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검게 물들은 전장에 새하얀 빛의 도래와 함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앞에 선봉에 선 박율은 높이 든 망치를 플라우로스에게 겨누었다.
지반을 울리며 달려들던 악마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사자들에 짐짓 당황한 듯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언뜻봐도 수백 아니, 수천을 넘는 숫자의 사자들이었다.
안드라스의 침공 이후 어떤 세력이던 약해진 틈에 침공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플라우로스군으로써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방에 쓰러진 사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 보다 곱절은 많은 사자들이 무기를 든 채 서 있었으니 말이다.
박율은 그런 악마들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쫄았냐?”
그의 뒤를 장식하고 있는 사자들.
그들을 믿고 있기에 아주 조금이나마 기고만장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박율을 모를지언정 그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었다.
함께 수난을 헤쳐왔던 이들과 이전엔 없었기에 이제부터 수난을 헤쳐갈 이들이었다.
터벅.
박율의 옆으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줄 알았더니.”
박율은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에 흘깃 눈길을 돌렸다.
그곳엔 남산타워에서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던 그녀가 서 있었다.
박율은 반갑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나 안 죽이려고요?”
“잠깐 실수한 거 가지고...”
“실수 한 번만 더 하면 사람 죽겠네.”
“거 참...”
여자는 찌릿 박율을 노려보며 말했다.
박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런 얼굴을 했다.
“그래도 내 나침반 신호가 잘 갔나봐요.”
“깜빡이도 없이 머리에 대고 이야기를 해서 어찌나 놀랐던지.”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근처에 사람들 죄다 불러오라 그래서 조금 늦었지만, 뭐.”
“좋아요.”
박율은 만족스럽다는 듯 플라우로스를 향해 겨눈 망치를 내렸다.
함께 악마군 선봉에 있던 악마의 괴성과 함께 잠시나마 놀란 듯 했던 악마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긴말 필요 없고, 갑시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다시 전쟁은 시작되었다.
쏟아지는 악마들과 그에 맞서는 사자무리들.
사방에서 불기둥이 치솟았으며 마기 폭풍이 휘몰아쳤다.
마치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 서로를 잡아먹으려 아구를 벌리는 것만 같은 이질감이 드는 전장이었다.
그리고 박율은 여전히 악마들 사이 군림하고 있는 플라우로스를 보고 있었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린 상태였다.
“너는 도대체...”
그는 감탄과 경악, 그리고 온갖 감상이 뒤섞인 탄사를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 사이 박율의 곁으로 온 마리가리타가 말했다.
『볼 때마다 대단해. 정말. 언제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던 거야?』
“이렇게 안 하면 저놈들을 잡을 수가 없거든요.”
『가끔보면 내가 아니라 네가 천상계 존재같다니까.』
“그럼 우리도 다시 시작할까요.”
박율은 다시 망치를 들었다.
그의 목표는 플라우로스.
흘깃 흘기는 시선은 백봉기를 향했다.
그 역시 굳은 결심을 한 채 기우의 몸을 가진 플라우로스를 보고 있었다.
“...꼭 성공할 거에요.”
그리고 그는 달린다.
마르가리타와 백봉기가 그의 뒤를 따랐다.
달려가는 그들을 막는 수십의 악마들.
차악!
박율의 검이 정면의 악마들을 일도양단한다.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을 베어가르며, 그의 발은 오로지 플라우로스를 잡기 위해 땅을 굴렀다.
『끝까지 달려. 뒤는 우리가 봐줄테니까.』
마르가리타는 숨을 들이마시더니 본신의 힘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중압감.
새하얀 빛이 세상에 내리앉는다.
사자들에겐 축복을, 악마들에겐 무게를.
화아!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는 세상이 밝히는 동시에 태웠다.
그녀의 격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직 본신의 힘을 개방한 채 악마들을 향해 고개만 돌렸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격을 갖춘 군단장들 이외의 거의 모든 악마들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쾅!!!
박율이 지나갈 그 길을 향해 철퇴 같은 망치를 내리찍자 홍해가 갈리듯 새하얀 빛줄기가 박율의 앞을 인도했다.
그는 그의 등을 내어준 이들을 믿으며 왕의 목을 치기 위해 달렸다.
턱!
그의 앞을 막는 악마 하나.
악마는 시야를 덮은 피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재해의 마신, 레돈도.
군단장이라는 직속에 맞게 쉽게는 죽지도 않는 뿐더러 마르가리타의 격이 그리 소용이 있지는 않는 듯했다.
[버러지들이...]
그는 더 이상의 진입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피어나는 마기의 구.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마기들이 전부 방울 만한 마기의 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떨어지는 빗줄기가 역류하듯 땅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검은 방울들은 이내 짙은 안개를 만들었다.
닿는 이들을 모두 마기에 메말라 죽인다는 안개는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율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차악!
어디선가 날아온 검격이 안개 사이 빈틈을 만들어냈다.
