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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의 아래쪽은 젖어 있었고, 기분 탓인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설마 그 꼴로 여기까지 왔다고 하지 말아 주라.”
아파트에 살인범이 돌아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이 날 것 같은 재윤의 꼬라지를 보니 당장이라도 대걸레를 들고 뛰어나가야 할 것 같았다.
재하의 걱정에 재윤은 뺨에 묻은 검붉은 액체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무도 못 봤어. 걱정 안 해도 돼, 형.”
아무도 못 봤단다. 아직 밖이 저렇게 환한데 무슨 수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올 수 있었겠는가.
“너. 진짜. 하아…….”
빈손으로 나간 재윤이 아무리 봐도 돼지로 보이는 걸 둘러메고 돌아왔다. 아마도 저건 주인도 모르게 가져온 게 아닐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하가 재윤의 비어 있는 어깨를 마구 두들겨 댔다.
“야! 내가 아무리 식비가 모자란다고 했어도 그렇지! 남의 집 돼지를 잡아 오면 어떡해!”
“아냐, 형. 주인 없는 돼지야.”
“악! 진짜 돼지였냐?!”
돼지 절도. 불법 도축. 어느 쪽이든 동생이 범죄를 저질렀다. 고작 삼겹살 때문에.
“형이 무슨 걱정 하는지 알겠는데 진짜야. 보여 줄게.”
“으악! 싫다! 난 고기가 필요한 거지 죽은 돼지를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고!”
재하의 강렬한 거부에도 재윤은 주섬주섬 포대를 풀어 안쪽을 보여 주었다. 정말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실눈을 뜬 재하는 몸통만 남은 새까만 돼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주 흑돼지가 왜 여기서 나와?”
“아냐, 형. 이건 F급 던전에서 사는 마수야. 가까운 산에 숨겨진 던전이 있어서 쉽게 잡아 왔어.”
“마수?”
“아, 걱정 안 해도 돼. 아직 각성 전이긴 해도 블랙 피그 정도야 요령으로 잡을 수 있거든.”
던전. 마수. 각성.
게임 중독은 재하였지, 재윤은 가볍게 즐기는 정도였다. 동생이 어느새 이 정도 수준으로 게임에 미쳐 있었나 싶어 재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재윤은 사냥감을 자랑하는 고양이처럼 의기양양했다.
“마수지만, 돼지랑 비슷해서 잡기 쉽고 맛도 더 좋아. 나중엔 미식가들 사이에 고가에 거래됐던 블랙 피그야.”
영어로 말해 봤자 흑돼지였다.
재하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피부가 완전히 검고 절단된 단면의 뼈까지 새까만 게, 마치 오골계를 연상케 했다. 아무래도 신종 개량 중인 귀한 돼지를 동생이 잡아 온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정작 당사자인 재윤은 태연하게 포대를 추슬렀다.
“이게 남자한테 참 좋아.”
“……일단 구워 볼까.”
어차피 가져온 거 주인이 있다면 계좌 이체를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재윤이 나름 처리를 해 몸통만 가져온 고기를 손질하며 재하는 진심으로 월요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삼겹살 이야기에 돼지를 잡아 온 동생이 학교에 가서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굽자.”
치익.
뜨겁게 달군 팬에 고기를 내려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불안과 걱정은 날아가고 식욕이 솟았다.
“와, 무슨 고기 냄새가 이렇게 좋냐.”
제주 흑돼지와 달리 피부까지 까맣던 고기는 보기엔 애매했어도 막상 굽기 시작하니 그 냄새가 말도 못 했다. 절로 침이 고이고 집게를 든 손이 안절부절못했다. 핏기만 가시면 입 안에 넣고 싶었다.
익어 가는 고기를 뚫어져라 지켜보는데 재윤이 집게와 가위를 들고 다가왔다. 큰 도막을 썩둑 썰어 내더니 시뻘건 고기를 냉큼 입으로 가져가는 재윤의 행동에 재하가 화들짝 놀라 손을 뻗었다.
