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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격변의 날
재하는 그런 해일을 보며 이 사람도 만만치 않은 게임 중독이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지금은 말고 나중에 놀아요. 안심해서 그런지 갑자기 졸리네요.”
하품하는 재하를 보며 해일은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재하가 잠들고 내일 재윤이 돌아오면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기 힘들 수 있었다. 절호의 기회를 이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요. 혹시 재윤이 검사 결과에 따라 정신 병원에 갇히거나 하는 건 아니죠?”
살짝 겁먹은 눈을 한 재하의 질문에 해일의 올곧던 미소가 흐트러졌다. 호텔처럼 보여도 감시 카메라가 산재해 있고, 방금 헤어진 재윤이 검사를 받는 모습을 보여 줬음에도 재하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일반적인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문득 레드 맨티스의 머리통을 들고 형에게 증거로 보여 줘야 한다던 재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하는 에스퍼의 존재를 믿지 않는군요.”
“엇, 아니에요. 믿어요. 어느 정도는.”
아마도 재하가 말하는 건 마술사의 눈속임 정도가 아닐까. 해일의 씁쓸한 미소에 재하가 허둥지둥 그의 손을 붙잡고 펼치게 했다. 손이 닿자 청량한 기운이 스며들듯 해일을 무장 해제 시켜 왔다.
“길마 형 손에 아무 장치도 없는데 불을 피울 수 있잖아요. 마술 같지만, 일반적인 마술은 아닌 거 같아요.”
재하는 애써 해일을 위로하고 그의 말을 믿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하가 이토록 노력하는 이유는 결국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제법 증거를 보여 준 것 같은데도 재하는 강경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렇다 할 증거를 제대로 보이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해일은 지금이라도 실험실로 데려가 더욱 강력한 불을 보여 줘야 하나 고민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해일이 붙잡고 있던 재하의 손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려 했다. 다급해진 해일은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재하의 관심을 끌어왔다.
“재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불을 피워 봤자 현실에 존재할 수 있기에 재하에겐 마술 취급 당했다.
해일은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던전에서 구한 대부분의 아이템은 회사 연구 팀에 제출했지만, 다행히 사용할 일 없어 남아 있던 작은 포션이 손에 잡혔다. 해독 포션과 회복 포션 중 눈에 보이는 효과는 회복 포션 쪽이 월등했다.
“재하, 이건 회복 포션입니다.”
손가락 길이만 한 투명 용기에 분홍색 액체가 찰랑였다.
“와, 이건 무슨 음료를 넣은 거예요? 색깔 진짜 잘 뽑혔네요.”
코스프레에 진심이구나, 이 사람.
재하의 눈에 비친 생각이 빤히 읽혀 해일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졌다. 재하를 붙잡은 손을 통해 그간 힘을 사용할 때마다 쌓여 왔던 체내의 열기가 흩어졌다. 끝날 기약 없는 불편함이 해소되는 감각은 해일을 무장 해제 시켰다.
“포션의 성분은 정확하게 공유하기 힘들지만, 이 정도는 던전 식물을 조합하면 제조할 수 있습니다. 성능이 좋은 건 아이템으로 나온 포션이고요.”
“제조 초급 포션 같은 거네요? 성능은요?”
눈을 빛내며 질문하는 재하에게서 믿음보다는 즐거움이 느껴졌다. 게임 설정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해일은 그런 재하가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기에 웃으며 답했다.
“이 정도 양이면 손가락 한 개 정도는 쉽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해일이 테이블 위에 손가락 하나를 얹으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재하에게 상냥하게 어필했다.
“그러니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무슨…… 자, 잠깐만요.”
테이블에 얹은 해일의 손가락 위로 재하의 손이 얹어졌다. 이미 잡고 있던 손뿐 아니라 양손이 닿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뭉쳐 있던 기운이 풀어짐을 느꼈다. 해일은 증거를 보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재하가 조심스레 붙잡아 오는 감촉과 청량한 기운에 푹 빠져들었다.
“길마 형.”
“네, 재하.”
“저한테 뭘 보여 주시려던 건지 몰라도 계속 모른 채로 있고 싶은데요.”
“네.”
덤덤하게 답해 오는 해일과 달리 재하는 방금 끔찍한 걸 목격할 뻔한 게 아닌가 싶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하는 척일지도 모르나 해일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동생만 컨셉에 충실한 줄 알았더니 게임 중독으로 보이는 길마 역시 방심할 수 없었다.
“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길마 형은 진짜 진지해서 해 버릴 거 같단 말이죠.”
“안 하겠습니다.”
해일이 순순히 답했음에도 재하는 불안한지 손가락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덕분에 해일은 저도 모르게 느슨하게 입가가 풀어지며 미소를 보였다. 해일의 옅은 미소는 듬직하면서 믿음직해 보였으나 지금은 통하지 않았다.
