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83화 (완결) (183/183)

183화

“일어났는가?”

“...!”

박율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설지만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율은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엔 일전에 보았던 노인과 단탈리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노인이 말했다.

박율은 시선은 방황한 채 노인과 단탈리온을 훑었다.

“당신들은...”

[오랜만이네.]

단탈리온은 희끗한 미소를 지은 채 박율을 보았다.

여전히 박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속 깊은 한숨을 팍 내뱉더니 허공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그의 뒤로 의자가 생겨났다.

“놀랄 것 없네.”

멍한 얼굴로 그를 보던 박율은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 지 고개를 획 돌렸다.

바알의 흔적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바알을 죽였던 기억은 선연했지만, 이후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알은 죽었다네.]

단탈리온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유영하던 박율의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두 사람을 보았다.

“자네는 단탈리온의 기억을 이어받지 않았던가.”

“...!”

노인의 말에 그제야 박율은 파편들에 스며들어 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신의 죽음과 그에 비롯된 이야기들.

그리고 새로운 신과 새로운 균형까지.

박율은 벙찐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그는 박율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네.”

“...”

“생각해보면 그 양반도 참 악취미를 가지고 있었어.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을 줄이야. 제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질질 끌며 말했다.

“뭐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영원한 안식은 전무했겠지만서도.”

[그것이 ‘신’이라는 존재의 숙명이지 않겠습니까. 죽음마저도 외로우며 쓸쓸한...]

“그래서 내가 그것들을 싫어하는 거야. 수백 년, 수천 년 살아가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누구는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생과 사라는 개념조차 희박한데.”

노인은 바닥을 쿵쿵 구르며 말했다.

생과 사라는 개념이 희박한 존재는 그 자신을 말하는 듯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박율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채였다.

한참동안 불평을 쏟아내던 노인은 이내 고개를 돌려 박율을 보았다.

“이제 자네의 차례일세.”

“뭐...가요?”

“‘신’, 아니 ‘신’이었던 아이가 자네에게 뒤를 맡기고 안식을 맞이한 건 알고 있겠지?”

“...”

박율은 입을 달싹였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신’이라는 작자가 그에게 뒤를 부탁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한들 박율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잠깐만요.”

박율은 양손을 들어 노인을 제지했다.

“지금 분위기가 저더러 그 사람의 뒤를 맡아서...”

“그 자리를 대신 해야 한다는 소리지.”

노인이 박율의 말을 빼앗아 끝맺었다.

그의 말에 박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분명 양쪽 귀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무언가 귀에 솜이 틀어박힌 듯 먹먹했다.

“자넨 이미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췄네. 선과 악, 흑과 백, 공과 백까지. 이제 자네에게 남은 것은 선택하는 것뿐이라네.”

노인의 말에 이어 단탈리온이 입을 열었다.

[물론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네. 우리는 선택을 종용할 생각은 없으니. 선택을 하지 않는다 하여서 여지껏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지지는 않는다네.]

단탈리온의 말을 듣던 박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저...]

“제가 선택을 한다면 죽은 이 혹은 죽어가는 이를 살릴 수 있나요?”

단탈리온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박율이 말했다.

그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은 아니네만. 한계는 있을 테지.”

“...그 정도면 충분해요.”

박율은 희끗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단탈리온과 노인은 더 많은 말을 뱉으려 했지만, 박율의 애절한 미소에 말을 거두었다.

희(喜)가 결여된 그 미소는 왠지 모를 쓰라림이 느껴졌다.

“선택할게요. 대신.”

박율의 시선이 두 사람을 훑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 * *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노인이 물었다.

단탈리온은 그의 옆에서 그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이제 제가 있을 곳은 없습니다. 구시대의 유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정당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고지식하기는.”

[그리고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

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뒷짐을 진 채 공백 그 어딘가를 향해 발을 뻗었다.

“...빨리 따라오게. 남은 시간 동안 내 자네를 이겨보겠네.”

* 박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곳은 전장이었다.

허나 전쟁은 끝난 후였다.

바알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이야기.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그를 지나쳐 수많은 이들이 서희의 곁에 몰려 있었다.

그녀의 아래로 질펀하게 핏물이 고여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되살리려 노력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마냥 힘만 빠질 뿐이었다.

『제발...!!!』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자들 중 치유 능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사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직감했다.

