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아득함이 느껴졌다.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는, 아니 느껴져서는 안 되는 격이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신이라는 무언가의 가닥을 접한다는 것은 마왕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을 인간이 한다는 것은 더더욱.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인간에게서는 그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또 다시 박율이 달려든다.
보이진 않았다.
허나 본능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피할 수 없다.
시계가 울음을 토해내기도 전에, 초침이 한 발자국 시간을 걷기도 전에 플라우로스는 아득한 저 너머로 날아갔다.
그리고 처박힌다.
콰과광!!!
“커허억...!!!”
폐가 찢어진 듯 아찔한 고통이 그의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플라우로스는 선혈을 토해내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에서 박율이 걸어오고 있었다.
플라우로스는 부정했다.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왕도 아닌, 고작 일개 인간이 신에 근접한 힘을 끌어낸다는 것은.
그것도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마왕에게 닿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했던 사내가 말이다.
“이건...불가능하다...”
하여 그는 다시 한 번 창을 만들었다.
힘을 쏟아붓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저 남자를 멈출 방법이 없다.
그의 격이 점차 상승하며 멈출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농도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살이 떨리고, 뼈가 갈리는 살기였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 정도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플라우로스는 창을 더더욱 비대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한방에 끝낼 수 있는 일격을 준비한다.
박율의 눈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그를 없앨 수 있는 한 방을 말이다.
조금만 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플라우로스는 고민했다.
과연 그의 생명까지 불태우며 일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짧은 상념은 대결의 결말까지도 매듭을 짓게 만들었다.
“...죽어라.”
그리고 날린다.
지평선마저 집어삼킨 창은 공기를 가르며 허공을 주파했다.
창은 날아간다.
여전히 박율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격은 솟구쳤다.
그가 무슨 작당을 벌이는 지는 몰라도, 그것이 완성되기 전에 끝내야 했다.
그리고 창이 그에게 닿는 순간.
그의 격은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넘어섰다.
『율아!!!』
“율아!!!”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함께 창은 박율이라는 남자를 집어삼켰다.
허나 플라우로스는 끝내지 않았다.
혹여나 있을 가능성마저 제거하기 위해 힘을 쏟아부었다.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더더욱 강력하게 창을 내리찍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이 전부 그를 집어삼키고, 자리엔 뿌연 흙먼지만이 남아있었다.
“하아...”
플라우로스는 침음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뿌연 연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있던 무언가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동시에.
쾅!!!
플라우로스의 몸뚱이가 바닥에 수어차례 튕기며 추락했다.
“커...커헉...”
* * *
문득 서희가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인과율은 절대적인 거야.’
과거 수많은 악마들을 상대하며, 그리고 세계수의 잎사귀와 여타 다른 권능을 통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되살리며 서희가 말했던 말이었다.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과율이 도대체 무어인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면 좋은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의 속뜻을 박율은 머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소생은 곧 누군가의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서희는 눈을 감았다.
하여 박율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죽은 이들이 보였다.
이번에는 무엇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는 그 문장에 ‘어차피’라는 단어가 몹시 싫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번에도 바꾸지 못했다.
솟구치는 분노는 그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다.
그 분노는 플라우로스를 향했다.
그리고 나머지 악마들을 향했다.
그들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세상에 악이 드리우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의 모든 신념이 기인한 것은 악마였으며, 그 신념이 온전히 그에게로 정착된 것 역시 악마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악마를 혐오했다.
터벅.
가벼웠다.
그리고 애석했으며, 절망스러웠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 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대략 수백, 수천, 아니 그보다 많은 숫자일 수도 있었다.
그에게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왔는 지도 알 수 없었다.
함께 그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박율이 흡수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한 건 그들 하나하나의 힘이 그에게 숨어있던 무언가를 일깨우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고작 발을 디딘 것만으로 플라우로스의 정면으로 달려온 것이며 고작 망치 한 방에 그를 추락시킨 것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 힘은 양날의 검이었다.
힘을 유지하는 것으로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허나 그것으로 마왕을 죽일 수 있다면 무어가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충분하다.
“...”
박율은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경외와 충격, 그리고 온갖 감정들을 한껏 담은 얼굴로 그를 보는 백봉기와 마르가리타가 보였다.
“커헉...”
플라우로스는 땅에 처박힌 채 각혈을 토해냈다.
박율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떨리는 숨을 뱉어내던 그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눈에 선했다.
달려드는 그 순간순간이 슬로우비디오는 보는 것처럼 말이다.
박율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는 역으로 망치를 내려찍는다.
쾅!!!
마치 초롱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전장의 이들에게서 힘을 흡수했기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박율의 손에 있는 구슬이 그것을 증명했다.
어느새 구슬은 절반 정도 형태를 완성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플라우로스는 끽해야 절반 정도의 힘밖에 내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그는 발악했다.
추락할 때마다 날개를 펴고 달려들었다.
허나 그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되려 그 결과는 점차 그를 더욱 깊숙한 심연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박율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플라우로스를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악마라는 존재는 왜 이런 짓을 벌이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희생해야 하는가.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은 더 고민했던 문제였다.
악마들은 말했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재미를 위한 것이라면 이렇게 목숨을 불태우면서까지 할 필요는 무엇인가.
수십번의 합이 이어졌다.
그리고 단 한차례도 플라우로스는 박율에게 닿지 못했다.
박율은 바닥에 처박혀 고통을 토해내는 플라우로스에게로 걸어갔다.
“...이제와서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인가?”
“...”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니까.”
플라우로스는 말했다.
마치 그것이 정해진 운명인 양 말이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존재 이유라는 그 단어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더욱 캐묻고 싶었다.