“아, 진짜. 길마 형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재하, 놀란 것 같습니다.”
의아해하는 해일의 반응에 재하는 황당해졌다. 덤덤하게 스스로 손가락을 부러뜨리려던 사람이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해일이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려 했다는 게 재하는 충격이었다. 시늉일 뿐일 수도 있지만, 해일의 태도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나 믿고 있는 일을 재하도 일단은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 * *
리조트로밖에 보이지 않던 검진 센터를 다녀온 이후에도 재하 형제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재윤은 때때로 새로운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지만, 여전히 재하는 믿는 둥 마는 둥 했다. 재윤은 형의 안위를 살피면서도 틈틈이 해일을 만났다. 새벽이 되면 재하는 언제나처럼 해일과 레이드를 돌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대격변의 날.
“으어, 피곤해…….”
대격변의 날 아침은 여느 때와 같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주말 아침은 게으른 기지개로 시작됐다.
“으으, 눈이 안 떠져.”
뻑뻑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온 재하는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최근 레이드에 진심이 된 해일과 매일 새벽까지 달리느라 잠이 부족했다. 게임 센스가 좋은 해일과의 사냥은 폭업과 레어 아이템을 쏟아 냈기에 재하 역시 신이 나서 새벽 내내 달리곤 했다. 그나마 블랙 피그 육포 효과 덕에 예전에 비해 꽤 버티는데도 한계가 왔다.
“후아암…… 졸려.”
“주말인데 더 자.”
재하를 걱정하며 물을 건네는 재윤은 이미 나갈 준비가 끝나 있었다. 다 죽어 가는 재하와 달리 쌩쌩해 보이기까지 했다.
“넌 오늘도 동굴 탐험가냐?”
리조트에 하루 머문 다음 날부터 재윤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어디 가냐 물으니 해일을 만나 던전인지 동굴인지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낮에는 동생과 만나고 밤에는 게임에 접속해 새벽까지 깨어 있는 해일을 보면 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건지 신기했다.
“응, 비슷해. 형은 왜 벌써 일어났어?”
“외출 약속 있어서.”
“어디 가는데?”
“새로 오픈한 아웃렛인가 뭔가. 하암…….”
“거길 형이 왜 가?”
쇼핑에 취미 없는 형제는 대부분의 쇼핑은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굳이 약속까지 잡고 쇼핑을 하는 건 재하답지 않았다.
“봄옷 산다고 해서.”
“누구랑?”
“도…….”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 연이어지자 하품하며 답하던 재하의 입이 달싹였다. 단마디였지만, 재윤은 재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재하가 바로 앉으며 항의했다.
“야, 뭔데. 유도 심문 한 거냐?”
“아니, 평범하게 질문한 건데.”
“그런데 왜 째려보냐? 친구랑 옷 사러 가면 안 돼?”
“형 옷 살 거면 나랑 가.”
“내 옷 살 거 아냐.”
“형, 설마…….”
재윤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걸 알아챈 재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도림이 키가 3㎝나 컸대. 도준이 센스가 영 별로잖냐. 저번처럼 녹색 티셔츠 같은 거나 사 오면 도림이 울 거야.”
“그걸 형이 왜 신경 써?”
“아, 이러다 늦겠네. 너도 빨리 가 봐. 길마 형 기다리겠다. 나도 후딱 씻고 나가야지.”
최근 재하와 재윤의 대화 패턴을 생각하면 동생이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됐다. 상상력이 얼마나 좋은지 조금만 지체해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며 자신의 외출을 가로막고는 했다.
“형, 나랑 같이…….”
“선약 우선인 거 몰라?”
툭하면 따라붙는 재윤을 안심시키고자 학교와 집만 오갔는데도 주말 외출에서 딱 걸려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약속을 엎을 생각은 없었기에 재하는 최대한 모른 척 움직였다.
“늦기 전에 빨리 준비해야겠네. 양말이 어딨더라.”
당연히 항상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재하는 어떻게든 재윤을 외면하며 입을 옷을 챙겼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재윤이 어쩐 일인지 한발 물러섰다.
“나갈 거면 약속 장소 바꾸는 편이 나을 거야.”
약속 상대인 도준을 바꾸는 게 아닌 장소를 바꾸란 말에 재하는 의아해했다.
“장소는 왜? 오픈 세일 한다던데.”
“오늘은 아니지만, 사고가 날 거라.”
회귀에 이어 예지까지 하는 건가.
미덥지 않아 하는 재하의 게슴츠레한 시선에 재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형이 꼬맹이 이뻐하는 거 알아. 그러니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잖아.”
“그래서 언제 사고가 나는데?”
“반년 내로.”
여름엔 물가에 가지 마, 라는 점쟁이의 말을 들은 심정이었다. 혹은 너희 할머니 댁에 감나무 있지? 라든가. 재하가 영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자 여유롭게 웃어 보인 재윤이 밖으로 향했다.