“야, 아직 익지도 않은 걸 먹냐?”
“괜찮아. 맛있어.”
“맛이 문제가 아니고 돼지고기니까 바싹 익혀야지.”
“블랙 피그는 기생충 같은 거 없으니까 적당히 먹어도 돼.”
국내산 먹거리에 대한 믿음은 가상하지만, 재하는 믿을 수 없었다. 꼼꼼히 핏기가 가실 때까지 인내하며 구운 후에야 한 점 입에 넣었고 그 순간,
“시이……바알…….”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천상의 맛에 재하는 눈물이 다 핑 돌았다.
돼지 농장주와 손을 잡고 독점하고 싶은 맛.
천상의 맛.
해외 발령이 난 아버지 소식에 이혼했음에도 따라나선 어머니를 당장 소환하고 싶은 맛이었다.
‘따라가실 정도면 뭐 하러 이혼을 했냐고.’
워낙 자유로운 영혼인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최고였다. 어머니의 김치와 동생이 가져온 고기를 이용해 장사하면 대박이 날 것 같은 맛이었다.
“입맛에 맞아?”
“아니, 무슨 고기가 씹을 땐 탱글탱글한 거 같으면서도 막상 이가 박히면 부드러운 게 뭐 이런 식감이 다 있냐? 어우, 그냥 굽기만 했는데 육즙이 장난 아닌데. 와, 진짜 미쳤다.”
블랙 피그는 썰 때부터 육질이 남달랐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 신기했다.
맛은 분명 돼지고기 맛인데 몇십 배는 더 맛있었다. 웬만한 소고기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감칠맛과 깊이가 느껴지는 데다 식감마저 좋아 자꾸만 씹고 싶어졌다.
“와, 진짜 맛있네. 너도 빨리 먹…… 어라? 언제 다 먹었지?”
“맛있지? 많으니까 더 먹어.”
순식간에 팬 위의 고기를 다 먹어 버린 재하가 머쓱하게 웃는 사이 재윤이 고기를 얹었다. 맨손으로 턱턱 얹는 재윤의 행동에 재하가 집게를 들었다.
“이번에 굽는 건 너 먹어라. 진짜 맛있네, 흑돼지.”
“블랙 피그라니까. 구운 건 형 다 먹어.”
“됐어. 팬 하나 더 꺼내서 굽든가…… 야! 그걸 왜 씹어 먹고 있어?!”
프라이팬을 하나 더 꺼내려 재하가 몸을 돌리자 재윤이 맨손으로 집어 든 생고기를 씹고 있었다.
“아 씨, 그렇게 배고팠으면 말을 하지!”
“아냐, 형. 블랙 피그는 진짜로 생으로 먹어도 된다니까. 생으로 먹으면 과일 맛도 나. 이번엔 은은한 감귤 향이야.”
“그럴 리가 있냐? 피 냄새나 안 나면 다행이지.”
“피는 내가 뺐잖아. 먹어 봐, 형. 진짜 맛있어.”
재하를 향해 재윤이 한 입 베어 문 생고기를 내밀었다. 재하가 질색하며 피하자 굳이 더 권하지는 않았다.
재윤의 기이한 행동에 재하는 식욕이 떨어질 만도 한데 다시 피어오르는 고소한 냄새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결국, 잔뜩 배어 나온 기름에 김치와 밥까지 볶아 먹은 후에야 숨도 못 쉴 만큼 배가 찬 재하가 늘어졌다.
“와, 꼼짝도 못 하겠네. 배 터지겠어.”
“형은 좀 쉬고 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저거 진짜 내 동생이 아닐지도 몰라.
재하는 다시 재윤의 존재를 의심했다.
