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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블랙 피그는 에스퍼로 각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잡게 되는 몬스터로, 섭취가 가능한 마물이었다. 맛 역시 굉장해서 거부감 또한 거의 없었다.
다만, 특수 처리 없이 섭취하면 일반인은 통증이나 불편함을 호소했다. 마나가 농축된 던전 마물을 먹는 건 에스퍼나 예비 각성자 정도였다. 그나마도 살코기에만 해당됐고, 내장은 여간해서는 처리가 먹히지 않았다.
권해일의 아버지는 연구 보고서를 보고도 심장을 섭취했다. 특수한 자극이 남다른 힘을 줄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해일이 새 심장을 가지고 찾을 때마다 휠체어 신세를 졌던 아버지가 걷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심장을 섭취할 때면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그에 반해 재하에게 맛을 물었을 때 맛있었다는 답을 들은 해일은 어쩌면 그의 각성이 가까워지지 않았나 추측했다.
시간 죽이기로 선택했던 게임에서 어쩌면 미래를 함께 헤쳐 나갈 동료, 혹은 이해자를 만날 수 있게 된 건 아닌가 싶어 다소 들뜨기도 했다. 그렇게 얻어 낸 최근 정보를 살피던 해일의 눈에 서재하가 아닌 서재윤의 이름이 몇 번이고 들어왔다.
인근 산에 위치한 미공개 던전의 일반인 출입. 블랙 피그를 능숙하게 해체한 흔적까지. 사각지대의 CCTV에 일부나마 찍힌 이는 서재윤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상세 정보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지.’
대충 굴러다니던 쇠 파이프로 블랙 피그를 잡고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칼로 도축한 솜씨가 일반인 수준이 아니라는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서재하의 대학에 찾아가 펼친 기행 역시 기록에 남아 있었다. 각성자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강했고, 능숙했다. 그러나 이전의 기록 어디에서도 미확인 각성자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각성자 수준의 일반인, 서재윤.
그가 다시 던전을 찾았다는 소식에 해일은 빠르게 접촉을 시도했고, 그 결과는 잭 팟이었다.
‘설마 미래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줄이야.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서재윤은 미래를 알고 있다.
해일은 재윤이 생각한 것처럼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재윤이 흘리는 정보들은 범상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재윤은 해일이 함께하겠다 확답한 직후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에스퍼 에너지, 혹은 마나라 불리는 힘을 사용할 때마다 불순물이 쌓이는 감각을 사라지게 할 방법이 있다는 걸.
‘있다면 반드시 가지고 싶다.’
던전 밖에서 힘을 사용할 때마다 몸속이 탁해지는 감각이 심각했다. 그로 인해 회사가 비밀리에 보유하고 키우던 에스퍼 중 대부분이 힘을 쓰는 걸 포기하거나 자멸했다.
해일이 각성했을 때는 던전에서의 마나 순환이 용이하다는 걸 회사 측에서 발견한 후였다. 힘을 키우려면 던전 안에서의 연습이 유일했다. 그런데도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고, 힘을 쓸 때마다 피로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던전 밖과 비교하면 물속과 물 밖 수준으로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밖에서 힘을 사용하는 건 지양해야 했다.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그간 받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해 왔고, 수시로 테스트를 해 왔다.
‘은혜는 무슨.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라고 할 땐 언제고. 각성하자마자 달려와서는…….’
회사를 떠올리던 해일의 시선이 다시금 재하에게로 옮겨 갔다.
덩치 큰 두 사람 사이에 앉은 재하는 평범한 성인 남성의 체구였음에도 더 작게만 보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재윤이 여전히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해일의 시선 역시 그 손에 머물렀다.
‘이렇게 보면 평범한데.’
악수를 핑계로 붙잡았던 재하의 손에서부터 넘어오는 청량감이 기꺼웠다. 온몸을 갉아먹어 오던 불쾌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해소되는 감각은 기묘하면서도 경탄할 일이었다.
어째서 재윤이 만나 보면 알 거라며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말로 해서 될 게 아니었다. 그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어떤 설명보다 확실했다.
에스퍼를 구원할 존재. 해일이 재하와 접촉한 후 느낀 확신이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재하를 처음 만나 악수를 한 순간부터 해일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입으론 평범하게 대화하면서도 정신은 온통 재하와 맞닿은 손에 쏠려 있었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잡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접촉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을 때는 손안의 감각을 놓치기 싫어 어정쩡하게 손을 펴고 있을 정도였다.
고작 한 번의 접촉에 재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둬 놓고 나만의 것으로 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지. 난 소중하게 지켜 낼 거라고 했고.’
해일이 틀렸고, 재윤의 말이 맞았다.
저 손이 다른 무엇도 붙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왜 내 손이 아닌 다른 걸 쥐고 있냐고 원망하고 싶어졌다. 이런 감정은 해일에게 낯선 감정이었기에 빠르게 갈무리했다.
‘욕심내지 마.’
권해일의 삶에 욕심이란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지우고 가라앉혀서 감춰야 하는 것. 욕심을 착실히 삼킨 해일은 그의 갈증을 해결해 줄 중요한 존재에게 집중했다.