서희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모두가 포기했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허나 마르가리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코피가 터져 나오고, 실핏줄이 터져 눈이 충혈될 때까지 서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제발...!!!』

터벅.

박율은 수많은 인파를 넘어 그녀를 향해 걸었다.

그를 본 이들은 일순간 말을 잃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격, 그리고 위압감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경외가 느껴질 정도였다.

박율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한 채 묵묵히 서희를 향해 걸어갔다.

“누나.”

『유...율아...』

마르가리타가 박율을 보았다.

그녀 역시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것을 인지할 정신이 없었다.

『서희 씨가...』

“잠깐만 비켜줄래요?”

『...』

“잠깐이면 돼요.”

아주 잠시 박율을 멍하니 보던 마르가리타는 이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울컥, 서희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반쯤 감긴 서희의 눈꺼풀이 박율을 향했다.

“이...겼어...?”

“네, 덕분에 이겼어요.”

서희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쿨럭!

서희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역류했다.

생명의 불씨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이젠...말...해줘...”

서희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박율의 뺨으로 올라왔다.

손이 차게 식어있었다.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 위에 박율은 손을 얹었다.

그리고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웠어요.”

“...”

“미안했고.”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서희는 더이상 말하지 말아 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 들었다가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박율은 다른 한 손으로 서희의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천천히 끌어당긴다.

두 입술이 포개졌다.

메마른 입술이 맞닿았다.

동시에 박율은 제힘을 불어 넣었다.

포개진 입술이, 붙은 두 살갗이 온기를 나눌수록 서희의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차가운 서희의 몸에 온기가 스며들며 맞잡은 두 손마저 따스하게 물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박율은 입술을 떼었다.

서희가 그를 보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박율.”

“이제부터 지켜주겠다는 그런 멋진 말도 하고 싶은데...”

박율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입안에서 쓴맛이 감돌았다.

“그런 약속도 못 할 거 같아요. 미안해요.”

“그게 무슨...”

“...이젠 아프지 않게 해드릴게요.”

박율은 서희의 머리를 받친 손으로 다시 힘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서희의 눈꺼풀이 잠겼다.

박율은 이를 악하고 물었다.

그녀에게서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있었다.

“기다리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해요. 다시 만날 때 돌려드릴게요.”

박율은 아주 천천히 서희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 차가운 바람이 불지 않았다.

미지근하며 시원한 바람이 그의 옷깃 속으로 저며들었다.

『율아.』

그제서야 박율의 변화를 눈치챈 마르가리타였다.

그녀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데판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무슨...]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박율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

[무어냐.]

“천상계와 마계를 맡아주시겠어요? 연고가 없다보니 믿을 구석이 별로 없어서 말이에요.”

박율은 머쓱하게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남은 이야기는 가면서 해요. 일단 할 일이 있어서요.”

박율은 그리 말을 하고는 두 사람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늑대가면을 쓴 남자의 앞이었다.

그는 가면을 벗었다.

“형.”

“...율아.”

백봉기 역시 여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벙찐 얼굴로 박율을 보고 있었다.

분명 그는 박율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본능이 말하는 것은 달랐다.

그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박율은 그의 경탄 어린 시선에 자못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형.”

“...”

“밥 사주세요.”

백봉기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

“형이 그랬잖아요. 밥 먹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

“배고파요.”

백봉기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서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으나, 그는 여전히 박율이었다.

“...그래, 뭐 먹고 싶냐.”

“치킨이요.”

* * *

맥주 한 잔.

차고 넘칠듯한 거품을 입으로 훔쳐먹고, 치킨 한 조각에 쓴맛을 잊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간의 이야기들을 이야기하고 들으며 두 사람은 웃고 울었다.

맥주 두 잔.

청량감이 식도를 감싸 안고, 설탕으로도 녹이지 못할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주 먼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율이 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무렵, 처음 백봉기를 만났던 그때를 회상했다.

아무 연고도 없이 그저 몸뚱이만 들고 무식하게 철근만 옮기던 그 시절이었다.

또 한 잔.

취기가 올라왔다.

박율은 하루 번 돈으로 하루를 먹고, 술에 취해 허투루 시간을 보내던 아이였다.

틈만 나면 쌈박질에 무서울 게 없던 그는 그저 문제아였다.

하지만 오로지 한 사람.

