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차악!
핏물이 낭자하게 흩날렸다.
얼마나 많은 핏물이 비산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만, 그 비린내만큼은 강진호와 그를 죽이려는 악마들이 있는 성을 메우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또 다시 달려든다.
강진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대로 허리를 비틀었다.
콱!!!
모로 비튼 강진호의 검이 달려들은 악마의 복부를 꿰뚫었다.
곧이어.
차악!
강진호는 악마의 복부에 박힌 검을 그래도 들어올렸다.
검을 따라 악마의 몸에 커다란 틈이 벌어진다.
털썩.
“하아...하아...”
강진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검은 피에 물든 흑색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악마들은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당장 죽은 악마들의 숫자만 열넷.
그들은 아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초주검이 되거나,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악마들은 성 가운데에 서 있는 강진호를 노려볼 뿐 움직이지 못했다.
이쯤되면 지칠 법도 하지만, 강진호는 여전히도 매서운 눈을 한 채 언제 어디서 달려들지 모르는 악마를 경계하고 있었다.
되려 숨이 더욱 거칠어질수록 기세는 거세졌다.
강진호는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몸상태를 진정시키고는 다시 검을 높이 들었다.
“...바알을 데려와라.”
그리고 말했다.
“전부 죽고싶지 않다면.”
차가운 바람이 가늘게 벌어진 창을 타고 성 내를 유영했다.
정적이 일며, 모두가 숨을 죽였다.
명예를 중시하는 악마들을 도발하는 대사였지만, 여전히도 악마들은 날선 경계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달그락.
저 멀리에서 술잔 소리가 울리며 커다란 마기가 움직였다.
마기의 주인은 잔을 한입에 비우더니 쾅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시끄럽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강진호와 그의 시선이 마주했다.
“...네놈은.”
강진호는 저 악마를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레포르.
지금은 바알의 수하에 있지만, 한때 하나의 마계를 지배했던 마왕이었다.
강진호는 반사적으로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악마가 섬뜩한 미소를 짓는다.
[시끄러워서 술을 먹을 수가 없잖아.]
악마가 사라졌다.
콰앙!!!
그리고 강진호의 신형이 사라지며 성의 두꺼운 벽에 박힌 채 다시 나타났다.
“큭...!”
다행히도 발레포르의 일격을 맞기 직전에 공격을 막았기에, 그리 큰 타격은 없었다.
후두둑!
강진호는 벽을 부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보]
달려든다.
악마들의 시선은 여전히도 벽쪽에 머물렀다.
허나 발레포르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강진호가 달려오는 그 길을 말이다.
[순보]
[격랑]
두 번에 걸친 기만한 움직임.
강진호는 벽을 딛고 그대로 발레포르를 향해 검을 뻗었다.
차악!
검의 궤적을 따라 발레포르의 살가죽에 핏물이 고였다.
[오호라.]
허나 아픈 기색은 없었다.
그저 재밌다는 얼굴로 상처를 흘깃 보더니 이내 반대편에서 나타난 강진호를 보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첫 번째 일격에 이은 두 번째 일격.
한층 짙어진 격이 발레포르를 스친다.
[흠...]
연속해서 달려드는 강진호.
발레포르는 이번에는 몸을 비스듬히 눕혀 그의 공격을 피했다.
이번에도 그의 검에 담긴 격은 더욱 고양되어 있었다.
[휘두를 때마다 격이 쌓이는 모양이군.]
강진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다음 공격을 위한 발판을 찾을 뿐이었다.
발레포르는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전투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는 한쪽 주먹을 허리춤에 가져가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 사이 강진호의 검은 두 번을 더 스쳐, 흘러넘칠 듯한 격을 채운 상태였다.
저 멀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강진호.
그의 검에서 느껴지는 격은 최고치에 달한 듯한 모습이었다.
허나 발레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주먹에서 뿜어져나오는 마기는 성 내를 가득 울릴 정도였다.
강진호는 다음 일격을 위해 발을 뻗었다.
동시에 발레포르는 한쪽 발을 뒤로 끌었다.
어느 공격이 닿던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힘이었다.
두 강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서로의 목을 탐하는 뱀처럼 혓바닥을 내밀 뿐이다.
그리고 두 힘이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그만.]
짙고 짙은.
어쩌면 새카만 흔적뿐인 마기가 그들을 짓눌렀다.
격랑의 마지막 획을 그으려던 강진호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으며, 발레포르의 주먹에서 피어오르던 마기는 이내 잠잠해졌다.
뒤이어 등장하는 존재의 격에 눌려 두 인물은 자리에 굳었다.
[...쳇. 오랜만에 재밌을 뻔했는데.]
발레포르는 저릿한 마기를 느끼며 주먹을 풀었다.
그의 뒤로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악마가 등판했다.
그의 등장만으로도 주변에 있던 악마들이 절로 무릎을 꿇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 막혀오는 중압감의 정체.
바알이었다.
[한창 중요한 시기에 아까운 인재를 둘이나 잃기는 아쉬워서 말이야.]
바알은 전투가 벌어진 흔적 사이를 걸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반쯤 쓰러져있는 강진호를 향했다.
[귀하신 양반이 이곳엔 무슨 일로?]
강진호는 자신을 짓누르는 마기를 떨쳐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바알 역시 그를 보았고, 두 개의 팽팽한 긴장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바알은 아주 천천히 그의 행태를 살폈다.
