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았다.
붓을 이용해 선을 그리고, 선에 겹쳐 또 다른 선을 그리며, 그려진 선들을 통해 하나의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끝에는 미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누구도 볼 수 없는, 오로지 그녀만의 세계이자 칠흑 같은 세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모든 것을 관조하는 시간.
그것이 서희라는 사람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였다.
하여 그림을 그릴 때의 시간은 찰나와도 같았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하염없이 움직이던 서희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천천히 눈을 떴다.
“...”
그곳엔 역시나 그녀의 세계가 있었다.
진녹색의 숲과 그 위로 펼쳐진 붉은 하늘, 그리고 그 아래 흐르는 강물.
걸작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또 다른 미지의 세계였다.
“하...”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그림을 감상했다.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후,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는 것마저 사라져 버린 이후로 그림을 그려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림은 인생이었고, 자신을 태우는 성냥 같은 무언가였다.
온갖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그 감정들은 너무나 거대해서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양감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문득 눈에서 눈물이라는 것이 맺혀 광대를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아름다움에 취해서이기도 했고, 그림을 그렸다는 그 행위에 감복해서이기도 했다.
턱.
뒤에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얼굴은 보지 않았다만, 그가 박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히 별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행위만으로도 쓸데없는 위로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서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호흡을 정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됐어.”
그리고는 여전히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완성이야.”
“고마워요.”
박율이 말했다.
여전히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획하고 돌려 자리를 떴다.
그 이상 그림을 보고있노라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리를 뜨고 남은 이들은 조용히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남은 이들 역시 한동안 그림에 취해 입을 열지 못했다.
『...저게 어디를 나타내는 거지?』
정적을 깨고 마르가리타가 물었다.
하지만 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서희마저도 말이다.
붉은 하늘과 그 아래 흐르는 강물, 울창해야 할 법한 숲이지만, 반쯤 폐허가 되어버린 숲속 어딘가.
정확히 어디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산속 어딘가를 그려놓은 듯했다.
“흠...”
박율은 팔짱을 끼고는 그림을 살폈다.
어딘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장소였다.
“...!”
한참동안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박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박율 혼자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함께 그림을 보던 박석훈과 배중탁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
낮은 자세로 그림을 보던 데판은 세 사람을 표정을 보더니 인상을 지었다.
배중탁은 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 자리에 굳었다.
“여기 설마...”
“맞는 거 같지?”
“...네, 율 씨.”
『뭔데? 왜 너희들끼리만 속닥거려?』
세 사람의 반응에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 사람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왜 뭔데?』
마르가리타는 조바심이라도 나는 듯 셋을 재촉했다.
“...저주받은 숲이군요.”
한명련의 목소리였다.
마르가리타는 흘깃 고개를 돌려 소리를 쫓았다.
그들의 뒤로 활짝 열린 문에 기대 한명련이 서 있었다.
『저주받은 숲?』
한명련은 문에서 한 발자국 걸어 나와 창밖을 가리켰다.
“마물들로 가득한 숲, 사실상 근방 모든 마물들이 출몰하는 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입니다.”
마르가리타의 시선이 그의 말을 따라 창밖을 향했다.
“...과장을 조금 섞어서 말하자면 한국의 마물들이 전부 그곳에 있을 정도에요.”
박율이 한명련의 말을 이어 답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악마들까지 출몰하고 있는 형국이니...”
마무리는 박석훈의 것이었다.
『마물 정도는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사실 마물이나 악마들이나, 지금 박율의 입장에서는 그리 위험한 상대는 아니었다.
여차하면 숲을 통째로 날릴 수도 있는 전력을 지니고 있으니 마물 한둘 정도는 끽해야 몸풀기에 불과할 테지.
하지만 박율은 한숨을 팍 하고 내뱉으며 팔짱을 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
“서희 씨의 능력이 좋기는 하다만, 문제는 정확히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거든요.”
『그렇다는 말은...?』
“숲을 통째로 뒤져봐야 입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는 동안에 마물들과 악마들이 몰려들 거고, 혈혈단신으로 수백, 아니 수천, 그 이상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거죠.”
“위험해요.”
한명련이 박율의 말을 보조했고, 박율은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땅을 밟고 있는 이들에게 저주받은 숲의 마물들이나 악마들이 그리 위협적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허나 문제는 그곳에서 싸움을 벌여 소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근방의 모든 마물, 악마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게 가장 컸다.
아무리 약한 것들이 달려든다한들 그 숫자가 천군만군을 넘어간다면 위험할 수 밖에 없었다.
턱.
한명련이 지지해줄 팔이 없어 나풀거리는 소매를 앞으로 들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제 팔을 이렇게 만든 깊은 숲의 마물까지 깨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
『...? 깊은 숲의 마물은 또 뭔데?』
“설명하기엔 길고 여하튼 엄청 위험한 놈이에요. 소문만 무성한 놈이긴한데, 그놈을 보고 살아서 돌아온 놈이 없다는, 뭐 클리셰 덩어리 마물이죠.”
