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긴 채 서희는 천장을 보았다.
온몸이 침대에 스며드는 것만 같은 편안함에 서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침대는 대부분 노약자들이나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양보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이번에는 부상을 입은 탓에 누워있게 되었다.
뭐, 이것도 나름 나쁘진 않은 듯했다.
마르가리타라는 여자에게 치료를 받기는 했다만, 아직 찌뿌둥한 건 여전했다.
서희는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몸을 뒤척였다.
“흠...”
그러다 새하얀 천장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벌어졌던 이들이 파노라마 마냥 그려지기 시작했다.
강진호에게 캠프를 습격당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들이 전부.
지나치는 순간들 사이로 악마가 달려들던 때 날아온 작은 망치와 그 너머에서 자신을 보며 웃는 박율이 떠올랐다.
괜히 멋있어 보였다고나 할까.
“뭐래...”
서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지웠다.
그나저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서희는 턱을 치켜들어 반대편의 박석훈을 보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푹신한 침대에서 휴식을 즐기던 박석훈은 고개를 들어 서희를 보았다.
“예?”
“박율 말이야.”
“아.”
박석훈은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속뜻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서희는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루만에 나타나서는 갑자기 시간여행을 하고 왔다니.”
차라리 그것으로 끝이라면 꿈이라도 꿨겠거니 하고 뒤통수나 때려주고 말 일이지만.
“그럼 내가 본 건 뭐고, 그 힘은 또 대체 뭐야.”
서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찌뿌둥한 몸을 뒤집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 짱구를 굴려봐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가 알던 박율은 뭣도 없으면서 깡 하나만 가지고 악마들을 피해 살아남은 신기한 녀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략이라던가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던가 하는 부수적인 것들은 빼고 말이다.
서희는 몸을 다시 뒤집어 박석훈을 보았다.
“...왜요?”
“혹시 박율, 그놈 진짜 악마랑 손잡은 거 아니야?”
“에이, 아까 아닌 거 판명 났잖아요.”
“그냥 아저씨가 아니라고 한 거뿐이잖아.”
“한명련 씨 이야기가 틀린 적 있어요?”
“틀릴 수도 있지! 아니면 박율으로 위장한 악마라던가?”
“그러는 서희 씨도 아까는 율 씨 맞다면서요. 그리고 겉모습을 바꾸는 건 가능해도 그렇게 세밀한 기억을 하지는 못한다는 거 알잖아요. 율 씨 덕에 살아남은 것도 사실이고.”
“그건 그런데... 이상하잖아! 그럼 도대체 그 힘은 뭐야!? 하루 만에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다고?”
박석훈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의 휴식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어깨도 함께 들썩였다.
“조금 이상하긴 한데, 율 씨가 아닌 거 같지는 않아요.”
“넌 애가 왜 그렇게 단순하냐?”
“10년을 넘게 같이 사선을 굴렀는데, 설마 모르겠어요?”
박석훈은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서희는 혀를 끌끌차며 그를 보더니 이내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희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고, 문 앞에는 박율과 마르가리타, 배중탁,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힉...!!!”
서희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마냥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콰당!
“악! 아아...”
“뭐하세요...?”
“...크흠.”
서희는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세 얼굴들을 보며 얼굴을 붉히더니 목을 긁었다.
그리곤 다시 침대에 누으려 몸을 일으키지만, 찌릿한 통증에 신음하며 다시 주저앉았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박율은 혀를 끌끌차며 그녀를 들어 침대에 눕혔다.
“오랜만에 침대에 누으니까 막 신나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구만. 뭘.”
“닥쳐.”
“부끄러워 하기는.”
“너 이씨...”
서희는 버럭 화를 내려다가 제 꼴이 우스워 고개를 돌렸다.
“왜 왔어?”
“아픈 사람 보러 온다는 데 이유가 필요해요?”
“네가 그럴 사람이냐?”
“내가 그정도도 안할 사람이에요?”
“...”
“근데 서희 씨 능력이 필요할 거 같긴해요. 단탈리온을 만나야 할 거 같거든요.”
“너 이씨... 그럴 줄 알았어.”
서희는 으르렁 화를 내며 박율을 보았다.
그는 능청스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희는 당장에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 인상을 구겼지만, 이내 자신이 갑(甲)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거만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마음같아서는 다리도 꼬고 팔짱도 끼면서 거만 중에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싶었지만, 그건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싫다면?”
“그건 예정에 없었는데.”
박율은 역시나 능청스런 얼굴로 받아쳤다.
마치 결국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돋보이는 것만 같았다.
서희는 그런 그의 모습이 못내 짜증이 났다.
“...난 아직 너 못 믿어.”
“나름대로 검증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 같은데?”
“...”
서희는 삐딱하게 고개를 비틀어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어련하겠냐는 듯 표정을 우스꽝스레 지었다.
“야!”
“뭐 어떻게 하면 믿으실 건데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봐봐,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도끼눈을 한 채 박율을 보던 서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오케이, 대신 조건이 있어.”
“이건 또 예상 못 한 전갠데. 뭔데요?”
“나도 데려가.”
“에...?”
박율은 그녀의 말에 잠시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난 네가 진짜 박율인지 알아야 할 거 같으니까.”