백봉기는 그를 박율이라 불렀다.

그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고, 그의 아버지가 되어줬으며 바른길을 안내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한 잔.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형.”

“잘 컸어...정말...”

“고마웠어요.”

“고맙기는 뭘...”

취기가 올라 붉게 달아오른 백봉기는 손을 휘휘 저으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형 덕분에 사람처럼 살았어요.”

“...”

백봉기는 맥주 한 잔을 비웠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율아. 네 덕에 나도 살 수 있었어. 기우랑 같이 죽으려고 했던 날 살린 게 너였어. 인마.”

“...”

“네가 그렇게 나를 아빠처럼 생각해준 게 아니었으면...”

박율 역시 맥주 한 잔을 비웠다.

백봉기는 맥주를 한 잔 더 시켰지만, 박율은 시키지 않았다.

아니, 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미안해요.”

박율의 몸이 빛의 입자로 나뉘기 시작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박율을 본 백봉기는 입을 꾹 닫았다.

그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가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백봉기는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이제 완전히 가는 거냐.”

“...”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는 거냐...?”

“모르겠어요.”

백봉기는 말 없이 맥주 한 잔을 받아 그대로 전부 들이켰다.

어느새 박율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율아.”

“...”

“몸조리 잘해라.”

“형도 잘 지내요.”

“...언제든 돌아와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박율의 몸은 완전히 빛의 입자로 바뀌어 사라졌다.

마치 나비가 날아오르듯 박율의 흔적들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백봉기는 건너편 의자를 보았다.

그의 아픈 손가락이 있던 그 자리를 보았다.

그는 맥주 한 잔을 더 시켜 단숨에 잔을 비웠다.

“...고생했다. 지금까지.”

에필로그.

“...”

고요한 적막이 지배하는 어느 겨울날, 박율은 눈을 떴다.

살갗을 이는 추위.

그곳은 모든 것이 무너진 참상, 형태를 간직한 것들을 찾기 힘든 폐허였다.

그 위로 새하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차가운 냉기가 손을 감쌌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박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아...”

새하얀 숨이 바닥에 짙게 깔린다.

몸을 덮을 거적떼기 하나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었다.

추위가 살갗을 파고 들었다.

살갗이 얼어붙고, 그 아래 뼈마디마저 추위에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뽀드득.

그는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 건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본능을 따라 걸었다.

뽀드득.

쌓인 눈밭을 걸으며 박율은 추위에 떨었다.

아무리 눈길을 걸어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흔적도, 생명의 불씨도.

골조만 남은 건물들만이 황량한 대지를 군데군데 채울 뿐.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맨발의 살갗이 까져 발바닥이 붉게 물들고, 그가 걸어온 길이 온몸 피로 도배될 때까지 그는 걸었다.

“...”

허나 아무리 걷고 걸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황량한 대지의 풍경만이 미세하게 변할 뿐 그는 그저 무력하게 눈밭을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율이 멈춰 섰을 때.

그곳엔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생애가 남은 흔적이었다.

이끼로 뒤덮인 뼈의 일부들과 그것들을 덮은 옷자락.

박율은 그것들을 들었다.

파사삭.

뼈의 일부가 바람에 부서져 날린다.

박율은 사라지는 뼛조각을 따라 눈을 옮겼다.

그것들은 떨어지는 눈들에 섞여 사라졌다.

“...”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하늘이 새하얀 구름에 젖어있었다.

외로웠다.

살갗을 이는 추위가 더욱 거세졌다.

칼날 같은 바람이 피부를 베어 가른다.

온몸을 웅크려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추위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외로움에 사무쳐 박율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박율은 눈을 떴다.

새하얀 세상, 그 어디에선가 박율은 몸을 일으켰다.

“또 같은 꿈이야...”

‘신’이 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죽은 것을 보았고, 새로운 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사랑하는 이의 생애를 지켜볼 수 있었고, 죽음 이후의 이야기마저 만들 수 있었다.

허나 ‘신’이 된 박율에게 시간은 바래진 개념이었으며 죽음이라는 것은 공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저 공허와 무료함만이 남아있었다.

신은 외로운 자리라 하였던가.

“...”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지상이 보였다.

평화로운 여느 날이었다.

모두가 평범한 아침을 보내고, 점심을 지나, 저녁을 맞이한다.

