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75화 (175/183)

175화

박율은 허공에 정지한 채 불안한 눈동자를 굴렸다.

혹시 바알의 함정에 걸려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접혔다.

현실을 담은 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세상은 여백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곳엔 정장을 입은 채 새하얀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손에 와인잔을 든 채 흘깃 박율을 보았다.

『왔는가.』

“...!”

낯선 이였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박율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득하며 까마득한 존재.

마주하는 것만으로 실금을 할 것 같은 격을 지닌 존재.

그는 ‘신’이었다.

드르륵.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박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툭 하고 그를 건들자.

쿵!

허공에 멈춰있던 박율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갑네.』

“당신은...”

박율은 경외와 놀람, 그리고 의심을 한껏 담은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마주했다.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라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박율은 눈을 부라렸다.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본능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말하고 있었다.

『왜, 믿지 못하겠는가?』

남자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불신을 건네는 박율의 모습마저도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이러면 어떠한가.』

딱!

남자가 손가락을 부딪혔다.

그러자 남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어깨까지 오는 곱슬머리와 지긋한 수염이 돋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흔히들 알고 있는 초월자의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이 나를 이 모습으로 알고 있더군.』

여전히도 벙찐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율을 보자 남자는 웃음을 흘겼다.

『혹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다시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에 나타난 모습은 서희의 모습이었다.

관능적인 몸의 윤곽이 드러나는 농염한 드레스에 색기 있는 화장기가 짙은 서희였다.

그제야 박율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지...지금 뭐하는...!!!”

『이 모습이 좋지 않은가?』

서희의 모습을 한 아득한 자가 박율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길로 박율의 턱을 들었다.

박율은 당황한 얼굴로 손길을 치웠다.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퍽 즐겁구나.』

아득한 자는 파안대소를 지으며 박율을 놀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었다.

“다...당신은 남자잖아요...!”

『내가 남자라고 누가 그러지?』

한참 웃던 아득한 자는 그대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백색의 원피스 사이로 서희의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났다.

『성별이라는 것은 나에게 하나에 국한된 것이 아니야.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나인 것이지.』

그는 와인잔을 기울였다.

박율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는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눈 앞의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박율은 고개를 흔들더니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바알이 지금...”

『그만.』/p>

신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박율을 놀리던 때와는 달리 사뭇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자네는 너무 많은 개입을 했어.』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상의 개입은 현실의 붕괴로 이어질 거야.』

“예...?”

『자네는 이 시간선에 속한 이가 아니니 말이야.』

여전히 박율은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은 탓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이곳은 자네의 세상이 아니네.』

박율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과거로 회귀를 경험하긴 했다만, 그가 본래 있던 곳은 여기, 즉 악마에게 패배한 시간선이었다.

이곳이 그의 세상이 아니라니.

『뭐,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돼.』

신은 다리를 반대로 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엔 자네의 존재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야.』

“예...?”

『그대는 이 시간선의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예!?”

『그이는 그대를 과거로 돌려보내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네.』

박율의 찌그러진 미간이 펴질 생각을 않았다.

『그 결과로 자네는 이 시간선에서 홀로 떨어져 과거에 편입된 것이고. 나는 그로 인해 틀어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네.』

“...”

『다른 시간선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나였겠지. 아마 같은 미래를 구상하고 있었을 거야.』

박율은 벙찐 얼굴로 그를 보았다.

너무 방대한 정보가 한꺼번에 머리 속으로 들이닥치는 기분이었다.

방대한 정보라기보단 이해할 수 없는 정보라고 하는 게 맞을 터였다.

『각설하고, 본론부터 말하지.』

“본...론이요?”

『자네를 다시 과거의 시간선으로 데려갈 생각이라네.』

“잠깐...! 그러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인류는 패배할 지도 모르지.』

신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태연하다기보단 무심하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는 와인잔을 기울였다.

텅 빈 와인잔에서 와인이 흘러나와 신의 입가를 적셨다.

『신이라는 자가 왜 그렇게 무심하냐고?』

박율은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만, 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은 중립에 선 존재여야 하거든.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안 돼.』

신은 귀찮은 일을 언급하듯 한숨을 팍 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장 어려운 일이야. 선과 악,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저울질을 해야 하니 말이야』

그리고 신은 지금 이 상황을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나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을 추구하는 존재니까.』

딱.

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박율의 몸뚱이가 공백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잠깐...!”

