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펼쳐진 양피지는 동굴에서 시작되어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율은 흘깃 노인을 보았다.
어느새 그는 머리를 조아린 채 기다리는 중이었다.
[...부디 조심하시옵소서. 바르바토스의 이명은 사냥꾼. 무수히 많은 마수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말했다.
박율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보았다.
아직 확실한 것도 없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그들에겐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계에 남겨진 박석훈과 사람들이 위험할 수 있었다.
하여 박율은 양피지를 손에 쥔 채 발을 옮겼다.
“갑시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정해졌다면 따를 수밖에.
동굴을 빠져나온 일행은 먼저 오른쪽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이들 먼저 찾기로 한 것이다.
거리는 대략 1km, 뛰어서 간다면 기껏해야 10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박율 일행은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저 할아버지도 단탈리온처럼 어려운 말만 하네.”
선봉으로 가던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단탈리온의 마계에 거주하는 이들의 특성인 듯했다.
생각해보면 데판도 쓸데없이 거창한 말투를 자주 내뱉곤 했었다.
“그 양반은 그러면 우리가 올 것도 알고,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도 알았다는 거잖아?”
박율은 혼잣말이나 내뱉듯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막을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 만든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뜻이 있을 거다.]
“그 양반은 제발 그림 좀 작게 그렸으면 좋겠네요.”
데판의 말에 박율은 한숨을 팍 내쉬며 답했다.
뜻이야 있겠지.
근데 기왕 뭔가를 해줄 거면 적당히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나저나 이쯤인데.”
양피지를 보던 박율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양피지가 가리킨 위치는 부근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딱히 그렇다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봉에서 걸어가던 박율은 자리에 멈춰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일제히 멈추는 일행들.
팅!
그리고 그 순간 박율의 옆으로 날카로운 쇠붙이가 날아들었다.
캉!!!
박율은 반사적으로 망치를 높이 들어 쇠붙이를 막았다.
그의 시선은 쇠붙이가 날아든 측면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
허나 달려든 방향은 정면이었다.
달려드는 악마의 검이 나선으로 박율을 향해 날아들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아니 어느 정도 전투에 능한 이들이라도 반응이 불가능할 법한 속도였다.
[죽...!!!]
허나 박율의 시선은 이미 정면으로 돌아간 이후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달려든 악마의 머리를 터트리려 망치를 쥔 어깨를 비틀었다.
턱!
박율의 망치가 악마의 목전에 도달하는 순간, 데판의 커다란 주먹이 정면에서 달려드는 마기를 막아 세웠다.
조금만 늦었다면 악마가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악마는 고개를 들어 데판을 보았다.
어깨에 가려 후광이 내비치는 터라 그의 본신을 정확히는 볼 수 없었다.
[...!!!]
[우리는 적이 아니다.]
데판이 말했다.
그리고 그를 본 악마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눈가가 떨려왔다.
이내 그의 눈은 분노로 점철되었다.
[감히 군단장님을 인형으로 만들다니...!!!]
악마의 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검을 빼내더니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세를 취한다.
한쪽 발을 뒤로 크게 끌어, 한 손에 든 검을 높이 든다.
다른 한 손은 마치 방향을 잡듯 검을 든 손 반대편에서 하늘을 향해있었다.
그에게서 마기의 돌풍이 일었다.
『조심.』
마르가리타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정면에서 악마가 발을 떼었다.
사라진 그의 신형은 눈동자가 그를 찾아 근육을 움직이기도 전에 데판의 좌측에서 나타났다.
이어 하늘 높이 날아 호를 그리는 검이 데판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만.]
데판의 남은 팔은 이미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검을 잡고 있었다.
그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기민한 움직임을 멈춘 악마를 보았다.
악마는 한순간에 자신을 제지한 데판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다시 데판에게서 검을 빼내, 다시 달려든다.
허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수십 번의 합이 이어졌다.
그 무엇도 데판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악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든다.
턱!
[허억...허억...]
[그만하거라.]
데판은 움켜쥔 검을 그에게서 빼앗아 바닥에 내팽겨쳤다.
[...!!!]
악마는 공포에 떨었다.
이미 죽었던 데판이 자신을 노려보는 그 시선에서 오금이 저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
그의 두 다리는 풀썩 주저앉았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데판은 말했다.
무겁지만, 무겁지 않은 그 한마디에 악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정에 빠진 얼굴이었다.
[진정하거라.]
[하지만 군단장님은 이미...]
[죽었겠지.]
[...!]
[허나 나는 아니다.]
그와 데판은 다른 존재였다.
[나는 죽은 자가 아니다.]
그리고 말했다.
그에게서 끊임없이 느껴졌던 작은 파란이 아주 잠시 멎었다.
[군단장님...?]
반대로 악마의 눈은 흔들렸다.
혼란에 빠진 이의 얼굴이었다.
분명 데판은 죽었다.
허나 그의 눈 앞에 있는 악마는 틀림없이 데판이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죽지 않으셨던 겁니까...?]
길어야 10초, 허나 악마에게는 억겁같은 시간의 고민 속에 나온 결론이었다.
데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일으켰다.
[진정 돌아오신 겁니까...!!!]
악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터지려는 울음을 겨우 참는 듯한 울렁거림이었다.
[어찌 홀로 있는 것이냐?]