비루한 옷차림에 온몸 가득 벌어진 상처들.
당장 죽는다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바알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비웃음과 즐거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감정을 내비췄다.
강진호는 이를 빠득 갈았다.
[재밌는 하루를 보내고 왔나 보군.]
그리고 비아냥거렸다.
강진호는 떨리는 주먹을 애써 가라앉히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바알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힘이 필요하다고?]
강진호는 고개를 처박은 채 말이 없었다.
바알은 희미한 웃음을 흘기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터벅.
한 발자국, 그의 발이 땅에 내디딜 때마다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마기가 성내를 가득 채웠다.
터벅.
힘껏 쥔 강진호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터벅.
그의 존재가 더욱 가까워짐을 느껴며 강진호는 살의에 빠졌다.
허나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를 죽이려 힘을 탐하는 자에게 힘을 준다는 건 너무 어불성설 아닌가?]
바알은 말과는 다르게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강진호의 앞에 섰다.
강진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날숨을 뱉었다.
차가운 날숨이었다.
그 숨이 만약 누군가에게 닿았다면 냉기를 느꼈으리라.
“...”
[꽤나 강한 녀석이 있나 봐. 인류 최강이라 불리던 남자가 이렇게 넝마짝이 되어서 내게 힘을 구걸하다니.]
바알은 비아냥거리며 강진호의 주위를 둥글게 걸었다.
그럴수록 강진호의 떨리는 숨은 더욱 격해졌다.
그의 숨을 땅에 닿아 검고 검은 재가 되어 흩어진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땅을 박차고 일어나 그의 목을 베고 싶었다.
“...”
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강진호의 시선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차오르는 마기에 곧바로 고개를 처박았다.
[이 순간에도 나를 죽이려고 발악을 하는 자에게 어찌 힘을 주겠냔 말이다.]
바알은 강진호의 눈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발을 높이 들어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강진호는 목을 빳빳하게 힘을 준 채, 바알의 발을 버텼다.
바알은 더욱 세게 그의 머리를 눌렀다.
쾅!
이내 그의 머리가 땅바닥에 닿았다.
[수치스럽느냐?]
콰직!
[머리를 조아리고, 격이 짓눌리는 그대의 모습이 굴욕적인가?]
“...”
분노, 굴욕, 절망, 좌절.
그리고 굴복.
강진호가 또 다시 날숨을 내뱉는다.
그것은 파란을 일으키며 바닥을 두드렸다.
[나를 죽일 각오로 더욱 분노하고, 더욱 분노해라. 그리하면 네 원을 이룰지도 모르니.]
바알은 발을 꾹 누르고는 그대로 떼어냈다.
반동을 따라 강진호의 머리가 들썩였다.
[좋다. 힘을 주지.]
바알의 손이 강진호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뚝.
그의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마시거라.]
투둑.
[더욱 절망해라. 좌절해라. 그리고 분노해라. 그것이 네 업이다. 그리하여 내게 닿아보거라.]
떨어지는 핏방울이 강진호의 주먹에 닿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펼쳐 양손바닥으로 피를 받았다.
그리고 마신다.
비릿하고도 시큰한 피맛이 혓바닥을 맴돌았다.
뚜둑!
바알의 피가 그의 몸에 스며들며, 강진호의 온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마른 뼈소리가 머리를 조아린 강진호의 몸뚱이에서 울렸고, 덜덜 떨리는 주먹은 그 고통을 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문 채 고통을 인내했다.
터벅.
바알은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강진호는 머리를 처박은 채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아, 그리고 하나 알려주지.]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던 바알이 잠시 멈춰섰다.
[단탈리온의 마계에서 반란이 벌어지고 있다더군.]
그의 말에 강진호의 몸이 꿈틀거렸다.
[다른 뜻은 없네만. 반란의 때이며, 그대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아서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바알은 고개를 돌려 성의 상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강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그의 눈이 또 다시 검게 물들었다.
격랑(激浪)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아...”
[바알도 없는데, 못다한 전투나 다시 해볼까.]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발레포르가 말했다.
허나 그때까지도 강진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검의 날이 아주 천천히 그의 움직임을 따라 땅을 그었다.
드드득.
“...기분이 더러워서 말이야. 전부 덤벼라.”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다.
* * *
절명하는 쉼터의 거대한 문이 동강나며 그대로 땅에 박혔다.
문을 지키고 있던 거구의 악마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피범벅이 된 강진호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엔 더 이상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쿵!!!
그리고 그 뒤로 생기를 잃은 악마들의 몸뚱이가 쏟아졌다.
그 사이에는 한때 마왕이었던 발레포르의 사체까지 보였다.
[히...히익...!!!]
거구의 악마는 입을 틀어막으며 터져나오는 비명을 참았다.
입을 열었다가는 그 역시 같은 신세가 될 것만 같았다.
강진호는 말 없이 그를 지나쳤다.
“...안쪽이 지저분해졌다.”
강진호는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검을 허공에 놓았다.
그러자 마기의 검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거구의 악마는 입을 마치 제 기척을 숨기기라도 하듯 틀어막은 채 멀어지는 강진호를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일전에 보았던 남자가 아니었다.
더욱 깊어진 심연이 그의 궤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