박율은 흘깃 검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남산타워의 추억을 함께했던 여자가 새하얀 불꽃을 두른 검으로 허공을 베어가르는 중이었다.
“뭐해. 가 얼른.”
여자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며 말했다.
박율은 혀를 끌끌 차며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가 만들어 준 빈틈으로 달렸다.
“...이럴 거면 남산타워에서나 그러지.”
“주둥아리 나불거릴 시간에 움직이지.”
두 사람의 기행을 알아챈 레돈도가 그의 길을 다시 막으려 하지만, 곧이어 날아오는 검격에 그는 결국 박율이 통과하는 것을 손 놓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어딜 보냐?”
* * *
박율은 곧장 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플라우로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를 얼른 와보라는 듯 거만한 얼굴을 한 채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치기 어린 얼굴에 망치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악마들이 여간 많아서 말이다.
레돈도를 지나치자 나타난 또 다른 플라우로스 군의 군단장이 더 이상의 진입은 허하지 않겠다는 듯 길을 막았다.
[주군께는 보낼 수 없다.]
거대 악마, 태무.
말 그대로 태산 같은 크기를 가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찌나 덩치가 큰지 고개를 높이 꺾어 들어야 얼굴이 보일 정도의 덩치였다.
하지만 그의 덩치가 무색하게 그는 어디선가 날아온 바위에 중심을 잃었다.
[우오오오오!!!]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킹콩.
그새 사자들의 치료를 받은 킹콩이 정신을 차리고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의 곁에 보이는 다른 이들 역시 치료를 받고 겨우 정신을 차린 참이었다.
혹시 늦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다행히 참사는 벌어지진 않은 듯했다.
킹콩은 곧바로 땅을 박차더니 태무에게 몸을 던졌다.
콰당탕!!!
날아온 킹콩은 그대로 태무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태무는 어떻게든 킹콩을 떼어내려 하지만, 킹콩은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그를 공격했다.
흡사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케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를 보조하는 공격들이 사방에서 떨어졌고, 역시나 활로가 열렸다.
박율은 그들에게 뒤를 맡기고 계속해서 플라우로스를 향해 달렸다.
뒤를 이어 달려드는 악마들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럴 때마다 익숙한 이들이, 때로는 낯선 이들이 박율을 도와 활로를 만들었다.
하여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활로를 쫓았다.
시야가 닿지 않는 뒤에서 악마들의 괴성과 사자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박율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박율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자들이 악마들을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쟁취한다한들 결국은 우두머리를 없애야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발은 오로지 플라우로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박율은 익숙한 이의 모습을 한 악마의 앞에 멈춰섰다.
“...어떻게 고작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플라우로스는 여전히도 거만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복수.”
그 이상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복수.
십년 간의 수모와 수많은 이들을 잃어야 했던 그 슬픔들에 대한 복수였다.
터벅.
그의 뒤로 백봉기가 뼛조각을 쥔 채 걸어 나왔다.
플라우로스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이의 몸에 날붙이를 들이댈 생각인가?”
“돌려놔...”
“무엇을 말이냐.”
“...”
백봉기의 뼛조각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그리고 분통함을 토해냈다.
자신의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야 한다는 그 절망감이었다.
“다시 아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보군.”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돌려놔...”
“여타 방법이 없는 것 같다만, 나를 죽이면 아이가 죽게 되겠지.”
백봉기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분노가 주된 온갖 감정들이 한데 섞인 구역질이 날것만 같은 호흡이었다.
치솟는 부아에 당장에라도 저 악마를 죽이고 싶었다.
허나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저 몸은 아이의 몸이었다.
그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플라우로스는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설득하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릇을 찾는다면 아이의 몸을 돌려주겠다고. 수년을 기다렸건만 며칠을 못 기다려 아이를 죽이려는 것이더냐? 그리하고도 네가 애비라 불리고 싶은 게냐?”
백봉기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더 이상 초점은 없었다.
손에 쥐어진 뼛조각에서 살기가 흠칫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혼란 속에 해매던 백봉기를 정신차리게 만든 목소리였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시야가 뚜렷해지는 격이 느껴졌다.
백봉기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걸로 모자라, 이젠 그딴 소리를 해? 너는 진짜 맞아 뒤져야겠네.』
백봉기의 어깨를 짚고 앞으로 나온 마르가리타는 당장에라도 플라우로스를 씹어먹겠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박율은 다행이라는 듯 숨을 내뱉었다.
마르가리타 정도 되는 격이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면 공황상태에서 백봉기를 끄집어낼 방법은 없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 참사를 막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박율은 눈빛으로 마르가리타에게 감사를 전했다.
『방법은 있는 거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안 되는 것보다야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낫지. 에휴, 천상계에서 내려와놓고 너한테 의지하고 있는 게 참.』
마르가리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러니까 내 팬된 거 아니에요?”
『그래 인마, 네 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