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공백 속으로 사라진 박율을 뒤로 단탈리온은 옆에 있던 마르가리타를 보았다.
어디론가 사라진 박율을 보던 그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의 존재가 일렁거리는 공백 너머로 사라졌다.
흔적마저 없이.
『율아!!!』
이미 사라진 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르가리타는 이를 빠득 갈며 단탈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려 일갈했다.
『율이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
[그대에게 하나 묻겠네. 그대는 신을 믿는가?]
『뭐라는 거야! 율이를...!』
[선과 악, 신은 어느 쪽이라 생각하지?]
『뭐...?』
[그대 역시 적절한 답을 찾길 바라네.]
그리고 단탈리온은 마르가리타의 이마를 툭 하고 쳤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손 틈새로 불어대는 바람마냥 속절없이 그대로 몸을 늬었다.
『어...어...!?』
그녀 역시 공백 속으로 사라진다.
수면 위에 떨어진 돌멩이마냥 일렁거리는 공백 속으로 사라졌다.
마르가리타마저 사라지고 단탈리온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데판을 보았다.
그는 아주 잠깐 두 눈을 의심하는 얼굴로 단탈리온을 보았지만, 이내 깊은 뜻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조아렸다.
[주군...]
[일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
[무릇 나무가 자라기 위해 땅이 필요하고, 날아가는 새가 쉬어가기 위해 나무가 필요한 법이지.]
[주군.]
[부탁하네.]
[충(忠)입니다.]
단탈리온은 떨어지는 꽃잎마냥 부드러운 걸음으로 데판에게 다가가 그를 밀친다.
이내 데판 역시 허무한 공허 속으로 사라진다.
“...”
세 사람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거적때기 노인과 단탈리온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간 빈자리를 지켜보았다.
“...자네는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나?”
[믿고 있습니다.]
“힘든 여정이 될 게야.”
[그것 역시 정해진 수순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다 이렇게까지 왔는지... 내 항상 네놈이랑 뭔갈 하면 석연치가 않네.”
[다 알고 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그러니 ‘지켜보는 자’인거고.]
“뭐,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하던 게임이나 마저 하세.”
* * *
떨어진다.
하염없이, 추락한다.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려도, 무언가를 잡으려 발버둥을 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들이 그를 끌어내리듯 그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부유하는 공기와 전신의 분간이 사라질 때즈음 축축한 바닥이 느껴졌다.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박율은 눈을 떴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서늘한 섬짓함이 달려든다.
박율은 재빨리 땅을 박차고 일어나 반사적으로 망치를 소환했다.
캉!!!
본능적으로 들어 올린 망치에 철퇴를 닮은 몽둥이가 내려찍혔다.
“...!”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악마였다.
악마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손에 쥔 철퇴를 닮은 몽둥이를 휘두른다.
캉! 캉! 캉!
“뭐야...!”
정신도 차릴 새 없이 날아드는 공격에도 박율은 침착하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날아드는 악마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악마가 서투른 몸놀림으로 다음 공격을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박율은 그 틈 사이를 치고 들어가 악마의 허파를 내려찍는다.
콰직!!!
망치에 맞은 악마의 몸뚱이가 모로 휘며 땅에 처박혔다.
제압 정도로 생각한 가벼운 공격이었지만, 생각보다 박율의 힘이 더욱 강해진 듯했다.
꿈틀거리던 악마의 몸뚱이는 이내 축 늘어졌다.
“후...”
박율은 하얀 불꽃에 타들어가는 악마를 뒤로 날숨을 내뱉었다.
“놀래라...”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박율의 시선이 올라간다.
“...?”
박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곳은 백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이곳은.
“...이건 도대체...”
지옥이었다.
오로지 흑만이 남아있는 지상이었다.
그곳엔 더 이상 공백이 남아있지 않다.
너무나도 익숙한, 잊지 못할 그 지옥.
바닥을 뒤덮은 것은 피였고, 하늘을 가린 것은 악마들과 심연이었다.
꿈을 꾸는 것이라 믿고 싶어도,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과 코를 간지럽히는 죽음의 향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박율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쥐고 있던 망치를 떨어뜨렸다.
『율아! 괜찮...』
뒤이어 눈을 뜬 마르가리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목소리는 흑 속에 잠겼다.
참상이 벌어진 이곳.
『여긴 도대체...』
사방에 악마들이 가득했고, 죽은 이들의 시체들이 바닥의 공백을 지운다.
뒤이어 깨어난 데판 역시 조용히 입을 닫았다.
[...]
대신 주군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시켰다.
“하아...”
숨이 떨린다.
공포, 혹은 분노, 그것도 아니라면 절망.
그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을 차지한, 세상의 모든 것을 지운 정적을 깬 이는 마르가리타였다.
『율아...』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거니...』
“...돌아온 거에요.”
『뭐...?』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악마에게 패했던 그 역사 속으로, 죽음이 일상이었던 그 지옥으로 돌아온 거에요.”
마르가리타는 여전히도 궁금하다는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태껏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절망적이었다.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저려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살려줘!!!”
