하야, 왜 그래? 혹시 저게 뭔지 알아?”
“터질 수도 있대. 건드리면 안 되고. 가까이 가도 안 된대.”
“누가? 저게 뭔데?”
“너도 얼굴이라도 좀 가려. 더 구석으로 가고.”
재하의 말에 도준은 의심하기는커녕 흘러내리는 옷가지로 도림을 감싸고 등을 돌렸다. 재하는 옷걸이와 마네킹까지 끌어와 어떻게든 균열과 그들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너무도 허술해서 정말 터진다면 무사하기 힘들 것 같았다. 특히 유리로 된 벽과 문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도망친 사장이 경찰이든 어디에 신고해서 누군가 와 주길 바랐다.
끼이이이이.
유리나 쇠를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점점 커졌다. 도준과 재하의 안색이 창백해지는데도 품에 안긴 도림은 덥다며 칭얼거렸다.
다른 때라면 도림을 편하게 해 줬을 도준이 이를 악물고 옷가지와 몸으로 도림을 감싸 안았다.
저게 뭔지 몰라도 터지는 거라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세로로 찢어진 균열이 사방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재하야.”
“왜? 아오, 뭐 쓸 만한 게 없냐.”
“저거 터지면 큰일 날 거 같은데.”
“아씨, 일부러 안 보고 있는데 그걸 솔직하게 말해야겠냐?”
더는 쓸 만한 게 보이지 않아 재하는 도준이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았다. 입구 쪽에 생겨난 균열이 사람 몸통만큼 벌어지며 시뻘건 속을 드러내는 걸 보고 말았다.
붉게 달아오르다 시커멓게 가라앉길 반복하던 속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며 긁는 소리 역시 커졌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 끼이이이이이이이이.
재하는 무의미한 쌓기를 포기하고 도림과 도준에게로 달려왔다. 이미 한가득 옷가지로 감싼 도림을 끌어안은 도준의 반대편에서 그들을 감싸 안았다.
희생정신이고 뭐고 본능이었다. 가장 작고 연약한 도림을 감싸야 한다는 본능이 균열에 등을 내보인 채 그들을 끌어안게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도림조차도 오빠들의 심각한 모습에 칭얼거림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괴로운 소음이 마지막을 알리려는 듯 빈틈없이 울려 댔다.
“시발, 도림이가 못 들어서 다행이네.”
덜덜 떨리는 속을 감추려 내뱉은 재하의 말에 도준의 굳어 있던 얼굴이 미약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그의 눈에 재하의 어깨 너머로 시뻘건 속을 완전히 드러낸 원형의 공간이 부풀어 오르는 게 비쳤다.
도림을 감싸 안고 있던 도준의 손이 재하의 머리와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도준도 몰랐던 본능이 만든 행동이었다.
대격변의 날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