“따라오면 그걸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내가 박율이 아니었으면 벌써 전부 죽였지 않았을까요?”
“네가 단탈리온을 만나서 이상한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을 내뱉던 서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한껏 경계하는 자세로 박율에게서 물러났다.
“설마... 너 지금까지 단탈리온을 만나려고 연기한 거지?”
“워메... 이야기가 이젠 거기까지 가요?”
“이야기가 딱 맞아 떨어지네! 일부로 단탈리온이 있는 마계로 갈 방법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거고 박율인척 연기를 한 거잖아!”
“상상력 한 번 기똥차네.”
박율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제가 악마랑 손을 잡았다쳐요? 그리고 그게 목적이라면 악마한테 부탁을 해서 그쪽 마계로 갔겠지. 귀찮게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그건...”
“에휴...”
박율은 끝까지 신뢰를 주지 못하는 서희를 잠시 보더니 이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해는 해요. 개 같은 세상이니까... 나 같아도 믿기 힘들 거 같긴 해요.”
그의 입에서 흩어지는 한숨이 허공에 날렸다.
장난기 넘치던 그의 눈에서 사뭇 씁쓸함이 느껴졌다.
서희는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다.
창밖은 흑으로 가득한 세상이었고, 하늘엔 심연이, 지상엔 악마들이 있는 곳이었다.
초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바닥을 쓸어도 차가움은 사라지지 않는 땅이었다.
두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너무나 검었다.
안광에 비친 빛조차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 검은자를 지나 흰자에 사람들이 비췄다.
하루라도 더 살아가기 위해 바닷가의 갯강구마냥 구석을 찾아 숨어들었던 바둥거리는 사람들이었다.
박율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근데 있잖아요.”
박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서희를 보았다.
한때 누구보다 강했지만, 누구보다 약했던 여자가 자신을 경계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박율은 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서희 씨는 나를 알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악마를 싫어했고,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던 그이의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사자가 되지 못해 일반인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던 남자의 말이었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고작 악마가 싫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그 이유로 죽음의 향기를 코끝에 심어두고 살아가는 남자였다.
서희는 입을 꾹 닫은 채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저 얼굴에 대고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뭐, 그냥 차라리 나를 욕해요. 아니면 멸시를 하던가, 그걸로도 부족하면 때려요. 죽을 만큼 때려요.”
장난스레 내뱉는 그의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단단했다.
땅 깊숙이 뿌리를 박고 하늘을 아뢰며 큰 나무와 같은 단단함이었다.
하여 흔들림은 없었다.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제가 악마랑 손을 잡았다는 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말,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장난기가 사라졌다.
가슴에 무언가 딱딱한 종양이라도 틀어박힌 듯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함께 서희의 목젖이 일렁거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멈추었다.
그가 만들어낸 정적은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침묵을 떨어뜨렸다.
허나 그 침묵은 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밝았다.
“...그건 나라는 사람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침묵을 깨는 그 목소리마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박율은 아주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손을 내밀었다.
서희는 말 없이 그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한 번만 도와주실래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서 그들이 발을 밟고 선 캠프는 조용했다.
하지만 소리 없는 바람이 그 정적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서희는 저도 모르게 그 손 위에 손을 얹었다.
박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가끔 쓸데없이 진지하게 저래요.”
사뭇 진지해진 박율을 보던 박석훈은 흘깃 고개를 돌려 마르가리타에게 속삭였다.
* * *
서희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너무 오랜만에 앉아보는 자리였다.
사실 바알에게 패배한 이후, 아니 강진호의 배신 이후로 이 능력을 쓸 일이 없었다.
능력을 쓸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 전에 도망치는 것이 더 빨랐으니까.
“후...”
눈앞에 벽을 두고서 서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에는 캔버스를 두고 그림을 그렸겠지만, 캔버스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리고 혹여 캔버스를 구한다 한들 그건 그저 장작이나 하나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었다.
“자, 이거 써요.”
옆에서 박율이 기다란 펜을 하나 건넸다.
서희는 조용히 펜을 집어 들었다.
“...알고 있겠지만,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아무런 방해도 해서는 안 돼. 작은 변화라도 결국은 큰 줄기에 영향을 끼칠테니까.”
“당연하죠.”
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펜을 높이 쥐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검게 물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암흑.
마치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서희는 암흑 속을 유영했다.
시작이 어디인지, 그리고 끝이 어디인지도 모호한 암흑이었다.
서희는 그저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낙엽마냥 흐느적거렸다.
그러다 저 멀리 보이는 아주 희미한 빛.
서희는 펜을 쥔 손을 들어 희미한 빛을 향해 뻗었다.
빛은 움직인다.
때로는 위로, 때로는 아래로, 그리고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디론가.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양이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잡아서는 안 된다.
그저 천천히 빛을 쫓아가되 빛보다 빨리 움직여도, 혹 너무 느려 빛을 놓쳐서도 안된다.
서희는 모든 감각을 닫고 오로지 빛을 쫓는 감각에 집중했다.
선이 그어지고, 중첩된 선들이 이내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서희조차 알지 못했다.
허나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강물이 흐르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