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단탈리온의 말을 들은 박율은 벙찐 얼굴로 그를 보았다.
“무...뭐라고요?”
[듣지 못하였는가? 그대에게 왕좌를 넘겨주려 한다만.]
미간이 꿈틀거린다.
박율은 허공에서 부유하던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를...?”
단탈리온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저 데판 말고 나를...? 굳이?”
[그렇다네.]
“예...!?”
『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군!!!]
그의 말에 거적때기 노인과 단탈리온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마왕의 자리를 넘기겠다니.
저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박율은 혹시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단탈리온을 보았다.
[듣지 않았는가. 그대에게 제 72 마계의 왕좌를 넘겨주려 한다네.]
그는 뭐가 그리 대수롭냐는 듯 능청스러운 얼굴을 했다.
누가 보면 떨어진 종이 쪼가리라도 주는 줄 알겠네.
저건 미친놈이다.
“...혹시 미친거에요?”
[그리 보이는가?]
“아니라면 그게 더 미친거고.”
[그리 보인다면 미친것이라 하지.]
“진짜 미쳤나봐...”
박율은 그의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듯 벌어진 턱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주...주군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옵니까.]
[말 그대로네. 앞으로 네가 섬기게 될 주군이 저 아이가 될 것이란 말이네.]
[주군...!!!]
데판 역시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단탈리온에게 소리쳤다.
『...지금 네가 뭐라고 씨부리는 건지 알고 씨부리는 거냐!?』
[혹 나의 말에 어려움이라도 있던가?]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될 건 무어 있더냐?]
『인간 아이한테, 그것도 사자의 힘을 이어받은 신의 아이한테 마왕의 자리를 준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그 아이의 그릇엔 이미 마의 힘 역시 담겨있다는 걸 알텐데.]
『그건...!!!』
[허면 뭐가 문제라는 거지?]
『그래도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이야기냐고! 악마도 아닌 인간이 마왕이 된다니...!』
[평화로운 지상에 악마가 내려와 지상을 유린하고, 신이라는 작자가 힘을 나눠준다. 게다가 천사라는 족속까지. 이미 말도 안되는 일들은 사방에 차고 넘치는 것 아니던가.]
『아니 그래도...!』
혼란스럽다.
아니, 혼란스럽다 못해 어지럽다.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잠깐, 잠깐... 다들 조용히 좀 해봐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박율은 손을 들어 언성을 높이는 이들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상당히 혼란스럽거든요. 정리를 하자면 그럼 지금 내가 지금 마왕 자리를 스카웃 받은 거에요?”
[그렇다네.]
“난 악마가 아닌데?”
[으흠?]
“데판도 아니고, 인간인 나를? 굳이?”
[정확히 이해했군, 그래.]
“뭐 그렇게 담담해요? 누가 보면 축구게임 선수 영입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이젠 진짜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악마도 아니고 일면식도 별로 없는 박율을 마왕의 후계자로 점친다는 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차라리 길거리 똥개가 풍월을 읊는다는 게 더 현실성 있겠다.
박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말을 이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도대체 왜...?”
[안될 건 무어냐?]
“...그럼 될 건 뭔데요.”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다네.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지, 나의 선택은 아니니.]
『절대 안 돼.』
마르가리타는 혹여 박율이 흔들릴까 싶어 옆에서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마왕은 추호도 생각도 없다.
“어차피 될 생각도 없지만, 이유나 좀 압시다.”
[그대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네.]
“그러니까 왜...?”
[딱히 이유는 없다네. 그저 감이라는 것이 말해주고 있지.]
“악마도 치매 같은 게 있는 건가...?”
자리에 굳어 단탈리온을 보던 박율은 눈동자를 잠시 굴리더니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진짜 아니죠? 가짜죠? 가짜야. 가짜가 아니고서야... 가짜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진짜일 리가 없어.”
박율은 단탈리온에게 최대한 멀어져 발로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지. 내가 드디어 헛것을 보는 걸 거야. 백지의 세곈가 네곈가 여기 너무 오래 있어서 내가 미친 거야.”
[그리하면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진짜라면 노망난 게 틀림없지.”
[주군께 노망이라니! 그리고 주군은 가짜가 아니다!]
박율의 말에 데판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에 박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받아쳤다.
“그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보고 마왕을 하라는 게?”
[...]
“...”
[...가짜로군.]
“가짜라니까.”
[주군을 내놓아라! 가짜!]
“그래, 가짜!”
제법 잘 맞는 쿵짝에 단탈리온은 흐뭇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새 많이 친해졌나보군.]
“진짜를 내놔라~!”
[진짜를 내놔라!]
『...그만해. 이것들아. 나까지 부끄러워지니까.』
보다 못한 마르가리타는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데판과 박율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도 믿기지는 않다만, 저 앞에 서 있는 마왕이 가짜는 아니었다.
세 사람이 이곳, 백지의 세계에서 한꺼번에 환상을 볼 수도 없거니와, 느껴지는 마기를 봐선 가짜일 수가 없었다.
