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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의 만류에도 재윤은 진심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절절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형은 그걸 모두 받아 냈어. 난 그게 형의 선택인 줄 알았고. 진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야야, 진짜 네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괜찮아, 형. 내가 알아. 형은 처음부터 날 위해서 희생했어.”
여기까지 간신히 말을 끝낸 재윤이 무너져 내렸다. 재하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끌어안고 울먹였다.
“쓰레기 새끼들한테 형이 망가져 가는데도 난 그걸 몰랐어. 너무 늦게 진실을 알았고, 구하기엔 이미…… 미안해, 형. 돌아오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
언제는 형이 아니길 바랐다는 둥 재하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엔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해 왔다.
“이제 누구도 형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지킬 거니까. 날 믿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내 말대로 해 줘, 형.”
재하는 할 말을 잃었다.
재윤의 머릿속에서 재하의 친구와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가지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몰라도 재윤이 흘리는 눈물과 애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재윤이 하는 말의 진의는 당장 중요치 않았다.
온몸을 떨며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는 재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가 조여들고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이 새끼는 내 동생 맞아.’
설령 쓰다듬는 머릿결이 낯설다고 해도 애초에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건 몇 년 전 일이었을 테니까 낯선 게 맞았다.
“그러니까 지금 네 이야기가 진짜라면 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이라는 거잖냐.”
“응.”
“지금은 다 좋은 사람들인데. 나중엔 왜 그렇게 되는데?”
“……그건 지금 말 못 해.”
“내가 못 믿을 거 같더라도 일단 말해 봐. 혹시 또 아냐? 타당한 이유면 믿을 수도 있어.”
재하 나름의 합리적인 제안이었으나 재윤은 단호했다.
“지금은. 안 돼.”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시선을 피하고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마치 혼날까 봐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과제를 재활용 쓰레기로 내버리고 감출 때처럼 불안해 보이는 재윤의 모습에 재하는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나중엔 말할 수 있고?”
재하의 질문에 재윤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번에도 못 한다고 할 줄 알았기에 의아했다.
“언제?”
“조만간 증거를 가져올게. 그걸 보면 형이 내 말을 믿게 될 거야.”
“증거를 보고도 내가 믿지 못한다면?”
“……그때는 형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게.”
증거까지 있다는 말에 그게 무엇이든 이 이야기의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재하는 조금 안심이 됐다.
툭툭. 두드리듯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축축해진 허벅지에서 재윤이 떨어졌다.
“네 말을 믿는다 쳐도 당장 친구나 선배를 멀리할 수는 없어. 그 증거를 가져올 때까진 너도 얌전히 굴어.”
“그럼 동행하게 해 줘. 그 새끼랑 한 공간에 있더라도 괜찮은지 봐야겠어.”
학교에 이 커다란 동생을 끼고 다니라니 무슨 벌칙 게임인가 싶으면서도 일단 지금은 적당히 달래 주자 싶어 조건을 걸었다.
“좋아. 네가 도준일 도준 형이라고 부르면.”
“……밤을 새워서라도 연습할게.”
고작 이 정도 조건에 혀를 물 각오를 하는 동생이 아주 조금 귀여워 보였다.
“그래, 연습해라.”
애쓰는 재윤을 내버려 두고 식탁을 치웠다.
몇 번이고 혀를 물며 끙끙거리는 동생을 거실에 남겨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서든 찰싹 붙어 있으려 하면서도 재하의 방에 들어갈 때만은 따라붙지 않았다.
“휴,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
드디어 자유구나 싶어 신나게 컴퓨터를 켰다. 종일 재윤의 망상에 휘둘리느라 주말 두 배 경험치를 놓칠 뻔했다.
주말이라 접속 시간이 길어 잠시 멍때리는 시간이 생겼다. 느긋하게 게임 로딩 화면을 보던 재하는 게임 BGM과 팬 돌아가는 소리에도 고요함을 느꼈다.
익숙한 모니터 속 화면과 소음. 배경 음악. 조금 있으면 음성 채팅까지 들어가 길드원들과 시끌벅적 게임을 하며 하루를 가열차게 달리는 평범한 주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평소와 같은데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느껴졌다.