데판의 시선이 숲을 둘러보았다.
다른 마기가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안 것이지만, 악마의 뒤에 죽은 토끼의 사체가 몇 구 떨어져 있었다.
[...혹 홀로 살아남은 것이냐?]
데판이 조심스레 물었다.
다행히 악마는 고개를 저었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갑작스러운 습격에 모두 흩어졌습니다!]
악마는 답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어디선가 투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 데판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나 악마의 것은 아니었다.
타다닥 하며 땅을 딛는 소리가 불규칙적이고, 여러 개가 겹쳐 들려왔다.
필시 짐승의 소리였다.
데판은 악마를 등 뒤로 숨기며 마기를 쫓았다.
그리고 이내 드러나는 정체.
“악마견입니다...!”
한명련이 말한대로 그것은 악마견들이었다.
머릿수만 수십, 아니 그 이상도 될 것 같은 숫자였다.
[크르르...]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악마견들은 살기를 마구 내뿜으며 일행을 보았다.
데판은 흘깃 뒤에 숨은 악마를 보았다.
그에게서 공포에서 비롯된 떨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저 악마견들이 습격의 정체인 듯했다.
“저놈들인가보네.”
박율이 망치를 들었다.
[무언가 더 있을 거다.]
데판이 그의 말을 받아쳤다.
아무리 악마견들의 머릿수가 많을지언정 단탈리온의 병사들이 악마견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약한 편은 아니었다.
보통 악마견들은 탐색용 혹은 고기방패로 쓰이는 소모품이니 더욱 그랬다.
일행들은 데판의 말에 경계에 좀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커다란 늑대를 닮은 마수가 걸어나왔다.
[히익...!]
데판의 뒤에 있던 악마의 떨림이 거세졌다.
아마 저 녀석이 악마들을 헤치게 만든 주범인 듯했다.
그럴법도 한 게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악마견들의 수십 배를 웃돌았다.
[캉!!!]
늑대가 아주 짧게 포효를 토해냈다.
그러자 대치중이던 악마견들은 박율 일행을 포위나 하듯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싸워야 할 것 같군요.”
한명련이 검을 꺼내들었다.
서희 역시 이미 야차화를 끝낸 채였다.
다른 이들 역시 말할 필요도 없는 상태였고 말이다.
그리고 데판이 발을 떼려는 순간.
턱!
악마가 데판을 붙잡았다.
[...?]
[안됩니다...!]
악마는 절규하듯 말했다.
[뭐하는 짓이더냐?]
[싸웠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악마가 데판을 막는 사이에도 포위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바르바토스의 마수들로 하나라도 죽게 된다면 곧바로 알아차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위험...]
데판은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악마견들이 달려들었다.
“갑니다!”
악마견들이 발을 구르는 타이밍에 맞춰 한명련이 검기를 내뿜었다.
차악!
날아간 검기가 그의 정면에서 달려오는 악마견들의 양단한다.
뒤이어 내려찍히는 야차화된 서희의 주먹.
쾅!!!
지진이라도 인 듯 땅이 흔들리며 주먹에 짓눌린 악마견들이 형태를 잃고 터졌다.
『다들 고개 숙여.』
마르가리타는 커다란 망치를 높이 들어 소리쳤다.
그리고 휘두른다.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숙인 일행들을 지나 망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악마견들을 날려버렸다.
콰과광!!!
날아간 악마견들은 형태로 잃은 채 나무들을 박살내며 떨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늑대 마수를 제외하고 악마견들의 절반 이상이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늑대 마수를 비롯한 악마견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주춤 뒤로 물러났다.
[...!?]
데판의 뒤로 숨어있던 악마는 두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 차례로구만.”
이번엔 박율이 먼저 나섰다.
그는 늑대 마수와 악마견이 도망치지 못하게 먼저 발을 떼었다.
[신속]
그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가 질주한 선상에 위치해있던 늑대견들의 형태가 일그러졌다.
이윽고 펑!
박율의 신형이 저 멀리에서 나타났을 땐 악마견들이 일제히 폭발음을 일으키며 주검이 된 후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늑대를 보았다.
그것은 포효를 내질렀다.
[저 녀석은 내가 맡지.]
데판이 등 뒤를 맡긴 악마를 두고 나섰다.
터벅.
한 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그의 덩치가 부풀어올랐다.
터벅.
두 걸음을 걸었을 땐, 이미 그는 숲을 장악할 듯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터벅.
마지막 걸음을 걷자 그는 어느새 늑대의 앞에 도착한 후였다.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마기에 늑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데판은 주먹을 높이 들었다.
높이 들어올린 주먹이 태양을 가렸다.
드리운 그림자는 늑대를 좀먹으며 다가간다.
늑대는 위협을 느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그것을 감쌌다.
허나 그것이 달아나기 위해 발을 떼었을 땐 이미 데판이 주먹이 그의 위를 장악한 후였다.
그리고.
콰앙!!!
굉음이 울렸다.
뿌연 흙먼지가 일어 시야를 가렸지만, 악마는 알 수 있었다.
늑대는 죽었다.
그리고 데판이 고개를 돌렸다.
[군단장님...!!!]
[걱정말거라.]
데판의 시선은 반대편을 향했다.
아마 바르바토스가 있을 그곳을 말이다.
그는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우리는 그 녀석을 죽이러 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