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교차하는 두 시선 끝에 백봉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박율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유리]
오른손의 문양이 형태를 달리하며 피어난 불꽃은 백봉기와 함께 두 사람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흐음...?”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는 플라우로스는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아주 잠시 세상에 공백이 내려앉았다.
그저 흩날리는 잔바람만이 그 공백을 대신했다.
샤락.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 하나가 박율과 백봉기 그 너머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오래 기다렸지?”
박율이 말한다.
하지만 백봉기는 달싹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또 다른 변명이었으며,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
백봉기의 눈빛이 잔잔한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인다.
박율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그가 들이미는 뼛조각 너머 백봉기의 두 눈을 응시했다.
백봉기는 대답 대신 뼛조각을 휘둘렀다.
그것은 또 다른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박율에게 닿지 않았다.
뼛조각은 하염없이 허공을 부유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박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발악을 하는 듯, 발버둥을 치는 듯 그의 손이 흔들렸고, 날카로운 뼛조각이 흔들렸다.
마치 그를 부정한다는 듯, 그의 과오를 어떻게든 잊으려는 듯, 그는 필사적이었다.
그렇기에 박율은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저 피할 뿐이었다.
그의 울분이 모두 토해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하아...”
백봉기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 소리는 울음 같기도 했다.
그제서야 박율은 무기를 들었다.
백봉기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다시 달려들었다.
캉!!!
박율의 망치가 그의 공격을 막는다.
쇳소리가 울리며, 쇳소리를 타고 진동이 범람했다.
서로의 무기를 맞대며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그 진동을 타고 서로의 심장을 가격한다.
캉!!!
검을 나눈다.
그리고 생각을 읽는다.
‘이미 늦었어.’
백봉기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그는 굽히지 않았다.
아니, 굽힐 수 없었다.
그의 부정은 곧 기우의 죽음을 뜻하기도 했으니까.
백봉기는 바닥을 딛고 뼛조각을 크게 휘둘렀다.
캉!!!
‘아니, 늦지 않았어.’
그의 두 눈을 응시한다.
감추고 있던 속내를 털어놓으라는 듯 말이다.
백봉기의 눈빛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뼛조각은 이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늦었어. 이미, 나는...”
괴물이었다.
잘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 일을 저지른 괴물.
하여 백봉기는 입을 꾹 닫았다.
허나 박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벌어진 두 입술 사이로 아련하면서도 아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
“내가 너무 늦었지?”
고작 한마디였다.
여태껏 열심히 쌓아왔다고 생각한 그의 방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고작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쌓여왔던 감정이 하나둘 옷가지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백봉기의 손이 떨려왔다.
그는 나머지 손으로 손을 붙잡아 떨림을 참으려 애썼다.
또 다시 달려든다.
캉!!!
박율은 백봉기의 공격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백봉기는 박율의 검을 튕겨내 조금 뒤로 물러났다.
“...넌 몰라.”
“아니.”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얼마나 절박했는지...”
“알고 있어.”
“근데 왜!!!”
응어리져 있던 그의 감정이 울음을 토해낸다.
그의 두 눈에서 여태껏 웅크리고 있던 슬픔이 흘러내린다.
“근데 왜...!!!”
그리고 백봉기는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공격엔 그의 슬픔과 절망이 축축하리만큼 젖어있었다.
“너는...!!!”
캉!!!
“없었던 건데!!!”
푹!
백봉기의 뼛조각이 박율의 가슴팍에 박힌다.
뼛조각의 날을 타고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려 백봉기의 손을 적셨다.
“...!!!”
“부족하다면 더 해도 돼.”
피하지 않는다.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슬픔을 피하기에 박율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 감정을 이해하려 그는 공격을 그대로 받았다.
뼛조각이 박율의 가슴팍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백봉기는 뼛조각을 뽑지 않았다.
뽑을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그의 손은 결국 바닥에 떨어진다.
그를 지탱하던 두 다리 역시 그대로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사실 알고 있었어...”
백봉기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도...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지도...”
기우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백봉기는 바위가 내려앉은 듯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검게 물들어 있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박율을 마주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여전히 박율이었다.
“율아...”
“형.”
그리고 백봉기는 떨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았다.
“내가...내가...도대체...무슨 짓을...한거야...”
박율은 무릎을 굽혀 그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가슴팍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생채기일 뿐인 상처는 그가 내뱉은 감정의 끝자락에조차 닿을 수 없었다.
“괜찮아. 형.”
박율이 말한다.
하지만 백봉기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사람을 죽였어... 이 손으로...그리고...나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그의 손은 어느새 검게 물들어있었다.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형.”
“난 괴물이야... 더 이상 나는...!!!”
“형!”
“기우를 살리려고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조차 검게 물들어있었다.
마치 그에게 있어 더이상 백(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백봉기는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녹아가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율아... 나 좀 죽여주라...”
절망은 그를 괴물로 만들었고, 또 다른 절망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흑으로 물든 그의 손이 박율을 애타게 붙잡았다.
