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푸르카스 세력의 공세가 이어졌다.
승기를 이어가던 사자 측 세력들은 갑작스레 몰려드는 악마들의 반기에 점차 하나둘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군단장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고작 손짓 한방에 전장에 있던 수십의 사자들이 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순식간에 너무나도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함에 사자들은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없어...”
“어떻게 저런 괴물을 상대하라는 거야...!”
사자들이 절망에 빠졌다.
그것은 곧 사자들의 전의상실로 이어졌으며, 절망감을 느끼고 공포에 휩싸인 사자들은 자리를 이탈해 도주를 시도했다.
허나 전장에서 등을 보인다는 것은 자살과 다름 없는 것이었다.
도주를 시도하던 이들의 절반 이상이 결국은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많은 사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도망칠 수도, 맞설 수도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맞서 싸워라.”
오직 한 사람.
늑대 가면을 쓴 한 남자만이 선봉에서 맨몸으로 악마들을 막고 있었다.
그는 해골 무리를 소환하며, 날카로운 뼛날로 수십, 수백의 악마들을 양단했다.
그는 이미 마왕을 마주한 전적이 있었기에, 고작 군단장 정도로는 전의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리 그가 막강하다한들 밀려드는 파도를 고작 칼 한 자루로 베어낼 순 없는 법.
끝없이 밀려드는 악마들의 세례에 차츰 물러서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콰앙!!!
어디선가 떨어진 커다란 망치가 달려드는 악마들을 파쇄하듯 터트렸다.
그 뒤에는 익숙한 여인이 서 있었다.
“...”
마르가리타.
그녀였다.
백봉기는 흠칫 그녀를 보았다.
인사치레는 필요 없다.
백봉기는 짧은 눈 마주침 이후로 다시 달려드는 악마들을 향해 발을 딛었다.
그 뒤로 나타나는 박석훈과 길드 율의 일원들.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자들의 공세에 악마들은 주춤 물러섰으며, 기세를 몰아 사자들은 더욱 열을 내고 전진했다.
하지만.
“커헉...!!!”
어디선가 날아온 마기가 돌진하던 사자 하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
마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선 새로운 심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연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는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었다.
거대하고도 섬짓한 마기.
그것은 마왕의 것이었다.
쩌적!
바닥이 갈라지고, 마기의 돌풍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터질 듯 쏟아지는 마기에 사자들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예정에 없던 상황이었다.
마기의 총량이나 상황을 보았을 때, 마왕이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었다.
플라우로스와 안드라스의 죽음으로 악마군들의 움직임이 전과 달라졌다곤 하나, 너무나도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하아...”
백봉기는 무거운 숨을 뱉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섬뜩한 감각이었다.
마왕의 살기.
몸을 지탱하고 선 다리가 후들거릴 듯 흔들렸고, 산소를 대신하는 마기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드 율에서 지원을 온 이들은 어지간해선 일전에 마왕을 눈앞에서 마주한 이들이었다.
그 공포를 여전히도 기억하는 이들은 다가오는 죽음의 향기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리고 더더욱 벌어지는 심연.
그 너머에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정체는 창백한 말을 탄 냉혹한 노인이었다.
그는 기다란 낫을 든 채 권태로운 눈으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저것이 마왕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허약해 보이고, 나태한 모습이었지만, 그가 내뿜는 마기의 양은 여느 악마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
푸르카스는 낫을 높이 들었다.
첨예한 날이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낫을 내리찍었다.
낫은 그저 허공에 호를 그렸을 뿐이지만, 낫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거대한 검은 일격이 전장으로 떨어졌다.
콰과광!!!
고작 일격이었지만, 전장의 절반이 갈라졌다.
그 아래로 수많은 악마들과 사자들의 피, 그리고 살점들이 떨어졌다.
푸르카스는 이번에 낫을 정면으로 들었다.
낫의 끝에서 생겨나는 작은 물방울.
그것은 처마에 맺힌 고드름처럼 툭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바닥을 적시는 검은 물방울.
그리고 이내 물방울의 흔적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한 욕조에 검은 물감을 흩뿌리듯 검은 자국들이 사방에 번져나갔다.
번져나가는 자국들은 죽은 이들의 사체에 닿았다.
“...!!!”
그것들을 보던 사자들은 눈을 의심했다.
이미 죽어있던, 혹은 낫에 베어 죽은 이들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사...살려...”
일어난 것들은 피를 뚝뚝 흘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사자들이 그들을 도우려하자.
차악!
그들은 자신들을 도우려는 사자들을 죽였다.
“아...아냐... 나는...!!!”
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온전히 푸르카스의 것이었다.
[모두 죽여라.]
푸르카스가 말한다.
그리고 그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악마들과 사자들이 죽음에서 벗어나 동료들을 그리고 적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도망쳐!!!”
사자들이 전장을 이탈한다.
악마들을 상대하던 이들은 동료였던 이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들이 택한 것은 고작 도피였다.
허나 으레 그러하듯 전장에서의 도망은 곧 죽음이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려던 순간이었다.
“맞서 싸워라!!!”
늑대가면이 소리쳤다.
