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이제는 믿겠어요?”
“...”
하지만 여전히 서희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누가 됐더라도 믿기 힘든 상황인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진짜 박율로 위장한 악마라면 왜 석훈 씨랑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두겠어요? 벌써 죽이고도 남았지.”
“나머지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쫓아와서 그 사람들마저 죽이려하는 건 아니고?”
“정말...”
믿을 생각을 도통 않는구나.
박율은 이마를 탁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하면 저 사람이 말을 믿을까.
박율은 ‘박율’이라는 남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을 정보를 머리 속으로 굴렸다.
지금까지 내뱉은 것들도 만만치는 않은데 말이다.
“아, 그래!”
“...?”
“제2 공영 주차장.”
“...그게 뭐.”
그 말에 서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박율을 보았다.
아닌 척 표정을 숨기려하지만, 딱히 숨겨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2 공영 주차장, 다른 말로는 개미굴.
여러 군데로 나뉜 캠프들의 통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만든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동수단이자 허브로 수십 개의 포탈을 만들어 도주로 혹은 지원창구로 이용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치를 아는 이는 박율을 비롯한 악마대항군들의 핵심 전력들 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이야 만들어진 포탈을 타고 이동할 뿐이니 말이다.
“다른 말로는 개미굴. 모든 캠프들이 연결되어 있는 허브죠.”
“그걸 어떻게...”
“말했잖아요. 내가 박율이라니까.”
“...”
박율의 말을 들은 서희 표정에서 사뭇 살기가 사라졌다.
이정도까지 했으면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한 듯 했다.
그래도 아직 불신이 팽배한 것은 여전했다.
아마 머릿속으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 이정도까지 했으면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만약 가짜였다면 벌써 거기를 습격해서 다 죽였겠지!”
“...그래도 혹시 남아있을...”
“저 아줌마가 진짜.”
“아줌마...?”
저 발작 버튼은 언제나 통하는구나.
“...그러니까 내 말을 좀 믿어달라고요. 이 정도면 됐잖아. 뭘 더 바래요.”
[도대체 뭐 어쩌라는 것이더냐?]
옆에서 잠자코 박율과 서희의 대화를 듣던 데판은 신물이 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 인정하면 지는 거 같거든. 그냥 그렇다고 해줘요.”
[흠.]
박율은 그래도 어느 정도 경계가 풀린 것처럼 보이자 선뜻 한걸음 걸어나왔다.
“그냥 지금 안 믿어줘도 되니까 우리도 그만 대피합시다. 괜히 더 있다가 악마들 몰려와요.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이렇게 난리를 쳤으니 악마들이 찾아오는 건 당연지사였다.
안 그래도 사방에서 마기들이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박율 일행도 먼저 도망친 사람들을 따라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
서희는 박율의 말에 도끼눈을 한 채 쳐다보았다.
“안 가요?”
“혹시 쫓아와서 전부 죽이려는...”
“...그만해요. 서희 씨.”
서희의 품에서 박석훈은 한숨을 팍 뱉으며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답답했나보다.
“저 정도면 율 씨 맞아요. 그리고 10년을 넘게 봐왔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율 씨 맞아요.”
잘한다!
마음 같아선 진짜 기절이라도 시키고 대피를 할까 싶었던 박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박석훈의 말에 서희는 알겠다며 착잡한 한숨을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명은 나중에 해줄 테니까 얼른 움직입시다. 마기가 접근하는 게 느껴져요.”
대충 느껴지는 숫자만 열 구가 넘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어지간히 성가신 일이 벌어질 듯 싶었다.
“...일단 가자.”
서희는 쓰러져있던 박석훈의 팔을 어깨에 동여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 역시 강진호와의 전투 이후 부상을 당한 건지 몸 상태가 그리 온전해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서희는 박석훈을 부축하며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넘어졌다.
콰당탕!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그들에게로 갔다.
“이리줘요. 내가 업을게요.”
하지만 서희는 여전히도 도끼눈을 한 채 그에게 박석훈을 넘기지 않았다.
“...”
이놈의 고집, 정말.
박율은 고개를 들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누나, 석훈 씨 좀 부탁할게요.”
『알겠어.』
구석에 숨어있던 두 아이를 데려온 마르가리타는 그런 박율을 흘깃 보더니 피식 웃으며 박석훈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박율은 한숨을 팍 쉬며 그대로 서희를 들쳐업었다.
“뭐하는 짓이야...!”
서희는 박율에게 매달린 채 발버둥을 쳤다.
“가만히 좀 있어요. 뭐가 이렇게 산만해.”
“내려놔!!!”
“악마들 어그로 다 끌겠네. 조용히 좀 해요.”
박율은 사방으로 몸을 흔드는 서희를 꿋꿋하게 들쳐업은 채 움직였다.
“내가 알아서 갈 거야!”
“제대로 걷지도 못 하더만.”
“알아서 해!”
아득바득 발버둥을 치던 서희는 결국 박율의 손에서 떨어졌다.
콰당!
박율은 지친다는 얼굴로 넘어진 서희를 일으켜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 예, 뭐. 그럼 알아서 하시던가.”
“못할 줄 알고...”
서희는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이내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뒤에서 박율은 속 시원하다는 듯 비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는 얼른 움직이라는 듯 툭툭 발로 땅을 굴렀다.
