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79화 (179/183)

179화

박율의 신형이 푸르카스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자리엔 검은 핏물이 만개했다.

[커헉...]

푸르카스는 피를 토해냈다.

고개를 떨어뜨리면 가슴팍은 사라진 후였다.

[어떻게...]

울컥, 핏물이 역류하여 입으로 쏟아진다.

텁텁하고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이어 답답하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라왔다.

푸르카스의 눈이 자신의 온몸을 살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불가사의한 것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엔 부정했다.

수백 년,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이러한 감각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니 말이다.

순간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 생각은 하나둘 무너지는 자신의 몸뚱이를 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그 모든 것들은 찰나에 이루어졌다.

그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자신의 심장을 터트리고 추락하는 박율이 보였다.

그리고 손을 뻗는다.

원망과 절망이 뒤섞인 눈초리였다.

낫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그의 낫은 박율에 의해 이미 부서진 후였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만, 방법이 없었다.

[감히...]

박율을 향해 뻗은 손이 주먹을 쥐었다.

덜덜 떨리는 주먹에서 마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손에서부터 시작된 마기의 폭주는 전완을 거쳐, 어깨를 넘어 전신으로 퍼졌다.

푸르카스의 몸뚱이가 울퉁불퉁 변하고 있었다.

폭주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혼자는 죽을 수 없다...]

마기가 폭주했다.

휘몰아치는 마기의 전장에 모든 이들이 그를 보았다.

위협적인 것을 넘어 상당히 위험한 마기의 돌풍이었다.

가만히 있었다가는 돌풍에 휘말려 죽을 성싶었다.

푸르카스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안 두지.”

박율은 곧바로 망치를 잡았다.

그가 완전히 폭주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망치를 쥔 손을 통해 그의 힘이 스멀스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윽고 망치의 첨단에 모였고, 하나의 창처럼 빛의 입자를 이루었다.

박율은 허리를 비틀었다.

일격을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어깻죽지마저 회전시켜, 그대로 던진다.

파앙!!!

공기를 꿰뚫는 창이 파열음을 쏟아내며 날아갔다.

차악!!!

쾌속으로 날아가던 창이 푸르카스의 안면을 꿰뚫었다.

울퉁불퉁하게 변해 폭주하던 마기가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푸르카스의 몸뚱이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처박혔다.

이어 박율 역시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뻔 했지만,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박석훈의 도움으로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쿵!

박석훈은 이를 악 깨물고 박율을 받았다.

“후...”

“고마워요.”

박율은 박석훈에게 감사를 전했다.

박석훈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왜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아뇨...”

그의 시선은 박율을 넘어 바닥에 처박힌 푸르카스의 사체를 향했다.

박율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마왕이었던 자를 이렇게 단시간에 처치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병상에 누워있던 식물인간이었으니 말이다.

박율은 박석훈의 시선을 의식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대충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지만...”

귀로 이야기를 듣는 것과 눈으로 온전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괴리가 있었다.

박석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율은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자신을 향해 선 늑대 가면을 향해.

“...”

그는 침음했다.

아직 미처 지우지 못한 속죄가 남아있다는 듯.

박율이라는 남자의 앞에 당당하게 서지 못하겠다는 듯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형.”

박율이 그를 불렀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꾹 닫은 채였다.

“잘 지냈어요?”

박율이 선뜻 그를 향해 발을 뻗었다.

“...”

너무나도 오랜만에 건넨 인사에 백봉기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허상이 아니고, 꿈이 아니었다.

완연한 현실에 백봉기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내 그는 박율을 끌어안았다.

“...잘 돌아왔다. 율아.”

두 사람의 상봉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율 씨!!!”

하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하세원이 숨을 헐떡이며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박율은 백봉기와의 감격의 상봉을 뒤로하고 그녀에게로 갔다.

“허억...!!! 허억...!!!”

그녀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달려왔다.

“왜 그래요?”

“저기...포탈...”

“숨 좀 쉬고 말해요.”

박율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안광은 이미 미친 듯이 불타고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사람...나타났어요...”

“포탈에서 사람이 나타났다고요?”

여전히 박율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포탈에서 사람이 나타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박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시 말해봐요. 뭐라고요?”

“후우...”

하세원은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고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후... 포탈에서 사람이 나타났어요.”

“사람이요...?”