무슨 이상한 짓을 해도 재윤은 재윤이었다. 자신의 동생이 아닐 리 없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네가 순순히 설거지한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소나 설거지를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건 절대 동생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생고기를 씹어 삼키는 것보다 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 맞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하는 냉큼 일어나 약통에서 회충약을 꺼내 왔다. 홀수로 사 오는 바람에 남았던 건데 다행이다 싶었다.
“이거 먹어.”
“아~”
막 회충약을 테이블에 던져두려던 재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금 들은 게 무슨 말인가 싶어 뻣뻣하게 굳어 오는 목을 억지로 치켜들었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하던 재윤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입을 벌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재하는 손에 든 약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내려놓았다.
“직접 꺼내 먹어.”
“지금 안 주면 까먹을걸. 형이 입에 넣어 줘.”
영문 모를 소름에 재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재하는 재윤이 정상이 아님을 떠올리며 싱크대 옆에 섰다. 몸으로 재윤을 밀어내며 설거지통에 손을 담갔다.
“가서 약이나 먹어.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그럼 같이 해.”
“아, 좁아. 덩치는 산만 해서.”
“옆으로 더 비킬게. 같이 해, 형.”
또 무슨 포인트를 잘못 건드린 건지 재윤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지고 흔들렸다. 보지 않아도 재윤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귀찮은 재윤을 구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낸 재하는 답답함을 그릇에 풀려는 듯 벅벅 문질렀다.
기어코 성인 남자 둘이서 좁은 싱크대 하나를 두고 꾸역꾸역 설거지했다.
“끝. 이제 좀 떨어져. 약도 먹고.”
벌칙 게임의 연속 같은 시간이 끝나고 기어코 약까지 먹인 후에야 한숨 돌리려던 재하는 식탁의 참상을 보고 아차 싶었다.
한 끼 먹은 걸로는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돼지였다. 좁은 싱크대에서 손질할 수 없어 식탁에 벌여 놓은 참상이 아직 그대로였다. 저걸 등 뒤에 두고 잘도 고기를 굽고 설거지에 정신이 팔렸구나 싶어 재하는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다행히 머리와 내장은 제거되고 피는 전부 빠져 정육점에 걸려 있는 고기 느낌이라 크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일단 이삼일 먹을 분량은 냉장실에 넣고 나머진…… 아깝지만 냉동해야지. 아오, 이거 팔면 진짜 대박일 텐데.”
“아직은 안 돼. 잘못 팔다 걸리면 골치 아파져.”
“말이 그렇다는 거지, 훔쳐 온 걸 어디다 팔아.”
“훔쳐 온 거 아니라니까.”
“나중에라도 주인 나타나면 꼭 돈 갖다드려.”
특이한 돼지를 잃었으니 어디서든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다. 재하의 반복되는 지적에 재윤이 진심으로 삐진 듯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진짜 주인 없는 거라니까.”
풀 죽은 얼굴과 달리 손만은 부지런히 고기를 손질하는 재윤을 빤히 보던 재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퍼 백에 나눠 넣고 있는 고기가 재윤의 말대로 ‘던전산 블랙 피그’라면 그걸 증거로 보여 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회귀의 증거이든 마수의 존재를 알려 주는 거든 재윤이 가져온 이 돼지 한 마리가 답이 될 수 있었다.
“조만간 증거 보여 준다며. 이게 마수라면 머리를 가져와서 보여 주지 그랬어.”
“얘 머리에 독초를 키우거든. 죽으면 몸까지 독이 퍼져서 잡자마자 머리를 잘라 내야 해. 초반에 그걸 몰라서 몇몇 에스퍼가 죽을 뻔했다니까.”
질문하자 답은 청산유수다. 동생의 머릿속에 세계관이 확립돼 있다는 거였다.
“난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형한테 그런 위험한 걸 가져올 수는 없어.”
“어, 그래.”
재하는 적당히 대꾸했다.
재윤이 어디까지 이 컨셉을 밀고 가려는지 몰라도 변명이 길었다. 던전이 있다면 자신을 데려가면 증명 끝이건만, 계속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재윤이 상상력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