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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사자 망치를 들다-112화 (112/183)

112화

방금 전까지 마기를 토해내던 기우는 겨우 진정을 되찾더니, 고개를 들어 백봉기를 보았다.

그리고 기우를 본 백봉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보며 웃는 아이에게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기...기우야...?”

백봉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후...”

아이가 입을 연다.

허나, 그는 더이상 백봉기가 알던 기우가 아니었다.

그는 기우의 모습을 한 악마 플라우로스였다.

“아이의 몸은 불편하군.”

아이의 입에서 플라우로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러자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기.

누에가 실을 뿜어 고치를 만들 듯 아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아이의 몸을 휘감았다.

점차 불어나는 아이의 몸뚱이.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의 마디마디가 커지며,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같던 가녀린 아이의 몸에 근육이 불어났다.

이내 아이의 몸은 곱절로 커져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다.

플라우로스는 손을 펼쳐 염화를 피우며 온갖 기행을 부리더니 다시 주먹을 쥐며 염화를 꺼트렸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성인의 모습을 한 플라우로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음?”

플라우로스가 백봉기를 보았다.

그의 얼굴엔 파르르 작은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백봉기는 그의 말에 그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이리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악마와의 계약이 의미하는 바는 으레 이런 것이니까.

허나, 이런 형태일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의 몸을 취해 제 장난감마냥 제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니.

백봉기의 목젖이 일렁거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목소리를 듣게 해주었지 않느냐?”

플라우로스는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비소를 한껏 머금은 채 말했다.

백봉기의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무슨 소리지?”

“이런 말은 없었잖아!”

“그대가 원하는 대로 아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지 않은가? 게다가 이 모습.”

플라우로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 몸을 과시하듯 말했다.

“네가 그리 사랑해 마지않던 아이의 큰 모습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줬는데.”

그의 말에 백봉기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두 눈엔 살기가 어려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플라우로스는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들썩였다.

백봉기의 손에서 튀어나온 뼛조각이 플라우로스의 목을 겨누었다.

“...돌려놔.”

“무엇을 말인가?”

“빨리...”

그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플라우로스는 백봉기가 겨눈 뼛조각에도 아랑곳않고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리곤 뼛조각을 목에 가져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죽이고 싶으면 죽이게.”

“...”

“애비가 자기 새끼를 죽인다는 데 내가 뭐라고 말리겠나?”

백봉기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울분에 찬 날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플라우로스 역시 그것을 안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고개를 들어 백봉기를 보았다.

“...아빠.”

하염없이 떨리던 백봉기의 눈동자가 기우였던 남자를 보았다.

기우의 목소리였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아이의 목소리였다.

죽일 수 없었다.

그의 목에 날붙이를 들이밀 수 없었다.

백봉기의 손은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우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기우는 말했다.

아니, 기우의 목소리가 백봉기의 귓가를 맴돌았다.

플라우로스는 피식 입가를 달싹이더니 발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나는 약속하지.”

“...”

“더 좋은 그릇을 찾는다면 이 몸을 돌려주도록 하지.”

플라우로스는 말했다.

기약 없는 약속이었다.

허나, 그것마저 백봉기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동아줄이었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플라우로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더니 창문이 붙어있던 벽 자체를 뜯어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을 높이 들어 마기를 날카롭게 다듬고는 그대로 던졌다.

“이제 즐기러 갈 시간이로군.”

백봉기는 멀어지는 플라우로스를 보고 있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것이 그의 심장을 부술 듯 시큰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필시 핑계라고 비난을 하겠지.

백봉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혐오감이 밀려든다.

자괴감이 심장을 쓰라리게 했으며 절망감이 세상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섬광이 쏟아졌다.

백봉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흑으로 가득 찬 세상에 유일한 백이었다.

백봉기는 일어났다.

그리고 빛을 따라 걸었다.

* * *

“달빛이 보이는 정원...”

단탈리온이라는 마왕이 내뱉은 말이 선연히 떠올랐다.

지금 박율이 마주하는 풍경이 그랬다.

쏟아지는 햇빛을 가린 심연 아래 은은한 빛은 마치 달빛을 연상케 했고, 사방에 쓰러진 이들은 정원의 수풀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풍경이었다.

“난장판을 벌여놓았군.”

그 너머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남자.

박율은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플라우로스의 첫 번째 그릇.

그리고 그의 뒤로 보이는 백봉기까지.

그들을 마주한 순간, 박율의 미간이 좁아졌다.

동시에 그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박율은 저 그릇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허나, 믿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박율은 부정했다.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남자는 백봉기의 아들인 기우의 얼굴과 닮아 있었으니까.