하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보았다.

커다랗게 뜬 두 눈은 그녀를 향한 채였다.

“포탈 어딨어요!”

“사라졌어요.”

“네...!?”

문득 하세원을 보는 박율의 표정이 일변했다.

무언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뭐랄까 바닥에 깨끗하게 깔릴 눈이 즈려밟히고 부서져 더럽혀졌다고 해야 할까.

하세원의 눈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치기가 느껴졌다.

일단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대충 상황을 봐선 포탈은 일방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듯했다.

하세원이 만들었던 아니던, 결국은 나오는 쪽만 가능한 듯했다.

그녀가 말한 이전의 경우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했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

“그게...”

하세원은 잠시 뜸을 들였다.

“...포탈이랑 같이 사라졌어요.”

“네...? 사라졌다니...?”

그리고 그녀가 박율을 본다.

박율은 또다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표정을 구겼다.

“...제가 나타났었거든요.”

뒤이어 내뱉는 그녀의 말에 박율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뭐...뭐라고요?”

“제가 나타났어요. 포탈에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를 마주하는 순간, 내가 사라졌어요.”

하세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었다.

“내가 사라진 순간,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침범했어요.”

하세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박율은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나타나고 사라진 순간 물밀 듯 처들어오는 기억들에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의 자아가 섞여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자들이 전쟁을 벌이고, 박율과 일행들이 푸르카스를 죽이는 동안 전장을 찾지 못한 이유였다.

“오랜만이에요.”

하세원은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박율은 그녀를 반갑게 마주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현실이 비틀린 감각이 들었다.

박율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굴렸다.

하세원은 일전까지 박율이 있던 그 시간대에서는 이미 죽어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났다니.

포탈이 온전히 그 시간과 연결된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도?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쩌적!

알 수 없는 소리에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커다란 균열이 벌어졌다.

그것은 점차 지평을 넓혀가며 마치 깨진 유리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박율은 저것을 본 적이 있었다.

‘신’을 마주하던 그 순간이었다.

현실이 산산조각나 우수수 떨어지던 그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대신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오롯이 박율이 아닌 전장의 모든 이들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현실의 붕괴...”

박율은 일전에 만났던 ‘신’이 뱉은 말을 떠올렸다.

이상의 간섭은 현실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그의 말.

박율의 시선은 하세원과 허공의 균열을 번갈아보았다.

현실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현실의 조각 하나가 박석훈의 위로 떨어져 사라졌다.

“...율 씨.”

박석훈의 목소리였다.

“이게 도대체...”

그 목소리는 정제되지 않은 그의 육성이었다.

또한 몇 분 전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머나먼 미래, 잔혹한 미래에 부서지고 찢어져, 이제는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박율과 박석훈의 시선이 교차했다.

동시에 전장의 모든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허공에 번지는 균열이 번지면 번질수록 그들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쨍!!!

허공을 가득 메운 균열이 부서진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소나기처럼 세상에 쏟아졌다.

두 세계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분명 바알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박석훈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의 시선은 방황했다.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겨우 정착한 곳은 박율이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움켜쥐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듯, 혹은 쏟아지는 기억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그는 고개를 휘저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장에 위치한 수많은 사자들이 똑같은 현상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쏟아지는 현실의 조각들 사이로 검붉은 대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계의 흔적이었다.

마계가 심연을 넘어 인간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박율은 몰아치는 붕괴의 현장에서 공황에 빠졌다.

모든 것이 일변하고 있었다.

마계와 현실이 융합되고, 미래와 현재가 섞이고 있다.

두 세계가 혼합되며, 현실의 붕괴가 퍼져나간다.

떨어지던 현실의 조각 하나가 박율의 위로 떨어졌다.

“...!!!”

박율의 머릿속으로 그가 받아들였던 단탈리온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니, 그것은 미래의 단탈리온이 아니었다.

백발의 노인과 함께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노인이 말했다.

‘새로운 신의 등장과 새로운 균형의 재정립.’

이어 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두 세계의 충돌을 예언했던 그와 박율에게 마지막을 부탁한다 이르던 그의 목소리가 박율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인과율이었다.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전개되어 가고 있다.

“박율!”

박율은 무너지는 현실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박율!!!”

흠칫.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백봉기가 서 있었다.

그만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그가 일갈했다.

그제야 박율은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