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박율은 불안한 발걸음으로 말 한마디 없이 빠르게 걸었고, 고양이의 모습을 한 데판 역시 말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두 아이를 업은 채 초토화된 인천을 둘러보았다.
이것이 인간이 패배한 세계의 역사였다.
모든 것이 황폐했고, 검게 물들었다.
살아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드문드문 생명의 불씨가 보였지만, 그것마저 악마들에 의해 유린당할 뿐이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굉음은 아마 악마들의 것인 듯했다.
끊임없이 자웅을 겨루는 악마들의 소리.
말 그대로 끔찍했다.
그 순간 빠르게 앞서가는 박율의 옆으로 소를 닮은 커다랑 덩치의 악마가 달려들었다.
『조심...!』
마르가리타는 반사적으로 소리쳤지만, 박율은 달려오는 악마를 보지도 않은 채 손에 쥔 망치를 던져 악마를 처리했다.
얼마나 세게 던졌던 지 악마의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
마르가리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분노에 잠식된 모습은 말이다.
“무서워...”
마르가리타의 등으로 아이들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참상을 피해 그녀의 등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흘깃 아이들을 보더니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업힐 수 있도록 자세를 정돈했다.
『우리가 있으니까 괜찮아.』
마르가리타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혹시 이름이 뭐야?』
그녀의 질문에도 아이들은 답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공포에 절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지켜줄게.』
마르가리타는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에 아이들의 떨림이 조금은 멎은 듯했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이수화.”
한참을 입을 꾹 닫고 공포에 떨던 두 아이 중 동생이 말했다.
『수화구나. 그럼 오빠는 이름이 뭐야?』
“진화...”
『이름이 이쁘네.』
“엄마가 지어줬어요.”
진화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구나.』
“근데 엄마가...”
수화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이내 아이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마르가리타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수화의 울음소리가 만들어내는 진동이 등허리를 타고 심장을 두드렸다.
“흐읍... 흡...”
진화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울음을 애써 참는 듯 불규칙적인 호흡소리가 들렸다.
『진화는 씩씩하네. 울지도 않고.』
“...엄마가 울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
“앞으로는 내가 수화랑 아빠 지켜야 한다고...”
마르가리타는 터지려는 안타까움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렇구나.』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뱉었다.
“아빠 보고싶어...”
수화가 말했다.
물기에 젖은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처량해지는 기분이었다.
“울지마. 아빠 안 죽었을 거야.”
진화가 답했다.
아이들의 입에서 이렇게 무심하게 죽음이라는 것이 흘러나온다니.
『어쩌다 이렇게...』
마르가리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목소리.
마치 울음을 참는 듯 서글픈 목소리였다.
『신이시여...』
허공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아마도 신, 그것도 아니라면 그에 준하는 존재.
『도대체 무어를 바라시는 겁니까. 무엇을 바라시기에 이런...』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 역시 신이라는 존재에 의구심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신.
그는 도대체 무엇일까.
선과 악, 그 사이에 그의 의지는 무엇일까.
단탈리온이 그녀에게 건넸던 그 질문이 떠올랐다.
수백 년을 넘게 지켜본 그의 존재는 그저 구도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마치 해답을 바라지 않는 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아빠가 신은 없다고 그랬어요.”
진화가 입을 열었다.
『응...?』
“신은 인간을 버렸다고. 아빠가 매번 말했어요.”
『아니야. 신은...』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이곳의 신은 인간을 버렸어요.”
묵묵히 앞서가던 박율이 말했다.
마르가리타는 흘깃 그를 보았다.
“더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없고,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죽었어요.”
『...』
아니라고 하고싶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그녀가 본 이 모든 참상을 대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은 완전히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박율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과거로 보냈던 거지.”
그의 무거운 한마디가 땅바닥으로 내려앉는다.
* * *
“전부 대피시켜.”
서희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박석훈은 대답 없이 곧바로 안쪽으로 향했다.
터벅.
저 멀리에서 강진호가 걸어오고 있다.
서희는 권능을 개방시켰다.
그녀의 몸을 뒤덮는 흑의 무언가.
이내 그녀는 야타가 되었다.
그리고 폐허를 빠져나간다.
정면에서 걸어오던 강진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
“당장 꺼져.”
서희는 일갈했다.
허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대신 손에 마기를 집중시켜 검붉은 검을 만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니가 여기를 찾아와.”
“쓸데없는 저항은 힘만 빠질 뿐이다.”
“좆까.”
강진호는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서희 역시 그를 따라 발을 굴렀다.
쾅!!!
두 강대한 힘이 부딪히며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지진이라도 인 듯 땅이 흔들렸다.
“이러면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닥쳐, 이 위선자 새끼야.”
쾅!!!
강진호의 발이 땅과 닿음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서희의 뒤에서 나타나는 그의 신형.
쾅!!!
강진호의 세 가지 권능 중 하나.
첫 번째, 순보였다.
온몸의 어느 곳이라도 땅과 닿아있다면 가시거리 내에 어디든 짧은 거리를 순간이동 할 수 있는 능력.
