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바알이 걸어나온 반대편에서 심연이 완전히 벌어지면, 그 속에서 데판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걸어 나왔다.
그의 너머에서는 단탈리온, 아니 새로운 마왕을 맞이하러 온 악마들이 쏟아졌다.
[충!!!]
심연을 걸어나온 악마들은 일제히 박율을 보며 충성을 표했다.
마왕을 마주한 데에 걸맞는 예의였다.
박율은 짐짓 당황한 얼굴을 하자, 데판은 그를 대신해 손을 들어올렸다.
[주군을 위하여.]
그리고 그가 입을 떼기 무섭게 악마들이 발을 굴렀다.
바알의 군세와 한때 단탈리온의 군세였던, 이젠 박율의 산하에 있는 악마들이 서로를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알의 군세의 압도적인 전세는 그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대등해졌다.
단탈리온의 악마들을 마주한 사자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우리들은 적이 아니다!!!]
데판이 소리쳤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혼동하지 말아라!!!]
그의 말에 사자들은 혼란을 겪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단탈리온의 군세까지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들까지 적으로 돌릴다면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단탈리온의 악마들이 내뿜는 살기는 오로지 바알의 악마들에게 국한되었다.
그러다보니 사자들은 저절로 그들을 아군으로, 같은 목적을 가진 채 바알의 악마들을 상대했다.
“데판!!!”
박율이 소리쳤다.
『무사했구나...!』
마르가리타 역시 그를 보며 반가움을 표했다.
[어찌된 영문인거지?]
그는 두 사람을 훑더니 물었다.
“말하자면 긴데...”
[혹 이것도 주군의 뜻인가?]
데판은 여전히도 우직했다.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판은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리고 박율, 네 뜻이기도 한가?]
이어 데판이 물었다.
박율은 입을 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충분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로지 충성으로 무장한 그에겐 그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불어난다.
처음 그를 마주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시작하지.]
그가 내뱉었다.
데판의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장 속으로 움직였다.
* * *
사방에서 곡소리가 들려오고,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체들이 바닥을 뒹굴었고, 아직 식지 못한 살점들이 흩날렸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박율은 바알에게 닿기 위해 망치를 휘둘렀다.
허나 그는 도저히 바알에게 닿을 수 없었다.
단탈리온의 군세와 사자들이 있기는 하다만, 그만큼의 악마들이 역시나 달려들었다.
천칭으로 치자면 지금은 완벽한 수평을 유지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압도할 수 없었다.
“후우...”
박율은 정면에서 달려드는 악마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콰직하며 묵중하고 축축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 너머를 향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막는 악마들이 있었다.
전진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이길 수 없다.]
바알이 말했다.
그가 다시 손을 높이 들었다.
손의 주변으로 기다란 창이 수십개가 생겨났다.
다음 공격들이 쏟아진다.
[신속]
다른 이들을 챙길 여유는 없다.
그리고 만일 그랬다가는 바알을 상대할 수가 없게 된다.
박율은 당장 눈앞에 날아오는 가시들을 피하며 발을 굴렀다.
허나 그 숫자에 압도당해 박율은 다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젠장...”
시간이 흐를수록 사자 측이 불리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자들의 숫자와 단탈리온의 악마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었지만, 바알의 악마들은 끝도 없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직 바알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
그저 비소를 머금은 채 상황을 좌시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패배한다.
“박율 씨!!!”
하세원이었다.
박율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께서 준비를 끝마치셨다고 하셨어요!!!”
“뭐요...?”
하세원은 그 말을 끝으로 제 몸에 가두고 있던 권능을 개방했다.
몹시 차오르는 권능의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윽고 그것들은 그녀가 새긴 흔적들에 연결되어 포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포탈에서 사자들이 나타난다.
길드 율의 인물들이, 세계 각지의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겨라.”
그 가운데에서 장대호가 있었다.
그는 미래에서 사람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기라도 했다는 듯 손짓을 했다.
“박율!!!”
너무나도 오래 걸려 이곳에 온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박율의 시야가 일순간 하나의 포탈을 향했다.
“서희 씨...?”
그녀가 서 있었다.
서희는 아련한 눈으로 박율을 노려보았다.
반가웠다.
인사를 건네고 싶었고, 안부를 묻고 싶었다.
허나 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포탈을 빠져나와 야차화 하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서희가 말했다.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사자들.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이들이 한데 모여들었다.
한명련의 검강이 전장을 가로질렀고, 이세진의 킹콩이 나타나 전장을 헤집었다.
한지원의 등장은 부상을 입은 사자들의 전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세를 뒤바뀌기 시작했다.
박율은 그들을 마주했다.
[달려라.]
데판이 말했다.
박율이 상대해야 할 것은 악마들이 아니라는 눈빛이 담겨있었다.
박율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달렸다.
그를 향해 수십의 악마들이 달려들었다.
박율은 멈칫 망치를 들려 했다.