몇 날 며칠을 굶주린 길거리의 거지처럼 죽음을 동냥하고 있었다.
그는 섬뜩하리만큼 절박했다.
“그냥 날 좀 죽여줘... 난 더 이상...”
“형.”
“제발 죽여줘!!!”
“형!!!”
박율이 소리를 지른다.
백봉기는 침음했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
“아직 늦지 않았어.”
백봉기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봐.”
“...”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
“...난 너무 더러워졌어.”
“더러워졌으면 속죄하고 살아. 잘못한만큼 빌면서 살라고.”
“...”
“대신 비겁하게 도망치려고 하지마. 죽지도 마.”
“율아...”
박율이 웃는다.
“그게 형이잖아.”
흑이 녹아내린다.
백봉기를 뒤덮고 있던 흑이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여린 그의 모습이, 더럽히지 않은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의 울음과 함께 본래의 모습이 흑의 아래에서 뭍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박율은 손을 내밀었다.
백봉기는 그의 손을 멍하니 보았다.
“일어나.”
“율아...”
“아직 안 끝났어.”
백봉기는 여리디 여린 그의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말했잖아.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박율은 그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흑만을 내려놓고 그를 일으켰다.
“이제 진짜 돌아가자.”
* * *
플라우로스는 두 사람을 기다렸다.
과연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박율이라는 인간은 그러한 존재였다.
끊임없이 즐거움과 새로움을 주는 마약같은.
천하의 플라우로스가 안드라스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는 안드라스처럼 머저리는 아니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박율이라면 어떤 변수를 만들던 만들 것 같다는 생각에 쓸데 없는 방심은 사전에 차단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길어야 10분이면 심연이 열리고 그의 병력들이 인간계에 들어올 터였다.
과연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일까.
『...』
플라우로스의 시선이 사라진 두 사람 너머를 향했다.
흔히들 천사 혹은 신이라 부르는 존재가 멀리서 위협적인 눈을 한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달려든다.
하지만 플라우로스는 가볍게 마기로 그녀를 짓눌렀다.
『크윽...! 이거 치워!!!』
“치우면 어쩌려고?”
『허튼짓 하기만 해봐...!!!』
허튼짓이라도 했다가는 죽여버리겠다는 일념이 돋보였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너무나 맛있는 만찬을 앞에 두고 멍청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잠깐 이야기나 나누지.”
그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마기에 주박된 채 또 다시 주먹감자를 먹였다.
플라우로스는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터트렸다.
“명색이 천사라는 존재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남 이사 뭘 하든.』
“지금 윗동네는 정신이 없을텐데 말이지.”
『신경끄시지.』
“너도 알다시피 마계에서는 인간계에 현현하는 세력과 그 틈을 타 마계대전을 준비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지.”
『그래서?』
“마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 상태를 보아하니 천상계로 돌아가도 그리 어차피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아서 말이네.”
『나 도발하는 거냐?』
“도발이야. 약자가 강자에게나 하는 것 아니겠어? 난 그저 얼마 남지 않은 명을 이곳에서 소모하는 게 조금은 안타까워서 말이지.”
『그럼 그냥 닥쳐. 죽을 일 없으니까.』
“그리 생각한다면야...”
그때였다.
플라우로스와 마리가리타 사이 벌어진 공백 사이에서 인기척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나는 두 사람.
“허.”
플라우로스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뼛조각을 높이 든 백봉기가 피투성이의 박율을 짓밟은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플라우로스를 보았다.
“이건 또 의왼데.”
『...!!!』
두 사람을 본 마리가리타의 사고가 잠시 숨을 멎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미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곧바로 순간적으로 힘을 폭발시켜 마기를 풀어헤치고는 그를 향해 달렸다.
쾅!!!
그녀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백봉기를 날렸다.
날아간 백봉기는 수차례 바닥을 굴러 플라우로스의 앞에 떨어졌다.
『율아!!!』
마르가리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이게...!!!』
쓰러진 그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박율을 품에 안은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탄사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온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를 앗아가고 있었다.
마르가리타의 눈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마르가리타는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 힘을 쏟지만, 마치 뚫린 독에 물을 붓는 듯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거의 불가능했다.
대상이 완전히 죽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박율은 고통에 떨리는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천사의 능력이 아무리 제약을 받았다지만, 아직 죽지 않은 이에게 힘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
무언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
이런 경우의 수가 전무하진 않았다.
단 하나.
『...분신체.』
마르가리타의 시선이 플라우로스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쓰러진 백봉기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번쩍!
그의 손에 있던 청동거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함께 마르가리타의 품에 있던 박율이 빛의 입자가 되어 허공에 흩날린다.
푹!!!
묵직하고도 축축한 소리였다.
“...”
플라우로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아래에 박율이 있었다.
그것도 플라우로스의 복부를 꿰뚫은 채 말이다.
『저 미친...』
마르가리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있어 그 말은 최고의 극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