『...』
“근데 꼭 가야하는 거에요?”
문득 박석훈이 물었다.
“가야죠. 그래야 뭐가 됐든 될 테니까.”
박율이 답했다.
이유라 함은 단탈리온의 전언, 굳이 따지자면 그것뿐이었다.
가장 무거우며 가벼운 이유였다.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박율이라는 남자가 과거로 돌아간 이유, 그리도 되돌아온 이유, 그 모든 것의 실마리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가야만 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한명련이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박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뭐요?”
“들으신대로.”
“저희 놀러 가는 거 아니고 마계로 가는 거에요. 위험할 거에요.”
“상관없습니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어차피 저주받은 숲의 지리를 아는 사람은 저 밖에 없지 않습니까?”
“...”
“그럼 저도 갈게요.”
박석훈이 뻐근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온몸이 결린 듯 조금은 불편해보였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율은 인상을 팍 지은 채 그를 보았다.
“...그럼 여기는 누가 지켜요? 서희 씨도 간다 그러고 한명련 씨까지 가는 마당에 석훈 씨까지 가면.”
“강진호도 율 씨가 물리쳤고, 새로운 캠프니까 악마들이 찾아올 일도 희박하고...”
“근데요?”
“아니, 다 가는데 나만...”
“다 가니까 석훈 씨까지 가면 안되는 거죠. 강진호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지라도 다른 악마들은 계속 움직일 거에요. 여차하면 사람들도 대피시켜야 할텐데.”
“...”
호기롭게 일어난 박석훈은 시무룩 침대에 다시 걸터앉았다.
“빨리 돌아올게요. 그리고 놀러 가는 거 아니고 마계로 가는거에요. 얼마나 위험한데.”
* *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수구 속에서 불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첨벙!
바닥에 웅덩이진 물이 사방으로 튄다.
강진호는 벽에 짚은 손을 이정표 삼아 힘겹게 움직였다.
[이게 누구야?]
저 멀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강진호는 소리를 무시했다.
그저 걸었다.
[내 말 안 들리냐?]
터벅.
터벅.
첨벙.
터벅.
[거기.]
좁은 하수구에 짙은 살기가 안개처럼 끼었다.
하지만 직감일뿐 볼 수는 없었다.
[뒤지기 싫으면 멈춰.]
터벅.
첨벙.
[...안 들리면 죽어야지.]
벽에 부딪히고 부딪히며 공명하는 소리는 그 행방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짙은 살기가 다가온다.
방향조차 알 수 없다.
허나 강진호는 그때까지도 그저 걸어갈 뿐이었다.
[뒤져라!!!]
턱!
짙은 살기가 강진호의 목전까지 도달한 순간, 강진호는 손을 길게 뻗었다.
역시나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의 손에는 뭉툭하며 단단한 무언가가 잡혀있었다.
[커허억...!!!]
“...잡았다.”
강진호가 말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무언가는 발버둥을 쳤다.
손을 휘젓고 발을 내뻗으며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강진호는 더욱 강력하게 목을 쥐었다.
[사...살려...!!!]
강진호는 손에 쥔 무언가를 코 앞까지 당겼다.
암흑 속에서 뜨뜨미지근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아나투는 어디 있지?”
[몰...커헉...!!!]
“두 번 묻지 않는다.”
강진호는 점점 더 강하게 목을 죄었다.
발버둥은 더욱 거세졌다.
꽈악!
[1...14번 출구...!!!]
강진호는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커허억...!!! 허억...!!!]
그에게서 빠져나온 악마는 토사물을 뿜어냈다.
그리고 참아왔던 산소를 들이켰다.
“안내해라.”
[이 개새끼가...]
악마는 이를 빠득 갈더니 재빨리 일어나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살기를 숨겼다.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흘깃흘깃 살기를 흘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감히 내 영역에서 이딴 짓을 해? 방금 너는 유일하게 나를 죽일 기회를 놓쳤어.]
역시나 소리가 사방으로 튀고 공명하는 탓에 소리의 진원지를 어림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강진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탕!
어디선가 공기를 꿰뚫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쉬익!
그리고 그것은 가까스로 강진호를 비껴 지나갔다.
연달아 날아오는 마기 어린 구체.
강진호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공격들을 피하며 소리를 따라 악마를 쫓았다.
흘깃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타악!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
악마가 낸 것은 아니었다.
하수구 어디선가 울리는 소리였다.
악마는 갑자기 사라진 강진호를 찾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미 그곳엔 강진호가 서 있었다.
턱!
[커헉...!]
“안내해라. 죽기 싫으면.”
역시나 악마는 발버둥을 치지만, 강진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시 묻지 않는다.”
강진호의 손을 따라 핏줄이 돋아났다.
[사...살려...!!!]
함께 악마의 몸뚱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펑!!!
풍선이라도 터진 듯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에 가득 쥐고 있던 감각이 사라졌다.
얼굴에 비산한 액체에서 피 비린내가 풍긴다.
강진호는 가볍게 손으로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털어내고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보고 있는 놈, 안내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