마우스를 쥔 손이 허전했다.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던 체온이 사라져 시원해야 했는데 불안했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딱히 말할 일이 없던 집 안에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재하와 재윤은 평범한 형제답게 대화가 많지 않았다. 하루에 하는 대화라고는 배달 메뉴를 권할 때 정도. 그나마도 대화보다는 카톡이 더 빨랐다.
ㅊㅋ?
ㅋ
재윤과 마지막으로 나눈 카톡 내용은 ‘치킨?’, ‘콜.’ 이게 다였다.
며칠간 들어오지 않는 동생의 안부를 묻는 대화조차 오가지 않았다.
무심해도 너무 무심한 형이었나 싶어 재하는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로딩 화면이 끝나고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게임이 시작되자 길드원들의 인사와 파티 가자는 성화가 이어졌다.
당장 마이크를 켜고 달려야 할 때인데 정작 재하는 채팅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다. 평소와 다른 재하의 상태를 알아본 건 길마였다.
해일: 피곤하면 오늘은 쉬십시오.
“아, 그래도 갑자기 힐러가 빠지면 안 될 텐데…….”
재하가 혼잣말을 함과 동시에 빠르게 채팅을 치자 길마의 반응은 담담했다.
해일: 아닙니다. 딜러들만 모아 스피드런 뛸까 했습니다.
누가 봐도 재하를 위한 배려였다. 재하는 길마의 배려심 넘치는 제안에 고마움을 느꼈다.
나: 갑자기 빠져서 죄송해요. 다음에 벌충할게요.
해일: 괜찮습니다. 건강부터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컨셉인가 싶을 정도로 정중한 말투였으나 내용은 따뜻했다. 온라인상에서만 만나는 사람인데도 형 같은 사람이라 마음이 편했다.
“찜찜했는데 잘됐네.”
덕분에 불편한 마음으로 게임을 하는 대신 빠르게 로그아웃했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동생을 혼자 방치하고 노는 건 영 내키지 않았기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대화를 통해 실마리를 잡기에는 재윤이 자꾸 무언가를 숨기는 데다 불쑥 튀어나오는 비현실적인 정보들이 버거웠다.
잠시 망설이던 재하는 일단 꽉 닫아 둔 방문을 열었다. 재윤은 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거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재하를 지켜 낼 거라는 말 그대로 언제든 그를 위해 움직일 기세가 비장하기까지 했다.
재하는 깊게 생각하는 대신 팔을 걷어붙였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어?”
“너 회귀 전엔 나한테 김치찌개도 못 얻어먹었다며.”
“그건…….”
재하의 가벼운 질문에 재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별거 아닌 대화에 재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신경 쓰여 재하는 더욱 가볍게 물었다.
“웬만하면 밥 정도는 해 줬을 텐데. 얼마나 싸웠길래 내가 널 굶겼냐?”
“형이 잘못한 게 아니야!”
“윽, 니 형 귀 안 먹었다.”
우물거리던 재윤이 발작하듯 소리치는 바람에 재하는 귀가 다 얼얼했다. 귀를 문지르는 재하의 행동에 재윤은 곧바로 목소리를 낮췄으나 알아듣지 못할 말만 했다.
“형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없었으니까. 형의 선택이긴 했지만, 자의는 아니었고…….”
“뭐라는 거냐, 진짜.”
“형은 잘못 없어. 아무 잘못도.”
가벼운 핀잔에도 재윤은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짓이기며 망설였다. 또 무슨 말을 감추고 고민하는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알려 주지 않을 거라면 재하 역시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재윤이 하는 말들은 추상적이거나 믿기 힘든 내용뿐이었다. 감추고 일부만 알려 주는데 공감하기 힘들고 설득할 방법도 없었다.
“설명은 됐고. 말해 봐, 먹고 싶은 거.”
재하가 꾸물대는 재윤을 보다 못해 한 소리 했더니 횡설수설하던 걸 멈추고 멍하니 재하를 바라봤다. 이내 멍하던 얼굴에 감격이 들어차며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형한테 돌아와서 다행이야.”