재하와의 이해관계를 성립시키려면 에스퍼나 던전의 존재를 믿게 해야 했다. 재윤의 의도대로 증거를 보여 재하가 에스퍼와 던전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시 손을 잡는 걸 허락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묻고 싶었다.
당신도 나처럼 기분 좋았냐고.
또한 전하고 싶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서 처음으로 맞아 본 청량한 바람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는 걸.
당신이 제 고통을 지워 줄 진정한 구원자임을 호소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재하의 발밑에 무릎을 굽혀 매달리고 싶은 걸 참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해일은 더더욱 제 생각과 감정을 누르고 감췄다.
미래를 알고 있는 서재윤이 자신을 경계하지 않은 건 끝까지 이런 탐욕스러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다른 이들을 경계하는 건 이런 감정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일 테고.
원래도 침착한 해일이었지만, 더더욱 인내했다.
그에게 인내는 무엇보다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인내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해 온 게임이 중요한 이와의 접점이 되었다는 것 또한 무척이나 유리했다. 미래를 아는 자의 호의까지 얻은 마당에 해일은 경거망동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해일의 각오와 달리 재하는 모른 척하느라 곤란했다.
‘와, 대체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하는 거냐?’
사실 중간부터 재하는 재윤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과 은은하지만 집요한 해일의 시선을 알아챘다. 핸드폰에 집중한 이유도 두 사람 모두 부담스러워서였다.
다행히 도준과 영우가 번갈아 가며 안부와 함께 이 두 사람에 관해 물어 왔기에 적당히 대꾸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슬슬 더 할 말이 없어 고민할 때쯤, 부드럽게 달리던 차체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오, 드디어!”
차가 멈추자마자 후다닥 밖으로 나온 재하는 볼 거 하나 없는 야산 앞 공터에 어리둥절했다.
“어…… 여기예요?”
재윤과 해일은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했다. 중간쯤 재윤이 던전에 갈 거라고 언급해 주었고, 재하는 어디 굴이라도 데려가려나 싶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한 임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유지라는 의미로 밧줄이 어설프게 둘려 있고, 입구에 출입 금지 팻말이 박혀 있는 게 전부였다.
실망하는 재하의 팔을 해일이 가볍게 붙잡아 이끌었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재하.”
“아, 넵.”
임시 건물로 들어가니 임시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지하 계단이 있었다. 꽤 깊이 들어가자 넓은 지하실에 커다란 철문이 떡하니 자리했다. 서늘한 공기하며 한쪽에 놓인 코스프레 용품 같은 장비들까지. 재하는 첫인상의 실망감을 지우고 낯선 환경에 담력 시험하러 온 것처럼 살짝 들떴다.
재하의 이런 상태를 알아챈 재윤이 경고했다.
“형, 던전은 일반인이 들어갈 때 부작용이 좀 있어. 짧은 시간은 괜찮지만, 우리랑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그렇게 말하고는 문으로 다가가는 재윤을 재하가 급히 붙잡았다.
“넌?”
급히 붙잡는 재하의 행동에 재윤의 무뚝뚝하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형이 날 걱정해 주는 거 알아. 앞으론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닌데? 별로 걱정하는 건 아니고…….”
“난 괜찮으니까 항상 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줘.”
재하는 한마디 했을 뿐인데 재윤 쪽에선 알아서 감동이 줄줄 넘쳐흘렀다. 머쓱해진 재하가 입을 다물자 침묵 속에 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여기입니다.”
크고 무거워 보이는 문을 해일이 열어 주었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또다시 벽이었다. 보물이라도 지킬 것처럼 묵직한 철문을 달아 놓고 그냥 벽이라니. 재하가 눈을 굴리며 무슨 장치가 있나 찾는 동안 해일이 앞장서 맨 벽에 손을 대자 벽이 일렁였다.
“어? 벽이 움직여?”
이건 무슨 마술이냐며 신기해하는 재하에게 해일은 차분히 설명했다.
“재하, 던전 중에는 각성자에게만 반응하는 곳도 있습니다.”
“형, 이 사람이 있으니 우리도 들어갈 수 있어. 증거 보여 줄게, 들어가자.”
재윤은 해일의 어깨를 붙잡았고, 해일은 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하는 해일의 손이 닿은 벽이 일렁이는 걸 보며 감탄했다.
“후아…… 이거면 증거로 충분한 거 같은데.”
CG가 아니고서야 벽이 꿀렁댈 수는 없었다. 재하가 손을 잡지 않고 감탄만 하자 해일이 재윤에게 눈짓했다.
“형님이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
“그래서 미친놈들한테도 휘둘렸던 거겠죠. 착해 빠져서.”
“그렇군. 이해가 가.”
해일은 재하에게 깍듯한 것과 달리 재윤과는 편하게 대화했다. 두 사람이 아는 이야기만 하자 재하는 살짝 감정이 상해 삐죽거렸다.
“……둘이서 내 이야기 하는데 정작 난 왜 하나도 모르겠냐고.”
구시렁거리면서도 던전의 존재가 정말 있는지 궁금해진 재하는 여전히 제 쪽으로 내밀어진 해일의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