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17화 (117/183)

117화

오로지 가능성이었다.

아니, 마왕을 상대로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었다.

허나 그 가능성은 충분히 기댈 수 있을 법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플라우로스에게 닿는 것.

스르륵.

플라우로스의 발 밑에서부터 피어난 마기가 형을 띄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촛농이 시간을 역행하여 원형태를 되찾듯, 마기는 뭉치고 뭉쳐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었다.

이윽고 그 마기는 표범의 형태로, 수십 마리의 표범들이 그를 감싸고 걸어나왔다.

그리고 표범들은 달려드는 박율 일행에게 이를 드러냈다.

앞서 있던 마르가리타는 이를 드러내는 표범에 망치를 휘두르지만, 망치에 내려 찍혀 짓이겨진 표범은 이내 원형을 되찾았다.

박율은 그녀를 지나치며 말했다.

“꼬리가 약점이에요.”

박율은 먼저 코어를 장검의 형태로 뒤바꾸고는 정면에서 달려드는 표범을 피해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신속]

쿵!

그는 정면을 장악하고 있던 표범이 쫓지 못할 속도로 뛰어내려 그대로 뒤에 안착했다.

그리고는 표범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검을 휘두른다.

차악!

호를 그리며 허공을 베어가르는 검을 따라 표범의 검은 꼬리가 떨어졌다.

함께 표범은 촛농이 녹아내리듯 뭉쳐진 마기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박율은 곧바로 허리를 비틀어 망치를 찍어내리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표범들을 터트리고, 꼬리를 양단했다.

그의 뒤를 따라 백봉기와 마르가리타의 공격이 이어졌다.

흑에서 기어 온 해골들이 표범들을 덮치면 백봉기의 뼛조각이 꼬리를 절단했고, 마르가리타의 망치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표범을 섬멸했다.

숫자만 백에 근접하던 표범의 숫자는 순식간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수준까지 줄어들었지만, 잠시 눈을 깜빡하는 사이 표범의 숫자는 수십, 수백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율 일행의 기세가 누그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표범들을 베어낼 뿐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아주 작은 빈틈.

작은 방심이 만들어내는 빈틈이었다.

쾅!!!

마르가리타의 망치가 대지를 반으로 가르듯 내려찍혔다.

그리고 발 디딜 곳 없이 땅을 잠식한 표범들 사이로 여백이 나타났다.

벌어진 여백에 다시 표범들이 나타나기 전에 나타난 해골무리가 여백을 지켰다.

빈틈.

박율은 곧바로 발을 돌려 무릎을 굽혔다.

[신속]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박율의 망치는 플라우로스를 향한다.

턱!

하지만 그의 일격은 단지 한 손에 막혔다.

검지손가락으로 박율의 일격을 막은 플라우로스는 비소가 한껏 담긴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턱!

남은 손으로는 박율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고작 이 정도라니. 기대했던 내가 짜증 날 정도야.”

하지만 박율은 웃고 있었다.

[변형]

데판의 의지를 이어받은 능력.

몸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는 권능이 박율의 몸에 휩쌓였다.

“...?”

플라우로스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박율의 몸은 유압프레스에 짓눌리듯 점점 작아지더니 순식간에 플라우로스의 손을 타고 그의 뒤로 뛰었다.

그리고 플라우로스의 뒤에서 다시 나타난 박율은 그의 몸에 손을 가져갔다.

[추출]

박율이 가진 유일한 가능성.

마인에게서 악마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권능이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증기는 플라우로스의 몸과 연결되어 하나의 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쾌하군.”

플라우로스는 한껏 불쾌하다는 얼굴로 마기를 발산하여 박율을 날렸다.

쾅!!!  날아간 박율은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지만, 다행히 권능은 끊어지지 않은 듯 그의 손에선 마기를 잔뜩 머금은 구슬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공이었다.

평범한 악마가 아닌 악마들의 왕인 마왕을 상대로 가능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그에게서 훔쳐낸 마기와 지금껏 만들어온 상황들이 결국은 가능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듯했다.