“크흠.”
조용히 네 사람을 보고 있던 거적때기 노인이 목을 긁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곤 눈을 가늘게 뜬 채 박율을 훑었다.
“흠...”
“할아버진 누구세요...?”
“이 녀석이로고.”
노인은 박율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며 그를 살폈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단탈리온을 보았다.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구만.”
[괜히 제가 눈도장을 찍은 아이가 아닙니다.]
“허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생각인가?”
[마무리되지 않은 역사를 먼저 정리 해야 하지 않을 성 싶습니다.]
노인은 단탈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박율을 보았다.
“당췌 무슨 얘기 중인지 감도 안 잡히네요.”
“급하기는. 우리가 왜 그네들을 불렀는지 알고 있는가?”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당돌하구만.”
[그건 내가 설명하지.]
단탈리온이 노인대신 답했다.
[그전에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네.]
“예?”
[그대는 왜 그렇게 분투를 하는가?]
“그게 뭔 소리에요? 알아듣게 좀 말해봐요.”
[...주군께 언사를 조심해야 할거다.]
옆에서 데판이 으르렁대며 말했다.
“와,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편들어 주는 것 봐.”
[편드는 게 아니라...]
“누나가 좀 대신 말해봐요.”
『그래서 질문의 요지가 뭐냐?』
마르가리타는 박율의 말을 무시하듯 그의 질문을 넘기고 단탈리온에게 물었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목숨을 받쳐가며 악을 쓰냐는 질문이었네.]
『그야 악마가 침략한다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그대가 답할 문제가 아니라네. 그대에게 물을 것은 따로 있네만. 일단은 아이에게 답을 듣지.]
단탈리온은 다시 고개를 살짝 돌려 박율을 보았다.
박율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시선에 머쓱한 듯 표정을 지었다.
“어...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면...”
[그냥 편하게 대답하게나.]
“흠... 악마가 싫기도 하고, 인간들이 지는 걸 원하지는 않으니까...?”
[그렇겠지.]
단탈리온은 드디어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박율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대가 있었던 세상을 기억하느냐?]
“인간계요? 모를 리가 없죠.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곳인데.”
[그곳을 물은 게 아니네.]
“뭐요?”
[그대가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그곳 말이네.]
“...예?”
잠깐 뭐라고?
박율은 그의 말에 잠시 자리에 굳어 뚫어져라 단탈리온을 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곳이라함은... 어디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대가 생각하는 그곳이네. 악마들에게 패배한 그 시간.]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거지?
아주 잠시 사고가 멈추었다.
아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들의 시간으로, 10년 전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곳을 말이네.]
박율의 눈가가 떨렸다.
충격, 그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한참 동안 자리에 굳어 단탈리온을 보는 박율은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목들은 여전히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한 채였다.
『율아. 그게 무슨 소리야...?』
“허어...”
마르가리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박율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눈으로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곤 이내 다시 단탈리온에게로 눈을 돌렸다.
“자...잠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벌써 잊은건가?]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건데요?”
[인과율이라 설명하지.]
“아니, 씨발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멋대로 욕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욕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답답했다.
속에 돌덩이가 들어찬 듯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도저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과거로 돌아온 것도 맞고, 그때의 기억을 양분으로 분투를 하고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저 마왕이 그것을 안다는 것인가.
[그대가 사라지고 남은 그 역사.]
“...”
[아직 그 역사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뭐?”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끝이라면 다행이겠지.]
[주군, 그게 도대체 무슨...?]
귀를 믿을 수 없다.
지금 도대체 내가 무얼 듣고 있는 거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마치 돌덩어리 마냥 머리가 굳은 기분이다.
“말도 안돼...”
부정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냔 말이다.
가능할 것이라는 그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이전의 역사는 사라졌다고.
하여 그는 부정했다.
그냥 잠시 허상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저 악마는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인가?
[부정한다하여 부정이 되지 않는다네.]
하지만 단탈리온의 말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리고 단호했다.
박율은 그런 그의 말을 듣고는 잠시 휘청거렸다.
『율아!』
다행히 옆에 있던 마르가리타가 그를 잡아주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장을 꿰뚫려 죽은 뒤 나는 과거로 돌아왔지만, 아직 세상은 남아있다면?
그럼 나는 도대체 뭘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지?
물론 과거로 돌아와 수많은 악마들을 마주하고 그들을 막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살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악마에게 패한 인간들의 역사.
[‘문’은 준비되었습니까?]
“한참 전에 준비는 끝났다네.”
단탈리온의 물음에 거적때기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노인의 답에 단탈리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박율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돌아가면 나를 찾게나. 또 다시 길을 알려줄테니.]
그리고 그는 박율의 이마를 아주 살짝 밀쳤다.
박율은 흔들리는 갈대 마냥 단탈리온의 힘에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그가 떨어지는 곳은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보다 깊은, 어쩌면 닿을 수 없는 무언가.
심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