물론 그가 살던 때와는 많은 게 변했다.

허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건.

‘제발...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사방에서 그에게 소원을 바래온다.

박율은 그 개수를 헤아릴 수 없이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듣고 있다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소리가 멎었다.

대게는 로또나 기적 같은 것들이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다 들어주고 싶다만, 그랬다간 인간계에 큰 혼란이 일어날 거다.

아주 가끔 기적을 만들어주는 것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허.”

문득 아주 먼 옛날 그가 신에게 로또번호를 갈구했던 때가 떠올랐다.

『율아!』

마르가리타의 소리였다.

『내 말 좀 들어봐!』

[이번엔 그쪽이 문제였다!]

『말이 돼!?』

[천사 측에서 먼저 마계에 소란을 일으켰단 말이다!]

나는 간만에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들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각각 천상계와 마계에서 무언가 일이라도 있는지 언성을 높이던 차였다.

“듣고 있어요. 그만 싸워요.”

박율은 두 목소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천사들이 마계를 침략했다.]

『말이 돼!? 그게!? 천사들이 왜 마계를 침략해!』

[그거야 내가 어찌 알겠느냐!]

“일단 싸우지 말고...”

『악마들이 먼저 침략했다가, 천사들이 반격한 거는 아니고!?』

[그럴리 없다!]

“거참, 이 양반들.”

박율은 지긋지긋하게도 싸우는 두 목소리 사이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마르가리타와 데판, 둘 다 각자 한 영역을 도맡은 이후로 스트레스가 심해졌는지 툭하면 싸운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지만, 근 수백년 가까이 흘렀다보니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천상계와 마계는 본래 사이가 안 좋다 보니 저렇게 가끔 천사와 악마 사이 시비가 붙으면 둘이 싸우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둘 다 멈춰봐요. 내가 알아볼 테니까.”

『내 말이 맞기만 해봐...』

[이번에는 양보할 수 없다.]

끝까지 으르렁대는구만, 아주.

박율은 혀를 내두르며 허공에 수정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들여다본다.

“...”

수정구 사이로 악마들과 천사들이 자웅을 겨루는 모습이 보인다.

박율은 손을 휘저으며 시간대를 더욱 전으로 돌렸다.

움직임을 역행하는 악마와 천사들.

이내 수정구는 처음을 보여준다.

“...”

수정구를 한참 들여다보던 박율이 고개를 들었다.

“찾았어요.”

『어떻게 된 거래?』

[결백하다.]

『내 말이 맞다에 내 손모가지 건다.』

[천사란 것이 말하는 꼬락서리하고는...]

“이번엔 천사들이 먼저 마계 쪽에 시비를 걸었네요.”

박율이 말했다.

일순간 마르가리타의 목소리가 멎었다.

[그것 보아라! 결백하다하지 않았더냐!]

『...』

[손모가지 내놓아라.]

『...잘못 본 걸 거야.』

[어디 천사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느냐. 손모가지는 됐고, 저번에 빌린 성유물은 내가 가지도록 하지.]

『얌마! 그건 아니지!』

[그럼 손모가지를 내놓을테냐?]

『...100년.』

[처음부터 그리 나올 것이지.]

박율은 콧방귀를 뀌며 대화를 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 들어도 재밌다.

따분하고 무료한 일상에 유일한 즐거움이랄까.

“...?”

그러던 중 박율은 인간계에서 무언가 뒤틀림을 보았다.

저건 분명 심연의 흔적이었다.

박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심연을 쫓았다.

그것은 천상계와 연결된 것이었다.

“저게 왜...?”

그 순간 심연에서 천사가 걸어나왔다.

그는 주변을 탐색하더니 이내 가까운 인간을 하나 잡았다.

“...!!!”

뒤이은 천사의 행실은 두 눈을 의심케했다.

그는 인간을 그 자리에서 죽였고, 죽은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듯 그의 몸에 빙의했다.

그리곤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그 인간처럼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상의 곳곳에서 심연이 열렸고, 천사들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박율은 낯선 인간을 보았다.

분명 그의 손에서 살아온 인간이었으나, 그는 박율의 손이 닿지 않은 인간이었다.

마치 박율처럼 말이다.

“...”

일순간 박율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 신이 나타날 때가 됐나보군.”

-회귀사자 망치를 들다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