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마왕 플라우로스.
그의 존재만으로 세상에 자욱한 마기가 내려앉는 것만 같은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너무나 익숙한 이의 향기가 코를 스친다.
백봉기였다.
박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신경이 아주 잠시나마 분산된 찰나의 순간, 까마귀는 그 간극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였다.
자리를 벗어난 신경이 제 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이었다.
박율은 그의 접근에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까마귀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수십 갈래의 파랑으로 갈린 그림자 사이로 까마귀가 나타났다.
자욱한 그림자가 그를 뒤덮는 동시에.
푹!!!
검은 핏방울이 흩날린다.
흩날린 핏방울은 박율의 얼굴에 튀었다.
암모니아 같은 피의 비린내가 얼굴에 만개했다.
허나 그것은 그의 피는 아니었다.
박율은 떨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익숙한 덩치의 악마가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것도 등가죽에 튀어나온 첨예한 검날과 함께 말이다.
차악!!!
검날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다.
[커...커헉...]
데판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왈칵.
그의 복부에서 쏟아져나오는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박율은 아주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아니, 믿지 못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었다.
인간을 미워하던 악마가 인간을 위해 제 몸을 희생했다는 게 말이다.
물론 단탈리온의 말을 듣고 박율을 도와주러 온 악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한 행동은 목숨을 받친 희생이었다.
“...!!!”
[뭘...멍하니...서있는...거냐.]
차악!
까마귀의 검이 연달아 데판의 몸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하지만 데판은 여전히도 박율을 지키며 서 있었다.
“뭐해요!!! 그러다 죽어요!!!”
까마귀는 박율을 죽이려는 듯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지만, 그것 역시 데판에게 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데판은 비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박율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데판의 움직임에서 생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젠 틀렸다.]
데판은 계속해서 파고드는 까마귀의 공격을 받으며 말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 울고 있었다.
“아니...!!!”
[...흡수해라.]
“...!”
[어차피 이 몸은 얼마 못 가 죽는다.]
그리고 데판은 어이가 없다는 실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뒤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데판의 한마디는 너무나 처연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침음을 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안돼요!!! 아직...!!!”
[이제야 주군의 뜻을 이해하겠군.]
인간의 그림자가 되라는 주군의 명이 귓가에 선연했다.
데판은 고개를 살짝 꺾어 박율을 보았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왕의 자질을 타고난 이였다.
주군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거는 것 역시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도대체 주군의 명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시간이 없다.]
데판의 한쪽 무릎이 무너졌다.
그 틈을 타 까마귀의 검이 날아들었다.
푹!
[어딜.]
하지만 그것 역시 데판의 손이 먼저 막아섰다.
그의 팔뚝을 뚫고 검날이 튀어나왔다.
“다른 방법이...!!!”
[빨리 흡수해라. 내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기 싫다면 말이다.]
데판은 결연했다.
그의 몸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무엇보다 단단했다.
박율은 아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왼손을 높이 들었다.
박율 역시 알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명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대로 간다면 정말 그의 죽음은 개죽음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댈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미안하다는 말은 집어넣어라. 역시 주군의 명이니 말이다.]
끝까지 데판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
[흡수]
권능이 개방되며 데판의 힘이 박율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양감이 차오른다.
시큰거리던 상처들이 수복되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윽고 데판의 몸은 새카만 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박율은 고개를 들었다.
데판의 의지가 그의 몸에 깃들었다.
그의 마기가 박율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고 있었다.
데판 역시 군단장이었다.
그것도 그는 단탈리온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자 유일하게 마왕에 대적할 수 있는 악마였다.
그의 마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대했다.
“하...”
증기처럼 사라진 데판과 함께 그의 숨결에 허공에 흩날린다.
박율의 시선은 검게 물들은 대지로 향했다.
죽은 이들과 쓰러진 이들.
그리고 이젠 겨우 숨만 붙든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까지.
그 사이엔 박석훈마저 바닥에 쓰러진 채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까마귀를 향했다.
절망, 원망, 그리고 깊이 숨어져 있던 복수심마저 타오르고 있었다.
까마귀만 없었다면.
남산타워에서 당신을 죽였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도대체 당신은 왜 이런 짓을 벌이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들 그는 이미 괴물이었다.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감정은 장작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씨는 까마귀를 향했다.
“넌 선을 넘었어...”
까마귀가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허나 이번엔 그의 발이 땅에서 떼어지기도 전에 박율이 먼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신속]
여지껏 느껴본 적 없는 힘이 느껴졌다.
권능을 개방함과 동시에 그의 몸은 이미 까마귀의 어깨죽지를 베어내고 나타났다.
차악!
까마귀의 검붉은 핏물이 비산한다.
지금 까마귀의 상태로는 반응도 채 하지 못할 정도였다.
흩날리는 핏물이 박율의 눈을 뒤덮었지만, 박율은 개의치 않았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도, 그의 두 눈은 까마귀를 향했다.
“커헉...”
그리고 핏방울이 흙바닥에 혀를 내밀기도 전에 박율의 발은 또 다시 움직였다.
콰직!