그의 검은 적을 노렸다.
적의 본신은 아군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가차 없이 그들을 죽였다.
“동료를 죽이는 것이 힘들다면 고통 받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어라!!!”
땅바닥에서 기어올라온 해골들이 적들을 포박하고.
차악!
늑대가면의 뼛날이 그들을 동강낸다.
“...”
그가 내뱉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서 있는 땅은 스페인이었고, 악마들을 상대하는 사자들 역시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온전히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싸워라!!!”
그를 바라보는 길드 율의 사자들 역시 한마음이었다.
그를 따라 검을 휘두르고, 권능을 개방했다.
죽지 못해 고통받는 이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고 있었다.
잔인했으며 잔혹한 방식일지라도, 그들에게 그것은 안식일 터였다.
그들의 선수를 시작으로 사자들이 다시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푸르카스 측의 공세로 공황에 빠졌던 이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검을 높이 들었다.
[...]
푸르카스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늑대가면을 보았다.
아까부터 그가 거슬렸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의 존재가 사자들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느낌이었다.
푸르카스는 다시 낫을 높이 들었다.
그를 죽인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푸르카스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낫을 휘둘렀다.
낫의 첨단에서 생겨나는 검은 마기의 일격이 초승달처럼, 늑대가면을 향해 쇄도했다.
“...!!!”
늑대가면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검은 일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어지간해선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본능이 말했다.
저것은 피할 수 없다고.
“젠장...”
욕을 뇌까리던 순간이었다.
콰과광!!!
검은 일격이 늑대가면을 덮치려는 찰나,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일격을 맨몸으로 막아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작은 망치 하나만으로 막았다.
일격을 막는 남자의 몸뚱이가 바닥을 긁으며 뒤로 물러서지만, 그는 이내 망치를 높이 쳐 올려 일격을 허공에 날렸다.
“후...!”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본 늑대가면은 자리에 굳었다.
가면에 가려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박율은 그 너머를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형.”
그리고 말한다.
그 한마디에 늑대가면은 동요했다.
“율아...”
늑대가면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사라진 이후 그가 그림자 속에 들어갔던 일을, 여전히 그가 저지른 일들을 속죄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같은 것들이었다.
박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었어요.”
박율은 고개를 돌려 다시 푸르카스를 보았다.
“할 얘기가 많을 거 같은데.”
늑대가면은 박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다 이해하니까.”
박율은 말했다.
“끝난 다음 다시 이야기하죠.”
“그러고 또 사라지면...!”
“안 사라질 거에요.”
그리고 그는 뛰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푸르카스였다.
[신속]
땅을 박차고 그의 몸뚱이가 허공을 날았다.
그가 양손에 쥔 망치는 하얗게 불타올랐다.
그것은 커다란 철퇴가 되어 푸르카스를 향해 쇄도한다.
[감히...]
푸르카스는 높이 든 낫을 또 다시 휘둘렀다.
초승달을 닮은 일격이 박율을 향해 치달았다.
허나 그는 망치로 일격을 쳐올렸다.
푸르카스의 일격이 바닥에 추락한다.
[하...]
푸르카스는 이를 빠득 갈며 연신 낫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박율은 피하거나, 혹은 일격을 빗겨쳤다.
푸르카스는 점점 초조해지는 얼굴로 낫을 휘둘렀다.
저 녀석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신한 것은 그는 위험했다.
바닥에서부터 박차고 날아오는 그 모습 과정들이 마치 목에 칼을 겨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푸르카스는 쉴새없이 참격을 날렸다.
허나 그 무엇도 그에게 닿진 못했다.
“간다...!!!”
어느새 푸르카스의 목전에 도달한 박율은 허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스프링처럼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그 반동으로 망치를 내려찍는다.
쾅!!!
푸르카스는 반사적으로 낫을 높이 들어올렸다.
낫과 망치가 맞부딪히며 굉음이 울려퍼졌다.
[크윽...!!!]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낫을 든 푸르카스의 팔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콰과곽!!!
박율은 망치에 더욱 힘을 실었다.
푸르카스의 낫이 얼그러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이내 낫이 부서졌다.
콰작!!!
박율은 연이어 푸르카스에게 공격을 시도하려 하지만, 뒤이은 공격까지 하기엔 시간과 힘이 모자랐다.
이미 허공에서 최고점을 찍은 박율의 몸뚱이는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무방비상태이기도 했다.
푸르카스는 양손을 모아 마기를 모았다.
박율이 손쓰지 못하는 사이 그를 죽여야했다.
[죽어라!!!]
푸르카스가 마기를 날리는 순간.
바닥에 있던 늑대가면은 해골들을 소환해 그들을 밟고 도약했다.
그리고 박율의 아래로 달려간다.
“뛰어라...!!!”
박율의 아래에 도달했을 때, 백봉기는 허리를 비틀어 박율을 날렸다.
“좋아요...!!!”
박율은 백봉기의 힘으로 탄력을 받아 그대로 다시 뛰었다.
그의 망치는 날아오는 마기 덩어리를 꿰뚫고, 푸르카스의 목전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