도대체 존재 이유가 무어냐고.
하지만 박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상의 물음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 몸에서 나와. 당장.”
“허.”
플라우로스는 콧방귀를 뀌더니 자세를 고쳐 옆에 있던 바위에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들이 어리석은 이유를 아는가?”
“닥쳐.”
“인간들은 너무 고지식하거든. 고작 생명 하나가 무어라고, 고작 어린 아이가 무어라고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내던지는 지 말이야.”
섬뜩한 웃음을 보인다.
그리고는 양팔을 넓게 펼쳤다.
“죽이거라. 무슨 술수를 벌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게 더 이상 너를 이길 힘은 없는 것 같군. 그러니 죽이거라.”
“...!”
“왜 그것은 하지 못하겠느냐?”
“이러나 저러나 넌 이제 죽어. 마왕으로써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거다.”
“혹 이 몸에서 내 힘을 빼낸다면 아이를 살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어리석긴. 나는 혼자는 죽지 않는다.”
박율은 짐짓 당황한 얼굴을 했다.
눈 앞에 있는 악마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죽일 수 없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우매하고 어리석다.
하여 실수를 한다.
“나를 죽이거나 그리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라.”
플라우로스는 말한다.
그에게 실수 혹은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죽여야 한다.
박율은 플라우로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죽여라.”
“...!!!”
그는 패배했다.
허나 패배하지 않았다.
악마라는 족속은 으레 그러했다.
명예를 중요시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잔인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벌인다.
박율은 고개를 돌려 백봉기를 보았다.
그의 눈이 보였다.
그는 박율을 보지 못했다.
박율은 다시 고개를 돌려 플라우로스를 보았다.
죽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는 정말 생화와 낙화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와...”
“죽여보거라!!!”
플라우로스는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뿜었다.
그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능했다.
“나오라고!!!”
“나를 죽이면 이 아이 역시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면 말이다!!!”
박율은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하...”
그리고 그는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플라우로스를 향했다.
“죽이거라. 얼른!!!”
박율은 그런 플라우로스를 잠시보다가 이내 백봉기를 보았다.
그는 이미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비튼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처연한 그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다.
박율은 아주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
[유리]
그의 손바닥 위 문양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박율과 함께 플라우로스의 몸이 새하얀 불꽃에 휩쌓여 사라졌다.
* * *
새하얀 벌판.
그 위에서 박율은 눈을 떴다.
온전히 그를 세상과 유리시키는 그만의 공간.
최후의 수단이었다.
모든 수가 통하지 않을 때, 선택해야 했던 유일한 선택지.
만약 다른 이가 그를 본다면 이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하여 그는 홀로 떨어지기를 선택했다.
박율은 여전히도 광기 어린 눈으로 그를 보는 플라우로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나를 죽이겠다는 겐가? 지독하게도 끔찍한 발상이로군.”
마음같아서는 저 입을 더 이상 놀리지 못하도록 부수고 싶다만.
박율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 몸을 가져가.”
“무어라?”
그리고 그는 양팔을 넓게 펄쳤다.
플라우로스는 귀를 의심하는 얼굴을 했다.
“지금 무어라...”
“애 몸은 내버려 두고 나를 그릇으로 삼으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기우는 살려줘.”
“흐하하하하!!!”
플라우로스는 광기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이내 표정을 굳혔다.
“싫다면?”
“...”
“내가 어찌 될 줄 알고 네 몸을 가져가느냐? 지금껏 공을 들인 그릇을 버리고 어찌 사자의 몸에 악마가 들어가냔 말이더냐. 자멸이라도 하겠다는 소리냐?”
“...”
박율은 말 없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호오...”
그의 손엔 꿈틀거리는 악마의 싹과 만화경 상태의 청동거울이 들려있었다.
악마의 싹이라는 것은 쥐새끼를 닮아 꿈틀거리는 것이 몹시나 징그러웠다.
박율은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악마의 싹을 손에 찔러넣었다.
푹!
“큭...”
미친듯이 꿈틀거리던 악마의 싹은 이내 잠잠해지더니 박율에게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함께 그의 몸에 마기가 자리를 잡아간다.
손에서 퍼진 마기는 팔으로 뻗어, 가슴, 그리고 머리까지.
고통에 온몸을 부들거리던 박율은 겨우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은빛검을 자신의 복부에 찔러넣었다.
푹!
은빛검에 가득하던 플라우로스의 마기가 그의 몸을 잠식한다.
흑이 그의 몸을 뒤덮어 그의 몸을 꿰차고 있던 백을 밀어낸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처참했다.
악마를 혐오하던 이가 악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구역질이 올라왔고, 절망감, 좌절감이 그의 전신에 색을 뒤덮었다.
플라우로스는 웃었다.
즐겁게 웃었다.
최고의 유흥이라며 웃었다.
부들부들 떨던 박율은 속을 게워내며 반쯤 감긴 눈으로 플라우로스를 보았다.
“하아... 이 정도면 충분하냐...?”
“충분하고말고.”
“얼른...”
플라우로스가 그에게로 손을 뻗는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는 검은 증기가 박율의 몸을 둘러싼다.
박율은 증기를 받아들였다.
마기가 그의 몸에 흡수되면서 플라우로스의 그릇이었던 기우의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기우가 돌아오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변하고, 근육질의 몸은 다시 왜소한 아이의 몸으로 돌아갔다.
대신 박율은 몸에 흘러들어오는 마기에 괴성을 내질렀다.
“아아악!!!! 아악!!!”
근육이 비틀리고, 골격이 형태를 달리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하는 고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