“해 지기 전에 들어와.”
“니가 왜 내 통금을 정하냐?”
“한 시간마다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아오, 차라리 위치 추적기를 달지 그래.”
“아, 맞다. 이거 껴.”
위치 추적기를 이야기하자마자 팔찌를 던져 주는 재윤의 행동에 재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였다.
“뭔데? 이거 위치 추적기냐?”
“그건 진즉 달았지.”
“……농담이지?”
“응, 농담.”
왜 농담이라면서 웃는 게 더 진짜 같은지 오싹해졌다.
그래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돌아와 자신을 붙잡고 지켜 주겠다며 울먹이던 때에 비하면 농담이나 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이걸 진짜 하라고?”
“응.”
“으, 액세서리 같은 건 취미 없는데.”
재하가 팔찌를 들고만 있자 재윤은 계속 지켜봤다. 재촉하는 기색도 없이 무심한 시선을 주는 재윤을 보니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 같았다. 지난번엔 귀걸이를 주길래 질색팔색하며 거절했더니 이번엔 팔찌를 가져온 건가 싶기도 했다.
동생의 반복되는 선물을 거절하는 게 미안하기는 했다. 재하는 어색하게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변명했다.
“이런 건 좀 화려한 애들이나 하는 거지. 나랑 안 어울리잖냐.”
“어울려. 이왕이면 그 팔찌랑 세트인 귀걸이랑 목걸이도 하면 좋은데.”
재윤은 진심으로 평범한 재하를 보석으로 풀 세팅 할 생각이었다. 동생의 눈에서 진심을 읽은 재하는 필사적으로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과하다니까! 그, 그래. 반지, 반지면 또 모를까.”
“반지가 가지고 싶었어?”
“그래, 팔찌는 가져가고 차라리 반지 같은 걸 주면…….”
“자, 여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윤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당황한 재하가 입만 뻐끔대는 사이 재윤은 팔찌를 붙잡고 있던 재하의 손을 끌어당겼다. 재윤은 주먹 쥔 재하의 손을 펼쳐 팔찌는 팔찌대로 손목에 끼워 주고 손가락에 반지까지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두 개의 액세서리를 끼게 된 재하가 어정쩡하게 손을 편 채 굳어 있는데도 재윤은 태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반지는 형이 싫어하는 줄 알았어. 안 그래도 형한테 주고 싶었는데 다행이야.”
“……갑자기 반지가 왜 튀어나오는데?”
황당해서 되물은 것뿐이었으나 재윤은 성실하게 답해 왔다.
“형한테 증거로 보여 주려고 레드 맨티스를 잡았더니 보상으로 나온 거야. 랜덤 상자인 데다 하급이라 별 기대는 없었는데 딱 원하던 게 나왔어.”
진심으로 기뻐하는 재윤의 웃는 얼굴에 재하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짝이는 반지가 상당히 좋은 물건인가 싶어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이리저리 돌려 봐도 부담스럽게 반짝일 뿐 평범한 반지였다.
“이 반지, 뭐 특별한 기능이라도 있냐?”
“그 반지는 스킬 사용할 때 이펙트가 생기는 거라 지금은 별로 도움은 안 될 거야.”
“……뭐냐, 그 날지 못하는 천사 날개 같은 뽀대템 같은 건.”
재윤이 무척이나 기뻐하길래 되게 좋은 템인 줄 알았던 재하는 허탈해졌다. 어차피 자신은 스킬을 쓸 일이 없으니 반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재하는 문득 자신이 재윤의 말을 상당히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야, 빨리 가라. 이러다 둘 다 늦겠어.”
머쓱해진 재하가 내쫓듯 손짓하자 밖으로 향하던 재윤이 가볍게 저녁 메뉴를 언급했다.
“형, 저녁에 고추장찌개 해 줘.”
“먹고 들어와라, 좀.”
“냉동실의 블랙 피그 써야 한다며. 부탁할게, 형.”
권태기 부부의 대화처럼 투덜거리는 재하의 답에도 재윤은 되레 뻔뻔하게 굴었다.
재윤이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재하는 입으려던 옷을 살폈다. 위치 추적기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농담이었지만, 재윤의 태연한 반응이 오히려 수상했다. 옷깃이나 소매 등을 꼼꼼히 살폈으나 영화에서 봤던 수상해 보이는 장치 같은 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도 일체형이라 뭘 넣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휴, 진짜인 줄 알았네.”
한바탕 방을 뒤집어 놓은 후에야 농담임을 확신한 재하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잠시 노려보던 재하는 재빨리 빼내어 서랍에 넣어 버렸다. 팔찌는 옷소매에 가려져 그럭저럭 할 만했지만,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는 민망해서 차마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