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아유, 이 멍청이들.』
아이를 달래던 마르가리타는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던 박율과 데판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박율은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힐끔 옆에 있던 데판을 보았다.
“...그쪽이 하라는 대로 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걸 악마한테 물어보는 인간 놈이...]
“됐어요.”
[저 이씨...]
『애를 다뤄봤어야 알지.』
마르가리타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보았다.
『불쌍한 것들...』
아이들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 연민이 흘러나왔다.
아직 10살도 채 안 된 것 같은 아이들이 이런 끔찍한 참상을 봐야 한다는 게 애석할 뿐이었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마르가리타의 손길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한 걸음 박율이 다가가려 하자 아이들은 움찔 눈에 힘을 주며 경계했다.
아직 그에게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나보다.
괜히 아이들의 공포심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박율은 다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물어봐줘요. 이 시간에 사람들이 움직일 리가 없거든요.”
그가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에서 이 시간에서의 이동은 자살이나 다름 없었다.
만약 이동을 하더라도 눈이 어두운 보통 새벽에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악마들의 감각이 매섭기는 하다만, 그들도 숙면을 취해야했고, 무엇보다 시야가 어두운 만큼 악마들이 습격했을 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여 캠프를 옮기던, 식량을 구하던 그것은 새벽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지금은 한낮이었다.
하늘을 가린 심연과 붉은 먹구름에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시간에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리가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박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니?』
아이들이 겨우 경계심을 풀자 마르가리타는 간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두 아이는 울컥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동생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마르가리타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래, 그래. 많이 힘들었지?』
“그게...”
그리고 겨우 진정을 되찾자 아이들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의 말을 이랬다.
원래 아이들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지금은 싸늘하게 식은 어른들은 근방의 캠프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악마들을 피해 숨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나름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얼마 전 등장한 낯선 남자.
말 한마디 없이 나타난 그 남자는 무차별적으로 근방의 인간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이 그저 모든 이들을 죽였다.
그의 등장으로 인천 부근의 수많은 캠프들이 궤멸에 처하고, 바로 어제 그가 캠프 가까이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하여 아이들이 있던 캠프의 사람들은 그를 피해 캠프를 옮겨야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상황이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박율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졌다.
“...혼자서 그랬단 말이야?”
박율의 질문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 뭐 집히는 거라도 있어?』
“...애들아, 혹시 지금이 몇 년도인지는 알고 있어?”
아이들이 고개를 젓는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하루라도 더 살아가기 위해 발악하는 이들에게 날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박율은 대답을 예상하곤 발을 돌려 시체가 된 이들의 몸을 살폈다.
날짜의 효용성이 사라진 세상이라 한들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이들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게 미련이 됐든, 실낱같은 희망이 됐든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멀리 떨어져 있던 남자의 시체에서 시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자시계였다.
“...”
시계 속 날짜를 체크한 박율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어지는 그의 시선은 아이들을 향했다.
그 눈빛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씁쓸하고, 처절했다.
“너희들, 갈 곳은 있니?”
아이들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우리랑 같이 가자. 안전한 곳을 알아.”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제가 있었던 캠프로 갑시다. 지금은 거기가 제일 안전할 거에요.”
『무슨 일인데...?』
“가면서 설명해드릴게요. 아이들이 말한 남자랑 내가 생각한 놈이 동일하다면 얼른 움직여야 해요.”
박율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앞장 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판과 마르가리타를 비롯한 이들은 그를 따랐다.
박율은 한 마디 말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왜 그러는 건데?』
뒤에서 조용히 박율의 뒤를 쫓던 마르가리타가 물었다.
“...만약 제가 생각한 놈이 맞다면 얼른 움직여야해요.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모두 죽을 거에요.”
『도대체 누구길래...?』
“...강진호, 한때 인류최강이라 불리던 놈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악마편에 서서 인간들을 죽이고 다니고 있죠.”
『뭐...?』
아니, 사실상 그 남자 말고는 답이 없다.
조금 전에 보았던 시계.
날짜는 2030년 7월 20일.
박율이 이곳에서 죽은 다음 날이었다.
인간을 배신한 마인, 강진호에게 심장을 뚫린 그 다음날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사이에 이변이 있지 않은 한 악마를 제외하고, 아이들이 말한 대학살을 일으킬 사람은 강진호 말고는 없다.
“확실하진 않지만, 애들이 말한 그 남자는 저를 죽였던 그놈일 거에요.”
『뭐...!?』
“과거로 회귀하기 전, 나를 죽였던 그 새끼...”
언젠가 그가 말했었다.
‘인간은 졌어. 어차피 악마들에게 고통 받으며 죽게 될 거라면 내가 모든 이들을 고통 없이 죽여주겠어.’
