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동생이 가출한 지 3일째.
여전히 가득 찬 냉장고를 보는 재하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으…… 이러다 고기가 상하겠어.”
가출을 선언한 재윤보다 고기가 더 걱정되는 재하였다.
“겨울이면 베란다에 보관이라도 할 텐데. 이럴 때 가출하고 난리냐고, 진짜.”
고기 귀신인 재윤 없이 블랙 피그를 소진할 방도가 없었다. 김치 하나 꺼낼 틈 없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고기들은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이 산더미 같은 고기를 어쩌라고…….”
냉장실의 고기를 절친과 나누는 데 한계가 왔다.
장기간 보관 가능한 장조림은 김치 통에 만들어 놨고 김치찜도 곰솥으로 끓여 이제 재하의 집은 김치도 없다. 돼지 육포를 만들어 봤지만, 육포 공장이 된 것처럼 종일 치대고 굽고 말려도 아직 한참 남았다.
“육포 공장도 아니고…… 진짜 사람 살려라.”
떠넘길 사람이 필요했다.
가까이 사는 놈부터 하나씩 떠넘기자 싶어 연락처를 확인하는데 훅 하니 들어오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견지호.
“아, 그러고 보니 동생 놈이 얘랑 친해지라고 했지.”
하필 집도 걸어서 10분 거리라 가까웠다.
동생의 가출을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그게 될 리 없었다. 재윤의 믿지 못할 말은 전부 재하의 고민으로 남아 있었다.
“하필 개호냐고.”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불렸던 견지호의 별명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견지호는 여자 문제만 아니면 사실상 욕먹을 이유가 없었다.
선배에게 깍듯하게 굴었지만, 친하게 지내는 동성은 없었다. 동기는 물론 선후배 할 것 없이 조금 예쁘다 싶은 여자는 전부 쓸어 가는 통에 캠퍼스 커플을 꿈꾸던 남자 동기들은 좌절했다.
“대학까지 와서 남탕이라니.”
안 그래도 이 대학은 여자 숫자가 적었다. 거기에 생태파괴자 견지호 하나 때문에 남고 시절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흐음, 모임 핑계로 연락을 해 봐?”
대학에서 권장하는 여러 모임으로 인해 견지호 역시 과 정기 모임에 참여해야 했다. 그 연락 담당을 맡은 이들 중 누구도 견지호에게 연락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많은 여친 중 하나가 알려 주리라 여겨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톡이나 한번 보낼까…….”
동생이 삐진 걸 떠올리자 조금 더 용기가 났다. 거실을 서성이며 망설이다 한 솥 가득 끓여 둔 김치찜을 본 재하는 각오를 다졌다.
핸드폰에 문자를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간결하게 보내자 싶어 최대한 짧게 톡을 보냈다.
뭐해?
막상 보내고 나니 되게 애매하고 민망했다.
“아씨, 새벽에 전 여친한테 보내는 톡도 아니고.”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1이 사라졌다.
늦었구나 싶으면서도 재하는 애써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아니, 뭐 이상한 말은 아니잖아?”
뭐라고 반응이 올지 기다렸다.
자신의 이름이 저장은 돼 있는지 의심스러워 통성명부터 해야 했나 고민하는 동안 다소 느리게 답이 왔다.
저 열 나요. 약도 없고 생수도 떨어졌어요.
톡에서 애교가 느껴지는 것 같아 재하는 저도 모르게 목을 뒤로 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개호 새끼. 손가락이 없냐. 배달시키면 되지.”
진심으로 그리 답하려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사이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배도 고파요. 아침도 굶었어요.
‘아니지. 아프다며 먼저 납작 엎드리는 애한테 까칠하게 굴 필요 있나.’
어차피 고기를 떠넘길 대상이자 동생이 서로 친해졌으면 하던 상대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겸사겸사 약과 함께 음식 좀 던져 주면 그걸로 친분 형성 아니겠는가.
아픈 놈한테 고기 요리는 아닌가 싶으면서도 부실한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밀폐 용기에 꾸역꾸역 반찬과 고기 요리를 담았다. 간신히 빈 공간이 보이는 냉장고에 뿌듯함을 느끼는 건 덤이었다.
* * *
“와, 무슨 집이 이렇게 복잡해?”
공공재랑 다를 바 없는 견지호의 집은 찾기 쉬웠다.
소문대로 고급 오피스텔이라 건물까지는 아주 쉽게 찾아왔으나 출입구에서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갈 방법조차 찾지 못해 대혼란이었다.
입구가 어딘지 몰라 버벅대는데 양손에 반찬 통을 묵직하게 든 재하의 모습을 본 경비가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후배 보러 왔는데 견지호라고. 아, 이름 말해도 모르시겠지만…….”
“지호 학생이면 잘 알지요. 인기 많은 친구잖아요.”
견지호의 이름을 듣자마자 경비의 태도가 친근해졌다. 방문객 이름을 확인한 후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눌러 주는 과잉 친절을 보였다.
학교에서는 그렇게나 남자들의 미움을 받는 견지호였지만, 바깥에 나오니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남자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하긴, 여자 문제가 얽히지 않으면 싹싹한 놈이긴 하니까.’
양손이 무겁게 도착한 견지호의 집은 이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약과 음식만 문 앞에서 주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인사나 건넬 생각이었던 재하는 망설였다.