이제는 시간싸움이었다.

권능을 유지한 채 버텨야 한다.

박율은 무거운 날숨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플라우로스는 그제야 이질감을 눈치챈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박율을 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게냐?”

“알아서 뭐하게.”

“그래, 알 필요는 없지. 이제 나도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

그 순간 박율은 엄습하는 마기에 땅을 딛고 높이 뛰었다.

쾅!

그가 있었던 그 자리로 기다란 창이 꽂혀 있었다.

“나는 안드라스같은 머저리는 아니라서 말이야.”

플라우로스의 주위로 허공을 유영하는 기다란 창들이 만들어졌다.

신기전을 연상케하는 숫자의 창들이 박율 일행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던진다.

[척후]

막을 수 없다.

아니, 막을 수는 있다만, 피하는 것 외엔 연달아 날아올 창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박율은 가속을 더 해가며 날아오는 창을 피해 허리를 비틀었다.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쉴새 없이 날아오는 공격들은 그에게 찰나의 간극조차 주지 않았다.

겹에 겹을 쌓여 날아오는 창을 피하면 이빨을 드러낸 표범들이 달려들었다.

백봉기와 마르가리타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저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격들의 대부분이 박율에게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박율을 죽이기 위해 창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는 것마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끈질기군.”

한참을 창을 던지던 플라우로스는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딱.

그의 손가락이 부딪혀 소리를 내며 지금껏 창과는 다른 거대한 창이 하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창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거대했고, 기둥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첨예했다.

건물 한 채는 우습게 넘길만한 거대한 창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마기는 닿는 모든 것을 섬멸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막아보거라.”

피할 수 없다.

막아야 한다.

박율은 본능적으로 코어를 방패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어 방패를 더욱 비대하게 만들었다.

플라우로스의 손짓을 시작으로 창이 허공을 주파하기 시작한다.

“빨리!!! 뒤로 와요!!!”

박율이 소리친다.

마르가리타와 백봉기는 재빨리 그의 뒤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창이 창공을 꿰뚫고 박율의 코어와 맞부딪혔다.

콰과광!!!

거대한 창과 박율의 코어 사이로 황금빛 불꽃이 만발한다.

마치 개화한 꽃 한 송이가 씨앗을 퍼뜨리듯 불꽃은 타올랐다.

“크윽...!!!”

백봉기와 플라우로스는 어떻게든 그를 도우려 하지만, 물밀듯 달려드는 표범들과 창들을 막아내느라 겨를이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카가각!!!

거대한 창과 자웅을 겨루던 코어에 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벌어진 금은 점차 커지고 커져 코어를 잠식할 듯 영역을 넓혔다.

창을 막아내는 박율의 발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끝장이다.

“다들 신호하면 고개 숙여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코어가 완전히 부서지려는 순간.

박율은 코어를 포기하고 거대한 창을 옆으로 비틀어 흘렸다.

쾅!!!

동시에 코어는 산산히 조각나고, 날아든 창은 그대로 박율의 건너편에 떨어졌다.

콰과광!!!

대지가 박살나듯 굉음이 울려퍼졌다.

고작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전신의 힘이 전부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박율은 이를 꽉 깨물며 벌벌 떨리는 온몸을 참아냈다.

“커헉...”

“이것조차 막아내다니.”

플라우로스는 능청스레 박수를 치며 탄사를 내뱉었다.

나름 박율을 한방에 끝내려고 날린 일격이었다만.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어지간한 마왕들도 저 정도의 공격을 정통으로 막는다는 것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공격을 막아냈다.

게다가 죽지도 않는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일어나는 게 인상적이다 못해 역겨울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그를 자신의 수하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대로 죽이기는 너무 안타까운데 우리 쪽으로 올 생각은 없는가?”

“...까라 그래. 니네들이랑 손 잡을 바에 혀 깨물어 죽고 말지.”