금방이라도 포옹해 올 기세로 다가오는 재윤의 감정 과잉에 재하는 빠르게 주방으로 걸어갔다.
“어, 그래. 알았으니 거기서 스톱. 그 선 넘어오지 마라.”
“형…….”
“너 가까이 오면 끌어안을 거잖아. 거기서 말해.”
재윤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끌어안는다는 걸 하루 사이 터득한 재하는 손에 든 대파를 휘두르며 거리를 벌렸다. 재윤은 행동이 빠를 뿐, 재하의 말을 곧잘 들었다.
“메뉴나 말하고 들어가.”
“형이 해 준 거라면 뭐든 좋아.”
“아까는 콕 집어서 김치찌개 끓여 달라더니.”
“그건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아무거나 좋아. 이제 욕심 안 부릴게, 형.”
배시시 웃으며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조차 욕심이라 말하는 동생의 애잔함에 재하는 두 손 들었다.
“내가 졌다. 비상금 푼다, 풀어. 저녁은 삼겹살 파티나 하자.”
삼겹살 귀신인 재윤에게 금값 같은 삼겹살을 먹이는 건 정말이지 큰 결심이 필요했다. 재윤을 위해 재하는 나름 초강수를 둔 셈이었다.
“험한 일 하고 돌아왔으니 든든하게 먹여 줘야지.”
“내 말, 믿어 주는 거야?”
“몰라, 인마. 밥이나 해 먹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 철없는 날 백수 같던 동생은 깊어진 눈으로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채 자신을 좇았다.
그걸 재하는 망상이라는 말로 외면할 수 없었다.
최소한 가족인 자신이 반은 믿어 줘야 수지가 맞지 않겠는가. 그게 형제니까.
외계인을 봤다면 목격 장소까지 같이 가 주는 게 형제의 의리였다.
외계인보다 회귀 쪽이 더 믿기 어려웠지만.
“가서 고기 좀 사 와. 포인트 적립 꼭 하고.”
심부름을 시키려 카드를 꺼낸 재하는 재윤이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피식 웃어 버렸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옆에서 안 떨어지던 동생이 먼저 나서서 저러고 있나 싶어 웃음이 났다.
“3…… 아니다, 한 5킬로 사 와. 남으면 반찬 만들지, 뭐.”
“걱정하지 마, 형. 한 마리 잡아 올게.”
“미친놈아. 카드에 돼지 반 마리 값도 안 들어 있거든?”
생활비 체크 카드를 흔드는 재하를 향해 재윤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나 올 때까지 집에 있어. 어디 가면 안 돼.”
“밑 준비 해야지, 가긴 어딜 가?”
“응. 한 시간 내로 올게.”
“아니, 무슨 돼지를 잡아서 오는 것도 아니고 한 시간이나 걸려? 여기 장바구니 가져가…… 어?”
심부름하면서 피시방이라도 갈 생각인가 싶어 투덜대며 장바구니를 챙기던 재하는 텅 빈 현관을 보고 당황했다.
단골 정육점에 가져가면 포인트가 쌓이는 장바구니와 카드를 두고 간 동생이 원망스러워 작은 저주를 읊었다.
“포인트를 우습게 본 자, 건더기 없는 김치찌개를 먹게 될 것이다.”
툴툴거리며 냉장고를 뒤지는 재하의 손이 분주했다. 고기 귀신인 재윤을 먹이려면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쌈장도 꼭 만든 것만 먹어서 귀찮단 말이지. 반찬은 파랑 콩나물만 무치면 될 거고. 시골에서 온 참기름도 새로 따야겠네.”
최근 뭐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집에서 밥도 잘 안 먹던 동생을 떠올리면 오랜만에 분주해졌다. 재하는 투덜거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약속대로 재윤은 고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형, 나 왔어.”
“진짜 한 시간이나 걸렸냐? 무슨 돼지를 잡아 오……는…… 거?”
정확하게는 묵직해 보이는 포대를 어깨에 둘러멘 채. 문제는 그 형태가 무언가를 떠올릴 만큼 선명해서 절대 열어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