“아아아아아악!!!”
“그...그만...!!! 그만!!!”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죽음의 향기가 짙게 느껴진다.
역시나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비릿한 피냄새는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였다.
박율은 아무 말 없이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유...율아...!』
“...”
그는 뛰었다.
[우리도 가지.]
데판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박율의 뒤를 따라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뒤로 마르가리타는 끔찍하게 변한 지상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혹여 지옥이라 생각되지만,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폐허가 된 건물들과 죽은 이들의 사체가 의심을 지우게 만들었다.
이곳은 인간계이자 지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인간들은 지상 위에 군림하지 못했다.
『이럴수가...』
끔찍한 참상을 지켜보던 마르가리타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멀리 사라진 박율을 쫓았다.
* * *
“도망쳐!!! 당장!!! 도망치라고!!!”
“오빠...!!!”
“빨리...!!!”
악마가 다가온다.
그에 맞서 남자 아이는 기다란 철쇠를 들고 악마에게 겨누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생채기라도 낼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이미 아이들을 지켜줄 어른들은 모두 악마에게 죽은 채였다.
겨우 살아있는 이들도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틀어막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그걸 아는지 악마는 실실 비소를 흘기며 천천히 다가갔다.
마치 아이들의 공포를 즐기는 듯, 아이들이 지르는 비명에 온몸을 떨었다.
남자아이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도망친다 한들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동생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그는 다가오는 악마를 상대로 무기를 들었다.
그저 맞서는 것만으로 사지가 떨리고 실금을 할것만 같은 공포가 몰아쳤다.
버텨야한다.
[더 발악해봐. 아직 부족해.]
“빨리!!! 뛰라고!!!”
남자아이는 소리쳤다.
“미...미안해... 오빠...!”
“살아남아야 돼...!”
여자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다가오는 악마의 반대편으로 뛰었다.
남자아이는 도망가는 동생을 보며 마지막 희망을 건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이었다.
“...!!!”
뒤에서도 다른 악마가 길을 막은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마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아이를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은 아이의 목을 움켜쥐고 아이는 신음을 내뱉는다.
“오...오빠...”
“수화야!!!”
“커...커헉...”
아이의 작은 움직임이 멎어간다.
남자아이는 정면의 악마를 둔채로 동생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정면의 악마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딜 가려고?]
오히려 악마는 남자아이를 포박했다.
그리고 마치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 뒤에서 아이의 머리를 잡아 당겼다.
“큭...!”
[이 좋은 풍경을 어떻게 혼자만 보겠어? 자 봐, 네 동생의 마지막을.]
“그만해!!!”
아이는 발버둥쳤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무력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이는 온몸을 떨었다.
“오...오빠...”
아이의 움직임이 사라진다.
“수화야!!!”
콰직!!!
아이의 눈이 완전히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망치가 여자아이를 붙잡고 있던 악마의 허파를 터트렸다.
콰당탕!
[커헉...!!!]
[뭐야!!!]
뒤이어 날아오는 낯선 남자.
“눈 감아.”
콰직!
남자는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진 악마의 최후를 장식했다.
“괜찮아?”
남자는 악마에게서 벗어난 여자아이를 일으켜 눈을 맞추고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다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오빠가...”
“알아.”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 애 놓지.”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려있다.
듣는 것만으로 온몸이 저릿해지는 소리였다.
남자아이의 붙잡고 있던 악마는 흠칫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붙잡고는 남자아이의 목을 움켜쥐고 남자의 앞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펄펄 풍기는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그 손 놔라. 당장.”
남자의 한마디에 악마는 더욱 세게 아이의 목을 붙잡았다.
[뭐야...!!! 어떻게 아직도 저런 인간놈이...!!!]
“뭐긴 뭐야. 정의의 사도지.”
“사...살려주세요...!”
“얘야, 잠시만 눈 좀 감아볼래?”
말을 끝내는 순간 남자가 달려든다.
악마는 생각했다.
남자의 시선은 아이에게로 고정되어 있다.
아이를 살리려 달려든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여기서 아이를 죽인다면 필시 죽는다.
허나, 아이를 던지고 도망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악마는 남자가 자신에게로 닿기 직전 아이를 하늘 높이 던졌다.
그리고 남자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분산된 사이 발을 구른다.
[...!]
턱.
[어딜 가려고?]
허나 그의 뒤엔 또 다른 악마가 서 있었다.
역시나 그의 격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엄청난 덩치의 악마는 한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커...커헉...!!! 네놈!!! 인간의 편에 붙은 것이냐!!!]
[무슨 소리는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날 너희 같은 떨거지와 같은 취급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
콰직!!!
커다란 덩치의 주먹은 악마를 짓이긴다.
악마는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모습 바꿔요. 애 눈뜨면 놀랠라.”
남자은 여전히 커다란 덩치로 있던 악마에게 말했다.
악마는 그의 말에 불쾌하다는 듯 콧김을 내뿜더니 이내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악마가 완전히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남자는 품 안에서 여전히도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이제 눈떠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