어딘가 비틀어진 신념.
그것이 한때 인류최강이라 불리던 그의 정의였다.
모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 결과였다.
악마들에게 고통스럽게 죽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고통 없이 죽인다.
어찌 보면 이상적이었다.
어차피 희망도 꿈도 없는 세상, 빠른 죽음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대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결국에 궤변일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그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인류는 지금껏 저항했고, 여전히도 저항하고 있다.
그렇기에 얼른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모두가 죽는다.
박율은 입을 꾹 닫은 채 빠르게 길을 찾았다.
* * *
“너무 늦는데...”
다 부서진 폐허 속 그늘 진 어두운 구석, 혹여 악마들이 접근할까 감시 중이던 박석훈은 손톱을 잘근 씹었다.
벌써 박율 일행이 식량을 찾으러 나간 지 하루가 넘었다.
하지만 박율을 비롯한 일행들은 아직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적은 처음이었다.
매번 늦어도 아침에는 돌아왔었지만, 벌써 만 하루가 지난 상황.
이젠 최악의 경우의 수마저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터벅.
“들어가서 좀 쉬어.”
뒤에서 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석훈은 흘깃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아직 시간 좀 남았어요.”
“어제부터 내내 있었잖아. 이제 좀 쉬어.”
박석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에휴...”
서희는 혀를 끌끌차며 박석훈의 옆에 앉았다.
“걱정되냐?”
“안 된다면 거짓말이죠.”
“율이도 있잖아.”
“...”
“바퀴벌레가 죽는 거 봤냐? 총에 맞고, 칼에 찔려도 살아남는 놈이야. 또 어디 길 잃어서 헤매고 있겠지.”
“그렇겠죠...?”
박석훈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서희는 걱정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정적.
차가운 바람이 틈새를 타고 비명을 질렀다.
“야.”
서희는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 하나를 툭 차며 말했다.
“...넌 가능할 거라고 보냐?”
그녀의 질문에 박석훈은 굳게 닫은 입을 열려다 이내 다시 닫았다.
“...”
“솔직히 나도 이젠 지쳐.”
악마에 대항해 싸운지도 어언 10년.
아니 이젠 대항은 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하기만 했다.
처음 안드라스와 플라우로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까지만 해도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었던 그들이지만, 바알의 등장 이후 모든 전세가 비틀어졌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제와서 승리한다 한들 그것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역시나 박석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들어 뿌연 하늘을 보았다.
태양을 얼마나 오래 못 봤던 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낸들 아냐.”
“신이 아직 있다면...”
“우리를 버렸어.”
서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너무나 단호해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신은 인간을 버렸다.
더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없다.
“...이럴 때, 율씨가 있으면 뭐라고 했을까요.”
서희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또 염병 떤다고 하겠지. 청승맞게 굴지 말라고...”
“그렇겠죠?”
두 사람은 잠시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래도 이렇게 조용한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악마들로 가득 들어찬 세계, 빈틈 하나 없이 세계엔 악마들이 존재했다.
“만약에.”
“뭐?”
“만약에 모든 게 끝나면 뭘 먼저 하고 싶어요?”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요. 이런 대화 나눠본 게 언제인가 싶어서...”
“흠... 나는 사우나에 가서 좀 씻어보고 싶네.”
“목욕탕이요? 의왼데?”
“뭐가 의외라는 거야.”
“그렇잖아요. 서희 씨는 원래 엄청난 유명인이기도 했고, 그런 데는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아서.”
“맞아.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가보고 싶네. 예전에는 쓸데없는 겉멋만 잔뜩 들어서 그런 재밌는 것도 못 해봤잖아.”
“아하...”
“뜨거운 물에 목욕도 하고, 계란도 까먹고, 뭐 그런 것들?”
목욕.
아주 작지만,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뜨거운 물을 쓰는 것조차 말이다.
“너는?”
“저요?”
박석훈은 그녀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어요. 전부 잊고 그냥 하루종일 자고...”
그냥 쉬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서희는 공감의 헛웃음을 흘겼다.
“그것도 좋겠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 느껴지는 인기척.
서희는 흠칫 고개를 돌려 폐허 너머를 보았다.
“누구 온다.”
“돌아온 건가!?”
“쉿.”
서희는 반사적으로 박석훈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 너머에 보이는 누군가.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천천히 다가오는 무언가.
서희는 숨소리도 죽인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점차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며 서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요?”
박석훈은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악마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들도 있고, 악마들의 편에 선 인간들 역시 적지 않으니 말이다.
방심은 곧 죽음이다.
그리고 그가 시야에 완전히 들어오는 순간.
박석훈의 얼굴마저 일그러졌다.
강진호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