『뒤 돌아보지 말고 달려.』
마르가리타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정면을 파고들던 악마의 신형이 내리깔렸다.
그 옆에서 한명련의 검기가 날아들었고, 하세원의 활이 빈틈을 찾아 꿰뚫었다.
“...”
박율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들을 믿고서, 오로지 바알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제야 바알도 박율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발악일 뿐이다.]
바알이 마기를 날린다.
수십, 아니 수백의 가시가 날아들었다.
[척후]
[신속]
일순간 세상이 느려지며, 박율은 그 느려진 세상 속을 유영했다.
빈틈없이 날아드는 바늘 그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망치를 들어 가시들의 궤도를 바꾸었다.
차악!!!
가시들은 박율의 몸뚱이에 생채기를 내고 그를 지나쳤다.
[...]
바알이 불쾌한 기색을 내뿜었다.
그리고 또 다시 마기의 창을 던졌다.
박율은 허리를 비틀었다.
창이 스쳐 지나간다.
[감히.]
소나기가 내렸다.
검게 물들은 빗물은 날카로웠다.
닿는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베어내는 빗물이었다.
박율은 그 빗물 속을 뛰어다녔다.
그것들이 박율의 몸에 상처를 내지만, 그 어느것도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이윽고 박율은 바알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 눈이 교차했다.
박율은 망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내리찍는다.
콰앙!!!
“...!!!”
허나 망치는 바알에게 닿지 못했다.
그를 세상과 분절시키는 하나의 결계가 있었다.
[죽어라.]
바알은 손을 뻗었다.
동시에 마기의 창들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막을 수 없다.
박율은 치명상이 될 것들은 쳐내고 나머지들은 몸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파바박!!!
가시들이 그의 몸에 박힌다.
박율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추락했다.
“커헉...!!!”
바알은 다시 손을 뻗었다.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손놀림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에는 칭찬하지.]
마기가 뭉치며.
[허나 벌레는 벌레일 뿐.]
기다란 창으로 변한다.
그의 손이 흔들리며 창들이 쏟아진다.
박율은 무력하게 그것들을 보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
“망할...!!!”
그저 마지막을 위한 힘을 짜낼 뿐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망치에 뭉치며, 그의 팔이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한 점으로 모든 힘들이 모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바알의 창들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파바박!!!
창들이 박힌다.
허나 그 무엇도 박율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창들은 그 앞을 막은 누군가의 몸을 꿰뚫었다.
“...!!!”
박율은 눈 앞을 가로막은 이를 보았다.
검게 물들은 서희가 서있었다.
“빨리...일어나...”
그녀가 말했다.
그 입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박율의 뺨을 어루만졌다.
“안돼...”
서희는 희끗한 미소를 지었다.
“...얼른 끝내.”
그리고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애석한 숨소리가 박율의 귀를 스쳤다.
죽어가는 이의 소리였다.
박율은 서희를 보았다.
온몸을 뒤덮은 흑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전조였다.
“...!!!”
박율의 시선이 곧 바알을 향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절망이 한데 섞인 눈으로 바알을 보았다.
[아주 잠시 눈을 뜬 시간이 늘어난 것 뿐이다.]
바알이 말했다.
그 한마디조차 그는 모든 이들을 괄시하고 있었다.
박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수...있지?”
서희가 나지막이 물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박율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망치 끝에 뭉친 힘이 발아를 시작했다.
이내 싹이 틀 그 힘은 곧 바알을 향했다.
바알은 다시 마기의 창을 내뿜지만, 이번엔 그 무엇도 박율에게 닿지 못했다.
다만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이윽고 박율은 바알에게 닿았다.
그의 망치가 바알을 내리찍었다.
콰앙!!!
여전히 그는 그를 가로막은 결계를 지니고 있었다.
허나 그 일격에 결계에 금이 벌어졌다.
그리고.
쨍!!!
결계가 부서졌다.
[...!!!]
바알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박율은 후속타를 그에게 먹이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 물러났다.
“다음이 마지막이야...”
[허나 네 공격은 고작 나를 지키는 결계만을 부쉈다.]
불쾌한 기색을 내뿜던 바알이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기다란 창이 그의 위로 떠올랐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창이었다.
허나 그 속에 내재된 힘은 도저히 범접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내게는 최악의 공포를 선사해주지.]
기다란 창은 더욱 위협적으로 변했다.
팽창하는 격의 위엄은 전장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가로챌 정도였다.
허나 박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권능을 해방한다.
[흡수]
전장에 널리 퍼진 죽은 이들의 온기가 그의 손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사자들의 힘이었고, 죽은 악마들의 힘이었다.
사자들을 위한 복수이자, 악을 처단하기 위한 힘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후우...”
박율은 호흡을 몰아쉬었다.
너무나도 커다란 힘에 온몸이 터질 듯했다.
허나 그는 버텼다.
그 힘을 한데 응축했다.
모든 것을 담은 일격.
두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솟구치는 격이 최고점에 다다른 순간.
두 힘이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