당장에라도 숨이 멎을 듯 가뿐 숨을 쉬며 박율은 말했다.

그의 곁으로 달려온 두 사람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나 그는 반주검 상대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플라우로스의 공격을 막는데 너무나 큰 힘을 쓴 듯했다.

“괜찮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박율은 일어났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그간의 시간들이 아까웠다.

다행히 그의 권능이 아직 플라우로스에게서 끊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도 그의 손엔 검은 구슬이 조금씩 크기를 불려가는 중이었다.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가보군.”

“혀가 길어졌네.”

“뒤쪽의 풍경을 보면 그런 소리를 못할텐데 말이지.”

“뭐...?”

박율은 그의 말에 흘깃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전장이 보였다.

죽은 이들의 검붉은 선혈들이 낭자한 전장 말이다.

하지만 그곳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은 악마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대한 창에 짓이겨진 상태였다.

“...!!!”

“기세 좋게 막은 것까지는 좋았다만, 그 너머까진 알 수 없었나보군.”

플라우로스는 말했다.

너무도 잔인하게, 그리고 웃으면서.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던 이들이 결국은 죽고 말았다.

박율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곁에 있던 마르가리타의 손길에 겨우 중심을 잡았지만, 여전히 그는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플라우로스는 그런 그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이들이 많다지만, 이대로가면 모두 죽게된다.”

“...”

“네게 제안을 하나 하지. 만약 네가 우리쪽으로 온다면 이상의 살생은 멈추겠다.”

“...뭐?”

박율의 공허한 눈이 플라우로스를 향했다.

그 눈엔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좌절도 절망도, 슬픔도, 고통도, 그 무엇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눈 앞의 악마에 대한 분노였다.

박율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마르가리타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한 걸음 걸어나왔다.

『어디가...!』

“어때?”

“...내가 거기로 가면 남은 사람들을 전부 살려준다는 소리야? 지금?”

“그리고 이상의 접근은 멈추도록 하지.”

“...”

“네 선택에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의 인간들이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배신을 하라는 거잖아.”

“배신으로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배신이라고 해야 하는가?”

“율아!!!”

『넘어가면 안돼!』

그의 뒤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율은 고개를 흘깃 돌리더니 이내 다시 플라우로스를 보았다.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이상의 희생을 멈출 수 있다니.

하지만 그 선택은 그에게서 여태껏 관철해온 신념을 버리라는 소리였다.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그의 실수로 너무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역겨운 제안은 박율에게 있어 최악의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마주했던 그 순간을 말이다.

박율은 오른손 문양의 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까.”

“뭐?”

“까라고.”

“허.”

“...내가 그딴 세치혀에 당할 놈으로 보이냐?”

그리고 권능을 개방한다.

[흡수]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권능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그 능력이었다.

권능은 전장으로 넓게 펼쳐졌다.

이윽고 그것은 뜻을 달리한 이들에게로 가지를 뻗쳤다.

그리고 스며드는 그들의 의지.

익숙한 이들의 힘과 낯선 이들의 힘이 한데 섞인다.

한 방울, 한 방울.

고작 한 방울에 불과한 힘들은 이윽고 하나의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격이 느껴졌다.

그는 망치를 들었다.

더 이상 그것은 망치가 아니었다.

망치의 형태를 한 무언가였다.

망치에서 흘러나오는 격은 표범들의 접근조차 막았다.

박율은 발을 떼었다.

쾅!!!  플라우로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박율과 플라우로스의 힘이 맞부딪혔다.

망치를 막은 플라우로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리고 살기가 느껴졌다.

섬짓한 공포.

고작 인간에게서 공포를 느꼈다는 말이다.

쾅!!!

박율의 망치는 그가 알아채지도 못한 그 순간에 벌써 호를 그리며 그를 날린 채였다.

“이럴수가...”

땅에 처박힌 플라우로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가능할 리가...”

허나, 그에게서 신에 근접한 격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