하지만 서희는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
“업어드릴까요?”
박율은 서희가 대답이 없자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다시 들쳐업었다.
이번에도 발버둥은 쳤지만, 아까처럼 격하게 발버둥을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치 물에 젖은 미역 마냥 흐느적대며 박율에게 업혀있었다.
“다시 가시죠.”
박율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마르가리타에게 업혀있던 박석훈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에요?”
박율은 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말하자면 긴데,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해드릴게요. 시간은 많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뭐, 대충 설명을 하자면 긴 여행을 갔다 왔어요.”
“긴 여행?”
박율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분은...?”
박석훈은 자신을 업은 마르가리타를 흘깃 보았다.
“여행에서 만난 친구죠. 뒤에서 따라오는 고양이도 그렇고. 아, 애들은 여기서 만난거에요.”
“으흠... 저는 사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되거든요. 저한텐 기껏해야 하루 정도 율 씨를 못본 셈이라.”
“그럴 수밖에 없죠.”
하루와 몇 달간의 간극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이 커다랗기 마련이다.
게다가 박율은 평범한 몇 달도 아닌, 수차례의 죽음을 겪고 많은 일을 겪었으니.
박석훈은 꿈이라도 꾼 게 아니냐 묻고 싶었지만, 일전에 보았던 그 힘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믿기는 힘들지만, 그가 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박석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여기엔 없는 사람들도 만났고.”
“그럼 거기에도 제가 있어요?”
“그럼요. 석훈 씨랑 서희 씨도 만났죠.”
“거긴 어때요?”
박율은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은 희생으로 만든 평화.
목숨까지 희생해가며 지켜낸 세계였다.
박석훈은 그것으로 대답이 됐는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여기로는 왜 다시 돌아온 거에요? 거기서 쭉 있으면 되잖아요. 거긴 여기처럼 지옥은 아닐 텐데.”
“그러게요.”
박율도 왜 이곳에 떨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사실 이 세계가 여전히 남아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보통 시간을 되돌리면 되돌리기 전 세계는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오고 싶어서 왔다기보단 누가 우리를 여기로 보내서 돌아온 거거든요. 이유야 있지 않을까요?”
“으흠...”
그러다 흠칫.
박율은 자리에 멈춰섰다.
그를 따라 마르가리타와 데판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박석훈이 물었다.
박율은 들쳐매고 있던 서희를 데판에게 건넸다.
데판은 조용히 꼬리를 길게 말아 서희를 감쌌다.
“뭐하는 짓이야!”
“잠시만 맡길게요.”
서희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박율은 대답 없이 망치를 들었다.
“조금 지체됐나봐요.”
마기가 다가오고 있다.
한둘이야 간단히 제압하고 지나가겠지만, 느껴지는 마기의 숫자는 그 정도로 적지 않았다.
최소 열 마리, 아니 그보다 훨 많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마 방금 벌인 소동으로 근방에 있던 대부분의 악마들이 몰려오고 있는 듯했다.
『온다.』
마르가리타가 입을 열기 무섭게 무너진 건물 너머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다란 뿔이 돋보이는 악마부터 짐승의 외형을 한 악마들까지.
사이사이로 마수들이 보이고, 마인들 역시 보였다.
대충 보이는 숫자만 서른이 넘었다.
그 뒤로 숨어있는 숫자는 더 많은 듯했다.
“...!!!”
그들을 본 박석훈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릿수만 못해도 수십 구는 넘을 듯했다.
하지만 박율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신 언뜻언뜻 보이는 귀찮음은 덤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양 허리를 쭉쭉 늘리고 굽히며 마른 뼈소리를 냈다.
“귀찮게됐네.”
이래서 빨리 움직이려고 한 건데.
[척후]
다행히 대충 보이는 악마들 외에 더 많은 악마들이 보이진 않았다.
일단은 가까이에서 마기가 느껴지는 악마들이 전부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전투를 해서는 안 된다.
악마들은 혈투를 갈망한다.
이곳에서 괜히 시간을 끌었다간 더 많은 악마들이 몰려들 터.
빠르게 끝낸다.
“먼저 움직이고 있어요. 뒤따라 갈 테니까.”
“네!?”
박석훈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아마 포탈은 못 쓸 거에요. 그쪽에 악마들이 워낙 많아서. 오거리 쪽으로 들어가서 백화점 뒷문 쪽으로 돌아가요. 거기는 아무도 없거든. 돌아서 갑시다.”
박율은 그 순간에도 척후로 활로를 찾으며 말했다.
“율 씨는...!?”
“말했잖아요. 뒤 따라간다고.”
[신속]
박율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이내 마르가리타의 옆 달려드는 악마의 몸을 관통하고 나타났다.
팡!
“석훈 씨가 길을 아니까 먼저 가고 있어요.”
마르가리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따라오는 아이들을 보았다.
『얼른 가자, 얘들아.』
데판 역시 한껏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안돼...!!!”
서희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다.
찰나의 순간, 데판의 옆으로 늑대를 닮은 마수가 하나 뛰어들던 참이었다.
박율은 소리를 쫓아 흘깃 고개를 돌리더니, 망치를 모로 잡아 그대로 던졌다.
늑대를 닮은 마수가 데판의 꼬리에 말려있는 서희를 물어뜯으려는 순간.
펑!!!
날아든 망치가 악마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