『두 세계는 곧 충돌할 것이라네.』

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율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사라지는 그의 눈높이를 맞췄다.

얼굴의 일부분과 귀만 남은 박율은 불안한 눈동자로 신을 보았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머지를 부탁하겠네.』

박율이 완전히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쩌적.

공백으로 가득 찬 세상에 작은 균열이 벌어졌다.

신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권태로우면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너머에서는 단탈리온과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신을 마주한 단탈리온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왔군.』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나보군.”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신을 보았다.

『그야, 이런 일을 벌일 인물이 자네들 밖에 더 있나?』

[그리 봐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칭찬은 아니네만.』

아득한 자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와인잔을 돌렸다.

단탈리온과 노인은 그저 자리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서론을 필요없네, 본론부터 말하게. 그래서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

단탈리온은 꾹 닫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대로면 두 세계는 붕괴하고 말테지.”

조용한 단탈리온의 곁으로 노인이 한 발자국을 걸어나왔다.

단탈리온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첩된 두 세계에 얽힌 하나의 오류, 그리고 사라진 한 세계의 신.”

노인은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막으려 이곳으로 온 게야.”

『그렇군.』

아득한 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와인잔은 하염없이 원을 그렸다.

노인은 허리춤에 손을 얹더니 허공에서 커다란 붓 하나를 꺼냈다.

제 몸뚱이보다 곱절은 더 큰 붓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위화감 얽힌 살기가 어려있었다.

“천칭은 여전히 기울어 있다네.”

와인잔을 보던 아득한 자가 고개를 들었다.

『허면 나는 죽어야 하는 건가?』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고.”

노인은 혀를 질질 끌었다.

“허나 자네는, 아니 자네였던 자는 중심을 부수고 천칭을 기울였네.”

『그 결과 두 세계가 붕괴할 위기에 처했고 말이지.』

[이대로면 신이 사라진 이 시간선은 무너지고, 과거의 시간선이 본래의 역사에 편입될 겁니다. 그대로 끝이 나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더군.』

[과거의 시간선 역시 지금의 시간선의 영향을 받은 역사입니다. 현재의 시간선이 무너진다면 결국은 과거의 시간선까지 영향을 끼칠 테죠.]

“두 세계의 붕괴를 막을 방법은 하나 뿐이라네.”

노인은 검을 잡듯 붓을 높이 들어 아득한 자를 겨누었다.

“새로운 신의 등장, 그리고 새로운 균형.”

아득한 자는 노인의 위협 어린 살기에도 여전히 태연하게 와인잔을 돌리며 입가를 적셨다.

노인은 단호한 한숨과 함께 아득한 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그는 권태로운 눈빛으로 노인을 보았다..

『헌데 실수를 범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었다.

『그 아이가 어느 순간 신을 찾더군. 그 아이는 신을 믿지 않았는데 말이야. 헌데 어느 순간 아이는 신을 믿고 있었지.』

“크흠...”

노인은 목을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4, 6, 14, 23, 35, 36.』

아득한 자가 숫자를 하나씩 읊을수록 노인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갔다.

“그...그건...”

[결말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습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단탈리온이 나서 상황을 수습하긴 했지만, 노인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득한 자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탓을 하려는 게 아니네.』

아득한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와인잔을 허공에 놓았다.

그러자 애초에 없었다는 양 사라지는 와인잔.

노인은 씁쓸한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탓하고 싶다면, 탓하게. 혹 불합리하다고 생각된다면 나를 죽이게나. 나 역시 자네처럼 천칭의 저울 같은 존재니까 말일세.”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었네.』

아득한 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마지막 남은 넋이기도 했다.

노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붓을 높이 들었다.

“원망하지 말게나.”

『할 수 있는 게 원망밖에 없어서 말이야.』

노인은 높이 든 붓으로 한 획을 그었다.

그러자 아득한 자가 서 있는 땅에서부터 끝을 알 수 없이 뻗은 하늘의 공백에까지 검은 먹이 번졌다.

쩌적.

그리고 갈라지는 여백.

단탈리온은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수고했네.”

두 갈래로 갈라진 아득한 자의 몸은 그대로 양단되어 여백 속에 흩어진다.

마치 먹이 종이에 물들 듯 말이다.

이윽고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아가시지요.]

“그러지.”

단탈리온과 노인은 짧은 탄식 이후 발을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