이번엔 망치가 까마귀의 복부를 후려쳤다.
콰과광!!!
까마귀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을 부유하더니 바닥에 수차례 처박혔다.
박율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또 다시 발을 디뎠다.
그의 검과 망치가 까마귀의 온몸에 생채기를 만든다.
시간으로 환산한다면 10초 이내.
까마귀의 전신이 그의 피로 뒤덮일 때까지 걸린 속도였다.
차악!
박율의 검이 까마귀의 다리마저 베어낸다.
동강 난 다리는 바닥에 떨어졌다.
박율은 복수심에 불타는 눈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곳엔 안드라스의 목소리와 까마귀의 목소리가 한데섞여 기괴한 괴성을 내뱉는 괴물이 있었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박율은 망치를 높이 들었다.
“당신만 아니었어도...”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마기가 순식간에 가까워진 것은.
하지만 박율은 그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까마귀를 죽여야 한다는 일념이 그의 귀를 틀어 막고 있었다.
“...!!!”
박율이 날아오는 마기를 눈치채고 피하려 몸을 비틀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 속도를 상회할 순 없었다.
날아오는 마기가 그의 몸을 꿰뚫으려는 순간, 검게 물들은 세상에 한줄기 섬광이 쏟아졌다.
쏴아!
섬광 속에서 새하얀 손이 하나 빠져나왔다.
『...너무 오래 기다렸지?』
쏟아지는 섬광과 함께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박율의 반쯤 벌어진 눈은 그녀의 목소리로 향했다.
그의 앞에 마르가리타가 쭈그려 앉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박율의 눈을 뒤덮은 핏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빨리 도와주고 싶었는데 상사가 워낙 고집불통이라 시간이 조금 걸렸어.』
마르가리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섬광은 땅을 기어오는 마기마저 불태웠다.
『오랜만이네.』
고작 한 마디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박율은 긴장이 풀린 듯 여태껏 참아왔던 숨을 뱉어냈다.
울컥 눈물을 쏟아낼 뻔도 했다.
“어떻게 알고...”
『내가 말했잖아. 언제든 지켜보고 있는다고.』
따스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것보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더욱 따스한 바람을 일게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안식이었다.
그녀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박율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건 그렇고...』
마르가리타는 눈을 가늘게 떠 상황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 사이 박율이 죽이려 하던 까마귀가 그림자를 타고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딱히 신경을 쓰거나 하진 않았다.
그의 상태라면 얼마 가지 않아 알아서 죽을게 뻔했다.
아니, 차라리 죽지 않는 게 더 나을 테지.
『고생했어.』
마르가리타는 손을 뻗어 박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작 인간의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마왕 하나를 초죽음 상태까지 만든 것은 마르가리타로써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근데 넌 네가 무슨 짓을 했는 지 알고 있어?』
“...”
『마왕을 상대할 거면 안드라스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
마르가리타는 한숨을 팍 내쉬며 말했다.
마왕이라는 존재는 으레 그러했다.
너무나 강대한 마기를 가지고 있기에 존재만으로도 온갖 파란을 일으킨다.
허나 그렇기에 그들의 현현에는 많은 제약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왕이 둘이나 있다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심연이 아무리 깊어졌다한들, 세상에 마기가 얼마나 뻗쳤다한들 마왕을 둘이나 차지할 여백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마왕들에게 있어 서로의 존재는 쉽게 말해 족쇄였다.
같은 땅 위에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렇기에 기왕 마왕을 처리할 생각이라면 하나씩 처리하는 것보단 한꺼번에 둘을 상대하는 편이 최선일 터였다.
하지만 박율은 그러지 않았다.
되려 상대하기에 불리한 쪽으로 판세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몰랐겠지만...』
“알고 있었어요.”
『뭐?』
“다 계획이 있어요.”
『허...』
박율은 그새 마음을 다잡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엔 결연함이 돋보였다.
마르가리타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입을 꾹 닫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더라도 끽해야 허세겠지.
일개 인간이 어떻게 혼자 악마를 상대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이해할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그라면 할 수 있는 것만 같은 괴상한 기분이었다.
당장 그녀가 본신을 드러내 상대한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서, 박율이라는 남자는 승리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은 있다니까...』
“나름대로 있죠.”
『그래, 매번 이상한 짓은 해도 확실한 아이니까.』
마르가리타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를 믿는다는 신뢰가 돋보이는 미소였다.
『대충 알겠지만, 내 상태도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야. 제약을 너무 많이 받은 터라 제힘의 반절도 끌어내지 못할 거야.』
“제약이요...?”
『네가 하도 개짓거리를 해대서 말이지. 뒤처리 하느라.』
“아.”
그녀의 말에 박율은 이해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헛웃음을 살짝 터트렸다.
『그리고 네가 죽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말이지.』
“...”
마르가리타가 화신체를 가지고 현현했을 때부터 대강은 알고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보다 좀 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느껴지는 힘 역시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박율과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두 번 정도. 내가 힘을 끌어올릴 수 있는 횟수야.』
“그 정도면 충분해요.”
박율은 무거운 날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었던 여정의 종막이 다가오고 있었다.