여태껏 어느 사자와 악마들도 순보를 쫓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서희는 채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격에 땅에 처박혔다.
강진호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쥐고 있던 검을 내려찍는다.
콰직!!!
하지만 서희는 반사적으로 땅을 박차고 검을 피했다.
“하아...”
“...”
강진호는 말 한마디 없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쾅!!!
말 그대로 쉴 틈 없는 일격들의 연속이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방심을 하면 치명적인 공격으로 이어진다.
한때 한국의 10대 영웅으로 불리었던 그녀였지만, 그녀로써도 강지호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쓸데없는 발악은 객기다.”
캉!!!
그의 검이 허공을 베어가른다.
캉!!!
마치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여울을 따라 떨어진 꽃잎이 완류를 따라 유영하듯.
부드러운 춤사위처럼 그의 검은 움직였다.
캉!!!
그러다 어느 순간 격류하는 그의 검.
강진호의 두 번째 권능, 격랑(激浪).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격이 쌓이고, 부드러운 완류를 따라 흘러가다 그 끝에 들어서 급류하는 파도처럼 한 번에 몰아친다.
쾅!!!
서희는 날아드는 검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수차례 튕기고 떨어지는 그녀의 몸뚱이는 폐허가 된 건물을 부수고, 겨우 멈춰서면 부서진 건물의 파편이 쏟아진다.
콰과광!!!
“커헉...!!!”
뿌연 흙먼지가 일고, 서희는 파편 속에서 피를 토했다.
터벅.
강진호는 여전히도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왔다.
서희는 어떻게든 그에게 반격을 할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몸을 짓누르는 파편들에 움직이지 못했다.
“왜 그렇게 발악을 하는 거지? 신은 우리를 버렸어. 이제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닥쳐...! 네가 배신만 안 했어도...!”
“그러면 무언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개죽음을 당하진 않았겠지!”
“그들에게 안식을 준 거다. 악마들에게 고통스럽게 죽을 바에 내 손으로 고통 없이 죽이는 게...”
“염병을 하네. 누가 너보고 죽여달라든? 왜 애꿎은 사람을 죽이고 지랄인건데?”
서희는 건물 파편에 깔린 채 중지를 치켜들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높이 올라간 강진호의 검에서 칠흑이 반사되어 비췄다.
그리고 추락하는 검 아래로 서희의 한 어린 눈이 반사되었다.
그의 검이 서희의 목을 꿰뚫으려는 순간.
쾅!!!
반대편에서 날아든 철퇴가 그를 후려친다.
콰과광!!!
“괜찮아요!?”
철퇴의 주인은 박석훈이었다.
그는 선홍빛 갑주를 입은 채 달려왔다.
“다 대피시켰어!?”
“네...! 일단 제가 꺼내드릴게요...!”
빠르게 달려온 박석훈은 파편에 깔린 그녀를 구하려 파편들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온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꺼내기도 전에 저 멀리서 인기척이 달려들었다.
박석훈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순보]
쾅!!!
역시나 움직임에 반응도 채 하지 못하고 박석훈은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크윽...!”
“너희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럼 가만히 내버려 둬...!”
박석훈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함께 전장을 누볐던 만큼 빨리 안식을 찾아주지.”
또 다시 달려드는 강진호.
살기가 깃든 검이 박석훈의 목을 향해 치닫는다.
박석훈은 허리를 비틀어 검을 피했다.
그리고는 철퇴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의 철퇴는 허공에 떨어질 뿐이었다.
오직 방어에만 치중된 그의 힘은 강진호에게 닿을 수 없었다.
차악!
검이 박석훈의 허리를 베어가른다.
검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그의 갑주는 진한 선홍빛으로 달아올랐다.
“큭...!”
박석훈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지만, 역시나 그의 공격은 강진호에게 닿지 못한다.
마치 떨어지는 빗물에 땅이 젖듯, 박석훈의 몸에 작은 생채기들이 하나 둘 벌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강진호의 검에서 느껴지는 격은 점차 차올랐다.
[격랑]
격이 최고치까지 차오르고, 강진호는 검을 높이 들었다.
박석훈은 그때까지도 철퇴를 휘두르고 공격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강진호에게 닿지 못했다.
“죽어라.”
그의 검이 박석훈에게로 쇄도했다.
그 격을 가늠할 수 없다.
박석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의 눈동자에 비친 첨예한 검이, 격류가 되어 그의 목으로 치달았다.
반응을 할 수 조차 없는 속도였다.
박석훈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악!!!
흉곽에서 단전까지 벌어지는 검격.
“커헉...!!!”
강진호의 일격에 박석훈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은 고통을 토해내고 있었다.
“끝이다.”
평범한 이들 같았으면 한방에 죽었을 일격이었지만, 괜히 신의 방패라 불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일격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목이 떨어지면 죽기 마련이다.
강진호는 호흡을 고르며 고통에 신음을 토해내는 박석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멈춰!!! 이 개새끼야!!!”
저 멀리에서 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음은 너다. 같이 보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