들어오라는 듯 열린 문 틈으로 다양한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죄다 남자 신발이라 항시 머무는 애인은 따로 없는 모양이었다. 여친이 그렇게 많은데도 유지가 되는 이유가 사생활 구분 때문이려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신발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숙인 사이 달큰한 향기와 열기가 훅 하니 다가왔다.
“어라? 제하 누나가 아니었네요?”
나른하게 흩어지듯 느린 견지호의 목소리에 재하는 절로 소름이 끼쳤다.
“음…… 재하 선배가 서재하 선배였군요.”
정말이지 재하는 견지호가 버터 잔뜩 들어간 말투로 제 이름을 안 불렀으면 싶었다. 그런 말투는 꼬시려는 여자한테나 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으나 애써 참고 손에 든 걸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
“이게 다 뭐예요?”
“배고프다길래 먹을 것 좀 가져왔어.”
받지 않고 쳐다만 보는 지호의 태도에 재하는 여기까지 와서 뭘 망설이나 싶어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살기에 광활한 거실을 지나자 모델 하우스처럼 보이는 그림 같은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막 씻고 나왔는지 열기와 향기를 폴폴 풍기는 지호는 가운을 여미며 벽에 기대고 서서 지켜보았다. 집에서 가운 입는 놈은 처음이라 질색하면서도 재하는 꿋꿋하게 반찬 통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건 장조림. 짜지 않게 만들었으니 팍팍 먹고.”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이건 목살 찹스테이크. 빵이랑 같이 먹어도 어울려.”
“흐음…….”
“이건 김치찜이니까 햇반 돌려서 같이 먹으면 돼. 한 번에 두 개 데워라. 절대 한 공기로 끝낼 수 없는 맛이거든.”
재하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벽에 기대서 있던 지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한쪽 입꼬리에 패는 보조개가 눈길을 끌었다. 정작 그걸 본 재하의 미간은 찌푸려졌지만.
“왜 그렇게 웃냐?”
“제가 남자까지 꼬시는 능력자인 줄 몰랐거든요.”
“미친 소리 하는 거 보니 열이 높은가 보네. 이 중에 당기는 거 먹고 약도 먹어라.”
오는 길에 약국에서 사 온 해열제와 진통제를 주머니에서 꺼내 반찬 통 옆에 툭 던져 놓았다. 그걸 빤히 보던 지호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가며 보조개가 깊어졌다.
“선배님, 자꾸 아닌 척 튕기시면 곤란한데요. 그게 제 취향이라서요.”
“하아…… 징그러운 오해 하지 말고. 앞으로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나 하면서 지내.”
“흐음. 오해요?”
벽에 기대서 있던 지호가 언제 다가왔는지 식탁 건너편에 서서 재하를 빤히 바라봤다.
열이 있어서 그런지 살짝 풀린 눈매 끝에 눈물 점까지 있어 누가 봐도 바람둥이가 되려고 태어난 인물처럼 보였다. 남자가 보면 느끼한데 여자들에게는 야한 지호의 얼굴은 열이 올라 붉은데도 잘생기긴 했다. 그런 얼굴로 식탁에 양손을 올린 지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재하 쪽으로 느릿하게 몸을 기울여 왔다.
“아프다는 카톡에 자기 집 냉장고 털어 달려온 선배님인데…… 제가 어떻게 오해를 안 할 수 있나요?”
개호. 얘는 개호다. 플러팅이 일상이고 누구든 꼬시려 드는. 설마 그게 같은 성별한테도 적용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죄로 재하는 이런 지옥을 봐야 했다.
아픈 사람한테 약과 먹을 걸 주었으니 일단 호의는 충분히 전했다. 최소한 재윤이 돌아왔을 때 네 말을 믿고 있다는 증거로 견지호와 안면도 트고 친해지려 애썼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은 했다.
재하가 빠르게 이 집을 빠져나가려는데 밀폐 용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냄새 좋은데요?”
지호가 뭐라고 하든 재하는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왜 하필 이럴 때 신발 끈까지 풀리고 난리인가. 대충 신고 나가려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지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머니 요리 솜씨가 굉장하신데요?”
“누굴 호로 자식으로 보나. 그 귀한 걸 왜 너한테 가져다주냐?”
“그럼 선배님이 만든 거예요? 저걸 다요?”
재하가 대답 없이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가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감탄 섞인 느릿한 목소리가 뒷목을 잡게 했다.
“사귀기도 전에 먹을 걸로 길들이려는 것도 취향인데요.”
“그런 말은 문어 다리 여친들한테나 해라.”
“가정적인 여자. 아니, 가정적인 사람이 이상형이거든요, 선배님.”
얘 방금 여자라는 말을 사람으로 바꿨다.
친해지겠다는 거지 애인 후보로 줄을 서겠다는 건 절대 아니었기에 재하는 빠르게 부정했다.
“혼자 사는 후배 걱정되어서 남아도는 먹을 것 좀 적선한 거니까 감동할 거 없고 오해할 것도 없다고.”
“재하 선배님, 저희 통성명한 지 1년도 넘었어요.”
다른 후배가 이리 말했다면 재하는 미안해하며 챙기지 못한 걸 사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남자 동기들의 적, 견지호였기에 재하는 뻔뻔하게 굴었다.
“그게 뭐?”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열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지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제가 아프단 소식에 곧바로 달려오신 선배님이 귀엽다는 뜻이에요.”
사람 살려.
이 계획은 틀려먹었다.
‘동생 놈아, 진짜 이 새끼랑 내가 친해져야겠냐? 진심으로?’
가까이 들이대는 지호의 얼굴에 펀치를 먹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재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