박율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흠칫 그를 보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왜 그래!?』

“자...잠깐만요...”

그제서야 모든 퍼즐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10 여년 전 백봉기가 그에게 남긴 말을, 그리고 기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저 남자는 성인의 모습이었다.

항상 봐왔던 기우는 기껏해야 10살 남짓한 아이였으니, 저 남자가 기우일 것이라곤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 나서야 저 남자에게서 기우의 얼굴이 보였다.

박율을 마주한 플라우로스는 탄사를 내뱉으며 짧은 박수를 쳤다.

“역시 기대 이상이야. 한낱 인간의 몸으로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그의 시선은 광활하게 펼쳐진 지상을 향했다.

사방에 떨어진 악마들의 사체들과 사자들.

그 위를 뒤덮은 검고 붉은 피들까지.

마치 태백산맥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는 듯 그의 눈은 즐거움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플라우로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박율을 보았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그는 황홀한 듯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박율은 이를 빠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런 눈이었어.”

『...마왕놈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다 변태 같냐.』

박율의 옆에서 플라우로스를 보던 마르가리타는 인상을 팍 지으며 말했다.

플라우로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대는...?”

『알아서 뭐하게?』

“허.”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플라우로스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신 양반이 인간계엔 무슨 일이지? 그 알량한 잣대나 들이밀면서 고고한 척 턱이나 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러니까 알아서 뭐하게. 이제 뒤질 양반이.』

“명색이 천상계 존재가 말을 그리 험하게 하면 쓰나.”

그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나머지 손으로 팔뚝을 팍 치며 주먹감자를 먹였다.

“호오.”

마르가리타에 행동에도 플라우로스는 흥미롭다는 듯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터벅.

박율이 한 발자국 걸어나온다.

“돌려놔.”

“무엇을...?”

“그 몸은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몸이 아니야.”

“그런가? 난 모르겠다만.”

“죽여버리기 전에...!!!”

분노에 절은 박율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플라우로스는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아직 진짜 파티가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플라우로스가 양팔을 넓게 펼쳤다.

“네게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나도 그대의 곁에 있는 양반이랑 비슷한 그대의 팬이니, 그대가 날 죽이겠다면 두말 없이 받아들이겠네.”

『까고 있네.』

마르가리타는 으르렁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흘깃 박율을 보았다.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돼. 저거 함정이야.』

하지만 박율의 기세를 꺾이지 않았다.

그는 양손에 든 무기를 고쳐잡았다.

“뭐하는가? 죽이고 싶다면 죽여도 된다니까.”

플라우로스는 턱을 치켜 들어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음을 작정하고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 여기서 나를 죽이면 이 아이의 몸까지도 죽게 되겠지만 말이야.”

플라우로스의 말은 너무나 사악했으며 간사했다.

그 역시 그가 취한 아이를 알고 있었으며, 그 아이와 백봉기를, 그리고 박율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속지마.』

“알아요.”

허나 마르가리타에 눈에 비친 그의 얼굴은 그것을 아는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살의로 가득 들어찬 그런 모습이었다.

마르가리타는 그를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는 땅을 박차고 달려나간 뒤였다.

『...!!!』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살의가 가득했다.

박율의 행동에 플라우로스는 짐짓 놀란 기색을 감추진 못했지만, 여전히 양팔을 벌린 채 박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어를 위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리고 박율의 망치가 플라우로스의 머리로 치닫는 순간.

캉!!!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뼛조각의 가루가 흩날렸다.

박율은 자신의 앞을 막은 백봉기를 보며 무거운 날숨을 내뱉었다.

“...형.”

“...”

백봉기는 대답 없이 망치를 튕기고는 뼛조각을 휘둘렀다.

박율은 몸을 뒤로 그의 공격을 피했다.

아주 잠시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늑대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백봉기였다.

허나 더 이상 그곳엔 백봉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욕심에 눈이 먼 괴물이었다.

백봉기의 눈에 비친 박율 역시 그러했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괴물.

백봉기는 뼛조각을 높이 들어 박율의 목을 겨냥했다.

그의 뒤로 플라우로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내렸다.

“이걸 어쩌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겠는걸.”

그는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을 즐기는 웃음이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분노를 치솟게 만드는 그런 소리였다.

허나, 백봉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의 두 눈은 흔들렸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박율은 침음했다.

“...”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말한다.

여전히 살기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를 잠시간 지켜보던 박율이 미소를 흘겼다.

“내가 말했지. 찾으러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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